2017년 9월 10일 일요일

누가복음 5:12-32 병자를 고침과 레위를 부르심,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병자를 고침과 레위를 부르심
누가복음 5:12-32

12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나는 권세가 잇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27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사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잇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1. 문둥병을 고쳐주신 예수님

본문 12-13절에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가 와서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원하시면 자신의 몸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그러자 즉시로 문둥병이 떠났습니다. 문둥병은 그 당시에 한 번 걸리면 고치지 못하던 병으로 알려져 있었고 또 실제로 잘 고치지 못했습니다. 문둥병을 고칠 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으로서 한 번 걸리면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문둥병을 깨끗케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고 또 감사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썩어져 가는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을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그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라고 했는데, 성경대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음을 얻은 다음에 성경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15-16절에,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는게 위주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기 위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생활이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생활이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늘 해야 됩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모든 일을 하다가, 그 다음은 한적한 곳에서 가서 기도하는 생활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 없이 복잡한 곳에서 일만 하면 안 됩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만 모든 것을 이기고 믿음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2.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본문 17-20절에,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갔습니다. 예수님 계셨던 그 집의 문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침상 채로 무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 위에 있는 지붕을 뚫을 때, 예수님에게 무엇이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앞에 뭣하나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흙덩어리 하나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만 예수님 머리에 맞을 뻔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 설교시간에 은혜를 못 받습니다. 예수님 머리로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떨어졌다는 말이 없습니다. 떨어졌으면 떨어졌다고 성경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떨어지게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기와장이 하나도 안 떨어지게 조심하여 했을 것입니다. 기왓장을 멀리 가져다가 벗겨 내 버리고 살살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게 지붕을 뜯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5에는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본문 21-23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보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 하는 것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렵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말하는 입장에서만 보면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렵습니다. ‘죄 사함 받았느니라’라고 하는 말은, 죄 사함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눈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쉽게 말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무조건 말로만 ‘받았느니라’ 해 놓으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일어나라”라고 했다가 만약에 못 걸어가면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 말로 하기에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면에서 보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죄 사함을 받은 결과로 걸어가게 되는것인데, 이 사람은 죄 때문에 병이 난 것이니까 걸어가는 것이 죄 사함을 받은 결과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했으면 걸어 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사함을 받아야 걸어갈 수 있습니다. 즉,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근본이고 걸어가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쉽습니까? ‘죄 사함 받았느니라’ 하는 근본과 ‘걸어가라’는 결과 중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죄 사함 받은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일어나서 걸어가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쉬운 문제입니다.

본문 24절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까 그 사람이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걸어갔습니다. ‘인자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심은 죄 사함 받은 결과로서 중풍병자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했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람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람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가 죄사함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죄사함 받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중풍병자가 걸어간 것입니다. 주께서
“걸어가라”하실 때에, 이 사람이 일어나 걸어갔고, 그것은 죄가 사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결국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어느 것이 쉽고 어렵습니까? 이것의 근본은 죄 사함 받는 것이고 걸어가는 것은 결과인데, 어느 것이 쉽습니까? 다시 말하면 죄 사함 받은 것은 속병을 다 고친 것이고, 걸어가는 것은 병을 고친 결과로된 것인데,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속병을 고치는 게 어렵습니다. 이것을 고치고 난 후에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병을 고쳤으니까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을 고쳤으면 걸어가게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병을 고치는 게 어렵습니다. 고쳐 놓으니까 걸어갈 수 있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게 어렵다고 해야 됩니다. 죄 사함 받는 것이 어렵고 걸어가는 것은 그 열매니까 사실 더 쉬운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병, 즉 근본을 고치는 것이 어렵지, 고친 다음에 걸어가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자동차가 발동 걸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가는 것이 어렵습니까? 발동 걸어놓으면 가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자동차가 갈수 있는 것을 보니까 발동 걸린 증거입니다.

누웠던 침상을 가지고 가라

이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그랬습니까? 나은 증거를 삼기 위해서 침상을 가지고 가란 말씀입니다. 자신이 중풍병자로 누워서 걸어가지 못하던 것을 늘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생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하기 위해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25절에,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3. 레위를 부르심

본문 27-28절에,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나를 좇으라’ 하시니까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좇았습니다. 여기서는 마태를 레위라고도 했습니다. 레위 혹은 마태라고도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돈을 많이 버는 직분이고, 그래서 대개 다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인으로 지적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리인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 사람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세리가 세리직분을 비롯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라 하는 이 제자가 바로 마태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고 돈을 많이 버는 직장, 혹은 관직에 앉았어도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실 때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는 이런 신앙이 바로 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능력 있는 신앙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방함

본문 29절에,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크게 감사함으로 큰 잔치를 배설하여 예수님을 대접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태가 세리라서 그의 친구들도 세리인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리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청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본문 30절에,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세리를 다 죄인으로 죄 많은 사람으로 취급했었습니다. 마태도 죄 많은 사람이었고, 친구들도 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 많은 사람들인 너희와 어찌하여 예수가 같이 먹고 마시느냐’고 하며, 예수님을 시원찮다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비방했습니다.

의원은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본문 3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나 쓸데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의사가 자기 자신이 깨끗하다고 할지라도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는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병들고, 더럽고, 냄새나는 그런 사람이 의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2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쓸 데 있는 것처럼, ‘나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자기 죄를 가지고 나와서 통회하는 사람,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
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올 때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됩니다. 자기 죄를 찾아서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긍휼을 믿게 됩니다.

아무리 잘한 것 같은 일에도 잘못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의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령이 어두워져 있고 그 속에 그리스도의 빛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양심을 쓰고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다면, 사람은 다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할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각자가 다 자기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자신의 예수님이 되고, 자신의 생명이 살 수 있게 됩니다. 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자기 잘못부터 먼저 보아야합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또 기도하지 못한 죄, 믿음으로 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의를 이루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회개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

시편 51:17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무엇입니까?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멸시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영접하십니다.
이사야 57:15에는,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지존무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속성을 말하는 것인데 즉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란 말씀입니다.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라고 했는데, 영원까지 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원히’라고 해야지 ‘영원까지’라는 말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라는 개념이 ‘무한정’인데 ‘까지’라는 말은 쓸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영원까지’라 하지 말고 ‘영원히’라고 해야겠습니다. 영원히 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시다.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과 함께 거한다고 하셨지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영,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겸손한 자, 통회하는 자, 겸손한 자의 영혼, 통회하는 자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
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는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찾아서 늘 회개해야 됩니다. 모든 지나간 일을 반성해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다음은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제사를 드릴 때는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물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늘 믿고, 의지하고, 구속을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만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그러셨는데, 자신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나와야 되겠습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면서 구속의 제물을 의뢰하고,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산제사를 드리도록 항상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 금식하라

본문 33절에,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와 바리세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다.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바리새교인들이 질문했습니다.

본문 34-35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는데, 혼인집에서 결혼식 하는데 손님들이 오면 금식하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랑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신랑이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라고 말씀하시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고 하십니다. 그 빼앗길 날이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바로 ‘신랑을 빼앗길 날’입니다. 그날은 금식하라는 말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때 금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새도 신랑을 빼앗길 때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을 빼앗길 때, 잃어버릴 때, 예수님을 멀리 떠난 때, 그 때는 금식이라도 하면서 예수님을 다시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다음에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을 다시 찾아야 됩니다.

성찬예식 거행하기 전에 전 교회적으로 금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북에서는 성찬예식 거행하기 전에 금식하는 기간을 정해 며칠 동안 금식을 하고, 그리고 성찬예식을 거행한 적이 많았습니다. 금식하면서 주님을 사모하고 찾으면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는 금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았어도 좀 더 신랑을 사모하고,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하고, 생명으로 삼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날에는 금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예수님으로 더불어 동행하는 때는 혼인잔치 때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좀 멀리하고, 못 섬기고, 세상을 가까이 할 때에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며 그 분을 찾아야 됩니다. ‘신랑을 찾아야 된다’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부르러 오셨습니까? 의인을 부르러 오셨습니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습니다. 병든 사람, 약하고 냄새나고 썩어져 들어가는 그런 병든 사람을 의원 되신 예수님께서 부르러 오셨습니다. 

본문 32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때는 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영접해 주십니다. 자신의 죄를 찾아서 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받아 주십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바리새교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바리새교인은 감사했습니다. 무엇을 감사했습니까?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토색하지 아니하고, 음란하지 아니하고, 또 세리와 같지도 아니한 것을 감사하나이다”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까? 받지 않으셨습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그 다음에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할 때에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 죄를 가지고 나와서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영접해 주십니다. 죄 있는 사람은 나와서 회개하면 좋을것인데, 그렇다면 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죄라고 성경에 그랬습니다. 다 죄가 있는 줄 알아야 됩니다.
‘나는 다 잘했다’라고 하는 것은 벌써 잘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정말로 다 잘한 사람이 자기가 다 잘했다고 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그 안에 못한 것과 자기 책임, 자신의 잘못이 있습니다.
언제든 누구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에나 자신의 잘못을 찾아야 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또 어떤 일이 생겨도 자신이 잘한 것을 찾지 말고, 자기 잘못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건에 있어서 자신이 잘한 것도 있겠지만 못한 것도 있습니다. 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서든 못한 것이 있고 잘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에 있어서 자신이 잘했다고 해도, 한 80%만 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도 20%는 못한 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못했다고 해서 한 80% 못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20%는 또 잘 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에서 항상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므로 회개해야합니다. 10%만 잘못을 했다고 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므로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버리시기 때문에 희망이 없고, 자기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하시는 예수님 앞에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금식하라고 했습니까? 신랑을 빼앗길 때 금식하는 것입니다. 신랑을 찾아서 주님으로 즐거워할 때에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4.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

본문 36절에,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서 낡은 옷에 붙이는 자는 없습니다. 그럼 둘 다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자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팽창하는 힘, 불어나는 힘이 있어서 병에다가 넣어 놓으면 며칠 뒤부터 속에서 끓어 올라오기 때문에 병마개가 빵 하고 빠져서 포도주가 쑥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사이다 병을 열 때에 나오는 식으로 새 포도주가 불어나는 힘, 즉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병이 없었고 가죽부대에 넣었는데, 낡은 가죽부대는 힘이 없습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점점 불어나가면서 부대가 터집니다. 그럼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안 됩니다.

새 포도주(생명운동)를 낡은 부대(의문, 의식)에 잡아넣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로마서 7:6에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는 말씀에서 새것은 영이고, 묵은 것은 의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생명운동,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생명운동은 낡은 가죽부대라는 ‘의문’ 속에 쌓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예수님의 생명운동이 구약의 의식과 의문에 얽매여지면 둘 다 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3:6에는,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운동이고, 이 생명운동을 하는 것이 진리운동입니다. 의문의 묵은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의문의 묵은 것을 가지고는 영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운동 자체에 힘과 역사가 있습니다. 어떤 의문 속에 이것을 붙잡아 넣으려고 하면 터져나갑니다. 생명운동을 의문 속에 잡아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의식 속에 잡아넣을 수가 없고, 생명운동은 그 자체로서 계속 그대로 나가야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함

본문 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에서 ‘새 부대’는 진리입니다. 새 부대, 진리의 말씀 속에 넣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진리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져 나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해야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져 나갑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이것을 막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을 가지고 이것을 제재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진리의 말씀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 살아서 역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수가 막히면 생명의 역사가 중단이 되므로 가다가 막히면 안 됩니다. 나가야 되겠는데 막혀서 못 나가게 되면 생명의 역사가 중단됩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의 역사는 모든 부대를 터치고 나가고, 터치고 나가야 이것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만일 나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아직도 생명의 역사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속에 이 생명의 역사가 있어서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갈 때에, 어떤 것에 제제를 받아서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생명의 역사입니까? 생명의 역사는 가죽부대를 어떻게 합니까? 낡은 가죽부대를 터치고 나가야 진짜 생명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 이외에는 생명의 역사를 제제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는 제제를 받아도 안 되고, 받을 수도, 제제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의 역사는 계속 생명 길을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생명운동이 새 포도주 역사입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제도와 의식과 의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잡아넣어서 이 새 생명의 역사를 막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 생명의 역사는 의문과 제도와 의식에 잡아넣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생명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잡아넣다가는 다 터치고 나가기 때문입니 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고 했는데, 묵은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묵은 것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묵은 것만 하게 되어있고, 새것을 원하고 새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 즉 새 생명의 역사가 있는 사람은 늘 새것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역사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새 생명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묵은 것, 껍데기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내내 껍데
기 속에 살다가 그저 죽고 마는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