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고린도후서 10:1-18 우리의 싸움.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우리의 싸움
고린도후서 10:1-18

1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7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10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11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12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그러나 우리는 분량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10:1 너희 면전에서는 겸손하나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에게 권한다. 

10:2 내가 너희에게 갈 때에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동하는 자라고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강경하게 대하려는 것같이 강경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되기를 구한다. 

10:3 비록 우리가 육체 안에서 행하나, 육체를 따라 싸우지는 않는다. 

10:4 우리 싸움의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이다. 우리는 헛된 사상들을 파괴하고, 

10:5 하나님의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모두 파괴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 

10:6 너희의 순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는, 우리가 모든 불순종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10:7 너희는 외모만 보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확신한다면,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인 것같이 우리도 그러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10:8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이니, 내가 이를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10:9 나는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10:10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직접 대할 때에는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 라고 한다. 

10:11 이런 이는,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동하는 것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12 우리는 감히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이들과 우리 자신을 같은 부류에 두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다. 

10:13 그러나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 자랑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분량의 한계 안에서 자랑하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를 것이다. 

10:14 우리는 너희에게 가지 못할 자가 아니며, 한계를 벗어나 나아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르렀다. 

10:15 우리는 다른 이의 수고를 가지고 한계를 넘어 자랑하지 않고, 다만 너희의 믿음이 자라남을 따라 우리의 한계가 너희 가운데서 더욱 넓어져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바란다. 

10:16 이는 너희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지, 남의 한계 안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것들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10:17 "자랑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여라." 

10:18 인정을 받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이다.


1. 바울의 관용과 담대함

본문 1절에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하였는데,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바울이 강경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바울을 오해하고 있었으나 사실 온유와 관용의 바울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비방하든지 바울은 언제나 온유하고, 언제나 관용하며 의를 이루어 나간 바울입니다. 우리도 온유하고 관용하여야겠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담대하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필요합니다. 죄에 대해서 담대한 것도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용하고, 온유하고, 용서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셨는데, 그것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야 합니다.

양잿물도 먹으면 죽지만 세탁할 때에 필요합니다. 송곳도 쿡쿡 찌르지만 구멍 뚫어서 사용하는데 필요합니다. 다 필요합니다. 개는 집 볼 때에 필요하고, 닭은 새벽을 알리는데 필요하고, 소는 일하는데 필요합니다. 필요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방하고, 욕하고, 악평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반성하게 되고, 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평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파리 백 마리 잡아먹었다고 놀리고 비방을 해도 그것을 유익으로 받아야 합니다. 싸우면 안 됩니다. 파리 백 마리 잡아먹었다고 할 때에 “혹시 내가 파리 한 마리라도 잡아먹지 않았나?” 반성 해 보아야 하고, 파리 한 마리도 안 잡아 먹었으면, 그 사람보고 “나는 파리 한 마리도 안 잡아먹었다”고 얘기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사람이 파리 백 마리 잡아먹었다고 계속해서 떠들어 대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내가 파리 잡아 먹을까봐, 저 사람 통해서 파리를 안 잡아먹게 하시려고 그러는 것이다, 나를 만들라고 하시는 것이다”하며 잘 참고 자기를 만들어 나가면, 도리어 유익이 됩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나를 세우시려고 주시기 때문에 온유함과 관용함으로, 용납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핍박하는 사람, 비방하는 사람, 또 시험 거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 등 모든 것이 나를 바로 세우고,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참고 견디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복음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고 이겨서, 하나님의 복음이 더욱 많이 널리 전파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육체대로 행한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거짓된 비방에 굴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였습니다.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싸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을 하나님의 강력으로 파하라

본문 3-5절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싸워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강력이란 하나님의 만능이라는 뜻입니다. 비진리로 견고해진 것은 다 마귀의 견고한 진입니다. 바울 당시의 율법주의와 의식주의와 인본주의는 마귀의 견고한 진입니다. 즉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은 다 견고한 진으로 그것과 바울이 싸운다고 했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불교, 유교 이런 것 등이 다 견고한 진들입니다. 몇 백 년 동안 해나왔던 것들이기 때문에 견고한 진으로 강력하게 복음을 반대합니다. 그래도 복음은 그것들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절을 지어놓고 전체가 불교에만 충성하는 동네일지라도 복음을 들고 가서, 계속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면 하나님의 강력으로 마귀의 견고한 진이 깨어져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또 신신학, 신비주의, 의식주의, 인본주의 등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들이 견고하게 진을 치고 있는데 복음을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신령과 진리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에 있으므로 이 복음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면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능력으로 그것들을 다 깨뜨려서 하나님 앞으로 사로잡아서 인도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 혈과 육으로 하다가는 100% 다 실패하고 맙니다.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워 이기라

우리의 선한 싸움은 에베소서 6:12-17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는데, 자기를 단단히 무장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복음을 막는 정치, 즉 교회를 소멸하려는 정치가 있는데 하나님의 강력을 가지고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것에 지면 안 됩니다.

가정의 정사에도 복음을 막는 정사가 있습니다. 즉 안 믿는 식구가 있으면 “제사하라, 십일조 내지 말라, 주일에 놀러가자, 새벽기도 나가지 말라”는 등으로 복음으로 나가는 것을 막 습니다. 복음을 막는 정사에 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복음을 막는 정사들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큽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죽인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순교 당하는 것입니다. 순교는 특별한 반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여간 진리를 양보하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을 가지고, 모든 진리를 막는 세력과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양보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깨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나가면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고 남습니다. 이기면 영이 자라나고, 이기면 영의 자유를 얻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라

1) 나태성(懶怠性)과 싸워 이겨라 

그 다음에 싸움의 대상은 ‘자기’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대내전(對內戰)에서 잘 승리하여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서 자기 몸을 쳐서 언제나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대적이 자기입니다. 자기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망하고 마귀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이용 당하는 “자기”가 되어야 합니다. 즉 의의 병기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모든 부패성, 욕심, 물욕과 정욕과 사욕대로 나가려는 것, 자기 속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죄악 등과 싸워서 이겨야 됩니다. 죄악이 못나오게 해야 됩니다. 꿈속에서 죄 짓는 것도 못 나오게 해야 됩니다.
이기선 목사는 꿈에 죄 지은 것도 회개했다고 합니다. 영이 깨어 있지 못하고 신앙에 잠이 들어서 시시한 꿈을 꾸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이 깨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꿈을 꾸고, 또 교회에 나가는 꿈 등 보통 좋은 꿈을 꿉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선한 싸움을 잘 싸워 나가야 합니다.

자기의 나태성과 더불어 싸워서 이겨야 됩니다. 나태성이 원수입니다. 나태성 때문에 일이 다 틀어집니다.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하고, 게을러서 성경보지 못하고, 게을러서 할 것을 못합니다. 또 게을러서 예배시간에 늦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못씁니다. 나무로 말하면 썩은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부지런해야 믿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예수 믿으려 해도 부지런하지 못해서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새벽 예배에 나가고, 수요 예배에 나가고, 주일 예배에 나가고 또 전도하러 나가고, 심방하러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부지런히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부지런해야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고,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며, 하나님의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일이 창성해 나갑니다.

부지런하면 유익이 많습니다. 영적 유익도 많고, 다른 유익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더 부지런합니다. 부지런히 새벽 기도에 나갑니다. 또 수요예배에 안 빠지고 부지런히 참석합니다. 성경 읽는 것도 매일 몇 장씩 읽기로 결심하고 매일 꾸준히 읽습니다. 또 매일 기도 몇 시간씩 해기로 결심하고 부지런히 기도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심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심방합니다. 주일학교 반장들도 “내가 주일학교 반장 맡았으니까 전도하고 심방해
서 늘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심방하고 전도합니다. 부지런한 반장은 열심히 심방을 잘 합니다. 그래서 점점 그 반이 늘어납니다. 그러나 게으른 반장은 하나도 심방하지 않다가 학생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점점 줄어서 한 7명 맡겼다고 하면 몇 달 가서 5명 되었다가 또 얼마가면 2명 되었다가 하면서 자꾸 줄어듭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반장들 모아 놓고는 양을 7마리 맡겼는데, 잘 먹여서 새끼를 쳐서 부흥시키라고 합니다. 7마리 양이 얼마 있다가 보니까 5마리가 되고, 또 얼마 있다가 3마리가 되었다면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주인의 양을 점점 늘려도 시원치 않겠는데 점점 줄여 놓았으므로 얼마나 하나님이 진노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늘려 놓아야 됩니다.

전도부인이나 권찰들도 처음에는 몇 가정 맡았지만 점점 늘어나야 합니다. 10가정 맡았는데, 점점 가다가 9가정이 되고, 8가정이 되고, 7가정이 됩니다. 그래서 왜 줄어들었느냐고 물어보면 이사 가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사 가도 새로이 이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이사 갔으면 이사 온 사람을 전도할 생각은 안하고 왜 가만히 앉아 있습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하면 이사 오는 사람을 전도해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염리동 염산교회 어떤 분은 1년에 70명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잘한 것입니다. 얼마나 전도를 잘했는지 염리동은 다 염산교회 교인들입니다. 우리 교인들도 거기에 꽤나 있는데 까딱하다간 그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하면 1년에 80명, 90명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열심을 품고 심방하고 전도하여야 하겠습니다.

2) 교만과 싸워 이겨라

나태성과 싸워야 되고, 교만과 싸워야 됩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듯 하지만 대개는 속은 다 교만합니다.

3) 자유 방종과 싸워 이겨라

또 자유방종과 싸워야 됩니다. 다 방종심이 있습니다. 자유방종, 방탕, 음란한 마음과 싸워야 되고, 향락주의와 싸워야 되고, 시기, 분쟁과 싸워야 되고, 술 취하는 것과 싸워야 됩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됩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에, 바울이 “선한 싸움을 잘 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속에 있는 대적과 잘 싸워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복음을 반대하는 견고한 세력들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기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만능을 가지고, 대적하는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 됩니다. 선교사를 보내면, 선교하는 일에도 막는 세력이 많습니다. 막는 세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면 안됩니다. 막는 세력이 있어도 계속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선교하는 것입니다. “욕을 하면 먹자, 때리면 맞자, 죽이면 죽자”하며 결사 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력이 그것들을 다 이기고 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싸움에 이기는 방법

1)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이기는 방법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 신앙 양심을 쓰는 것 끝까지 말씀대로, 신앙 양심을 써야 합니다.

3)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 매일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4) 전신갑주를 입는 것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라고 했는데 전신갑주는 무엇인가? 첫째, 진리의 띠로 허리를 띠라고 하였습니다. 즉 진리로 무장을 하여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려면 진리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힘을 얻고, 말씀에서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또 앞에 언제나 의의 흉배를 붙이고 나가야 합니다.
즉 의의 길로만 가야 합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속의 복음에서 평안을 얻어야 하고, 복음 안에서 걸어가야 함을 뜻합니다. 믿음의 방패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계속 쳐들어오는데 그것을 믿음의 방패로 막습니다. 말씀과 믿음으로 막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 하신 후에 마귀가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여 먹으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믿음과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침략해 들어올 때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막아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로 막지 않으면 마귀가 점점 쳐들어옵니다. 결국은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는데, 마귀를 말씀으로 막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18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싸움에서 싸워 이기려면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힘으로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

3.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함

본문 6절에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복종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야 복종치 않는 사람을 벌한다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 벌해 놓으면 전부다 불복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몸이 건강하여야 수술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면 병난 부분을 잘라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몸이 약하면 병난 곳을 잘라내다가 몸 전체가 감당 못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할 때에 복종하는 사람이 많이 생긴 다음에 벌 하여야 합니다. 복종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은데 벌해 놓으면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나님도 바로 선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다리시다가, 바로 선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본문 7절에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도 중심을 보고 그 사람의 속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4. 주께서 주신 권세로 교회와 교인들을 세워 나감

진리를 세워 나가는 교인, 선한 싸움에 이기는 교회가 되라 

본문 8절에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파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교회를 세우는 것, 즉, 교인들을 살려내고자 하는 게 목적입니다.
교인들을 일으켜 세워서 선한 싸움에 이기는 교회를 만드는 것, 즉, 진리를 세워 나가는 교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울의 목적입니다.

말씀의 세계에 들어감으로 무너지지 말라

그러나 교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 외모만 자랑하는 사람들은 교인들의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교인들의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은혜 받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외부적 감동입니다. 감동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즉 외부적 감동과 내부적 감동이 있습니다.

외부적 감동은 강하며, 뚜렷하며, 갑자기 됩니다. 그러나 내부적 감동은 세미합니다. 세미한 음성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느다랗고, 소리가 작고,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들어가야 들립니다. 즉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내적감동은 안 들립니다. 외적 감동은 그저 떠들썩하며, 손뼉을 치며, 힘 있게, 열광적으로 합니다. 대개 기도원 운동들이 외적감동입니다. 신비주의 운동은 전부 다 외적 감동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됩니다. 갑자기 무슨 새로운 결심이 생기고, 은혜받은 것 같습니다. 외부적 감동은 일시적으로 물을 퍼 붓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더워서 답답할 때에 강물에서 물을 떠다가 머리에 끼어 얹는 것과 같습니다.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또 마릅니다. 그러므로 또 물을 끼어 얹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적 감동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적 감동은 자기가 생수의 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겔47:3-5). 한 발자국씩 자기 혼자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을 끼어 얹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이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13-14에, 예수님이 내가 주는 생수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내적 감동으로 생명의 역사입니다. 외부적 감동은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다. 일시적 감동이고, 일시적 평안이고, 일시적으로 힘이 나는 것입니다. 얼마 있으면 다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내적 감동인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열광적이고 갑자기 되는 외부적인 감동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외부적 감동으로 박수치고, 방언하고, 힘을 쓰며 열심히 하지만 사실은 되는 게 없습니다. 몇 십 년 해도, 늙어 죽도록 해도 되는 게 없습니다. 몇 십년해도 마르면 한 바가지 끼얹고, 마르면 또 한 바가지 끼얹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감동의 세계인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방언하는 사람에게도 “말씀이 제일이다”하며 말씀으로 인도해 나가면 방언을 하다가 그만 둡니다.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2명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합덕에 어떤 목사가 중국 방언을 한다고 소문을 내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방언을 어떻게 하나 보자”하며 왔습니다. 그런데 그중 중국 음식점 하는 중국 사람이 몇 사람 있었답니다. 한참 중국 방언을 랄랄랄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중국 음식점 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진짜 중국말로 했으면 한마디라도 알아야 들어야 될 텐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한다고 하며 전부 허튼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남을 속이는 것이고 자기도 속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속상한 사람들은 남의 상갓집에 가서 밤새도록 울어댄다고 합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진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누가 죽어서 울었습니까?” 하면 “몰라요”합니다. 누가 죽었는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울어서 속이 시원하게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방언도 그와 비슷합니다. 방언을 하면 속이 시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언을 못하게 하면 병이 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만 방언을 못하게 하고 집에서나 산에서는 하게 하고, 자꾸 성경 말씀만 가르치면 말씀을 따라오게 됩니다. 그 때는 방언을 하라고 해도 안합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해 놓으면 교회가 어지러운 교회가 되고, 혼란해지고, 마귀가 역사합니다. 성경에 통역 없이 교회에서 방언하지 말라고 했는데 성경을 어기고 나가는 교회는 사탄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진리를 세워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진리를 세워나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진리문제가 아닌 것을 가지고 “뭐가 잘못 되었다, 뭐가 틀렸다”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갈 수가 없습니다.
진리문제가 아닌 것은 도와주고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5. 바울을 비방함

본문 9-10절에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편지로는 중하고 힘이 있으나 실제로 대면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키가 작고, 눈병이 있으므로 아주 볼품이 없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편지할 때는 강하고, 만날 때는 약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지할 때나, 만날 때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6. 성경말씀을 세우는 것을 표준으로 할 것

본문 12절에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잘난 맛에 산다고,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저만 잘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 없는 줄 압니다. 자기가 제일이고,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지혜가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면서 스스로 칭찬하고 자랑합니다. 주님이 칭찬해야지, 자기가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헤아리는 것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자기는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가지고 애통해야 합니다. 자기는 모든 것을 바로 한 것 같으나 그것들이 성경에 맞아야 합니다. 또 자기는 바른 말을 한 것 같으나 그것도 성경에 맞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표준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에 성경을 맞추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표준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세워나가는 게 표준이어야 하고, 성경문제가 아닌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나 자기는 낮아져서 겸손히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7. 하나님이 주신 분량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만 자랑하라

본문 13절에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눠주신 분량이 다 있습니다. 그 분량대로만 하라는 것입니다. 분량의 한계를 넘어가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교회에 후임목사가 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임 목사가 그 교회에 원로 목사님이 계시는데도, 그 교회를 자기가 한 것처럼 자랑을 하며 다녔습니다. 사실은 원로목사가 개척했고, 자기는 후임으로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므로 원로 목사가 “이 사람을 데려 와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한계를 넘어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제가 한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남이
해놓은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합니까? 남이 해놓은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하는 것은 분량 밖의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 분량의 직무만 해야지, 월권행동을 해서 남의 일에 간섭하려고 하면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량 안에서 자기가 할 것만 하라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집사의 한계가 있고, 장로의 한계가 있고, 목사의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서 집사가 장로 행세를 하려고 하고, 장로가 한계를 넘어서 목사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은 다 직무의 탈선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그러므로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교회마다 한계를 지켜야 합니다. 또 교역자들도 자기 한계를 지켜야 됩니다. 목사가 되면 다 된 줄 알고 “너도 목사고 나도 목사이니 너는 너고 나는 나다”하며 선배 목사와 일대 일로 나가는데, 목사 된지 몇 년도 안 되어서 윗사람인 선배목사와 일대 일로 나가는 것은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가 어디까지이고, 자기 윗사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무시하고 자기가 제일인양 생각하며 나가는 것은 한계를 넘는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한계를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남의 터 위에 세우지 않으려고 힘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음

본문 15절에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남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한 것 같이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는데, 한계를 넓히려면 많은 사람을 잘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한계가 넓어집니다. 또 우리 전체의 한계가 넓어지려면 개척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보내어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의 한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계를 넓히는 방법은 전도하여 다른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방송을 듣고 우리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전도했으므로 한계가 넓어진 것입니다. 부산에서 4년간 우리가 내보내는 방송을 듣고 우리 교회를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한계가 넓어진 것입니다. 한계가 넓어지면 그 만큼 또 힘이 듭니다. 그 만큼 관리하여야 하고, 물질도 그 만큼 많이 들어가야 하고, 노력도 그 만큼 많이 해야 됩니다. 구역장들은 남의 것 가져다가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구역장들 보면, 새로운 교인이 오면 서로 자기 구역으로 데려가겠다고 싸움을 하는데 옳지 않습니다. 새로 나온 사람을 두고 “너는 내 구역이다”하며 서로 구역장들이 싸우니까 이런 사람들 보기 싫어서 새로 나온 사람이 교회 안나간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한계나 제대로 하지, 왜 남의 한계를 침범하려고 합니까?

한 사람을 전도해서 데려왔으면 그 구역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은 내가 3년 전부터 매일 전도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내 구역이다”하며 자기 구역으로 데려 가면 그 사람은 어느 구역에 들어가야 됩니까? 3년 전부터 전도한 사람이 데려가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마지막에 데려온 사람이 데려가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마지막에 데려온 사람에게로 가야 됩니다. 3년이 아니고, 10년을 전도 했어도 그 사람을 교회로 안 데려왔으면 자기 구역으로 데리고 갈 권리가 없습니다. 한계를 넘어가면 안 됩니다.

바울이 남의 한계 안에서 남이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않음

본문 16절에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남의 한계 안에서 남이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 하였는데, 고린도 교회의 도움을 받아 그 지경을 넘어 멀리까지 복음을 전해서 한계를 넓히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예수님만 자랑하라

본문 17-18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랑하려면 예수님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했다고 자기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자기에게 있는 것은 죄 뿐인 줄 알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가 무엇을 잘해서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자랑 하려면 그저 주님만 자랑해야 됩니다.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내가 나아진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또 오늘날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은 “막은 것” 밖에 없습니다. 즉 주님은 열 가지를 하시려고 하셨는데, 내가 막아서 여덟 가지만 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을 회개하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은 주님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입니다. 즉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주께서 칭찬해 주셔야 합니다. 자기가 칭찬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잘했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또 자기 생각이 제일이라고 하며 남을 비방하고 비판하면 안 됩니다. 그저 자기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부족한 자인 줄 알고, 주께서 칭찬하면 되는 것이고, 주께서 칭찬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자인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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