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교훈을 좇지 말고 이겨라
요한계시록 2:12-17
요한계시록 2:12-17
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 신앙을 끝까지 지킨 버가모 교회
본문 12~13 절에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나타났는데 이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좌우에 날선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말씀으로 갈라놓으시고 말씀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버가모는 마귀의 권세가 강한 지방입니다. ‘사단의 위’라고 했는데, 버가모 지방은 노동조합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만약 노동조합에 들지 않고 지세를 내지 아니하면 거기서 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한 통제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신앙에 자유가 없는 지방이었습니다. 또 버가모 지방에는 그 지방 전체가 다 뱀 우상을 합해서 섬겼던 곳이었습니다. 거기 살면서 뱀 우상 섬기는 데 같이 참여하지 않으면 그 지방에서 사는 것 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무서운 지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믿음 지키려면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단의 세력이 꽉 들어 차 있었던 지방, 사단의 왕좌가 강한 그런 지방이었습니다. 사단의 위가 있는 데서 산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믿음 지키면 핍박당하고 숙청당하고 내어쫓김 당하고 잡아 처형당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는 것을 예수님이 친히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13절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 감독으로 있으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사단에게 굴복하지 아니하다가 순교 당한 것입니다. 그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진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감독(목사)이 믿음 지키다가 순교 당했지만, 그래도 그 교인 전체는 그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신앙을 잘 지켰습니다. 결사 각오하고 순교 당할 각오를 하고, “목사가 순교 당했으니까 우리도 순교 당하자” 하는 결심을 가지고 믿음을 잘 지킨 교인들이었습니다.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 감독으로 있으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사단에게 굴복하지 아니하다가 순교 당한 것입니다. 그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진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감독(목사)이 믿음 지키다가 순교 당했지만, 그래도 그 교인 전체는 그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신앙을 잘 지켰습니다. 결사 각오하고 순교 당할 각오를 하고, “목사가 순교 당했으니까 우리도 순교 당하자” 하는 결심을 가지고 믿음을 잘 지킨 교인들이었습니다.
2. 두어 가지 책망할 것
발람의 교훈을 지킨 것을 책망하심
본문 14절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버가모 교회에도 예수님께서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첫째로 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발람은 하나님의 선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꾀를 알려주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발람의 꾀를 쫓아가면 다 망한다고 했습니다.
발락은 누구였습니까? 모압 나라 왕 발락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자기 나라로 통과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를 이길 힘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망하게 하려고 하는 꾀를 처음에 베풀었습니다. 발락이 자신의 사자들을 이스라엘 선지자 발람에게 보냈는데 발람이 그들에게 말하길 “하나님께 기도해보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발람이 그날 밤에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는 곳에 가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은 기도 안 해보고도 다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선지자인 발람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해달라고 요청하는 발락에게 가야 할 지 말지를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발람이 기도해 보기 전에도, 안 가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데 가면 되겠습니까? 그날 밤에 발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또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모압의 사자들에게 자신은 못 간다고 말하니까, 모압 나라 사자들이 다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가서 왕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 말에 모압 왕 발락은 ‘전에 보다 선물을 더 많이 보내야 되겠다. 전에 보낸 선물이 적기 때문에 아마 안 오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선물을 더 많은 짐승에 실어서 사자들을 전보다 더 많이 보냈습니다. 쉽게 말해 전에 사자 5 명을 보냈다면 이번에는 10 명을, 전에는 뇌물 1억 2천을 보냈다면 이번에는 2억 2천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모압 나라 왕이 발람 선지자에게 이렇게 많은 뇌물을 보내면서 자기의 나라에 와 달라고 하니, 발람이 다시 기도해 보고 간다고 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발람은 기도해 보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모압 왕이 와서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하는 곳에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발람은 기도해 보고 간다고 했습니다. 벌써 많은 뇌물을 받고 그곳에 갈 마음이 생겨가지고 그날 밤에 하나님께 “갈까요? 가지 말까요?” 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제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갈까요? 가지 말까요?” 하는 기도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 가야 될 것은 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 저주해 달라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발람은 탐심이 나서 갈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탐심으로 “갈까요? 가지 말까요?”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가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마음은 벌써 다 거기에 가 있는데 껍데기만 잡아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서 이마가 깨져야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가다가 나귀에게 책망을 받기도 하고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모압 나라로 갔습니다. 발람에게 모압 나라 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저기 광야에 진 치고 있는데 그들을 저주해 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제단을 쌓고 기도하는데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이 도리어 축복하는 말로 다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모압 나라 왕이 발람 보고 ‘당신을 청한 목적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초청을 했는데 이스라엘을 축복만 하니까 이 어찌된 일이냐’ 하며 대단히 노했습니다. 그래서 발람이 거기서 꾀를 하나 베풀어주었습니다. 무슨 꾀를 베풀어 주었느냐 하면 ‘난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라고 저주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망하는 법이 하나 있다. 방법이 하
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모압 나라 왕이 ‘그 방법 좀 가르쳐 달라. 방법이 무엇이냐?’ 하니까 발람이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 섬기면 망하고, 또 행음하면 망한다. 그 두 가지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망한다. 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 할 수는 없다’ 하니까 무사히 보내주었습니다.
발람의 꾀 -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
발람은 돌아왔는데 모압 나라 왕이 이스라엘 백성 망하는 방법을 발람에게 배웠으니까 배운 대로 발람의 꾀를 베풀었습니다. 어떻게 베풀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오는 길목에다가 우상을 많이 만들어놓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기를 먹다가 못 먹은 지가 오랬는데 고기를 갖다가 솥을 걸고, 우상 앞에서 삶고, 전국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을 불러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이 우상 앞에서 그 우상 섬기면서 기다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게 되면 하나씩 꾀어가지고, 우상에게 절하게 만들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만들고 행음하게 만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 놨습니다. 그래서 그 모압 나라의 여자들을 많이 모아다가, 옷도 다 노출되는 옷을 입히고, 우상을 다 만들어 놓고, 우상 앞에 솥을 걸고, 고기를 삶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리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다 이기고 지나갔어야 되는데, 그만 그 고기 냄새를 맡고, 이전에 고기 먹던 생각이 나서 고기 좀 먹으려 했습니다. 그때 마침 그 여자들이 나와서 이것 좀 먹고 가라고 거저 줍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 가서 고기 다 먹고 여자들하고 같이 놀아나서 그 우상에게 절하고 행음하다가 모두 2만 4천명이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상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섬기고, 음행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모압 나라 여자들과 음행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 많이 망했습니다. 많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발람의 꾀입니다. 여기 보면 발람의 꾀라는 것은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듯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행음하게 만든 것이 발람의 꾀란 말입니다. 발람의 꾀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말해 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도 교인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그런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쫓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종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또 행음해도 괜찮다 하면서 자기도 행음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행음하도록 하는 이런 교역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발람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 먹어도 괜찮다. 행음해도 괜찮다”라고 가르치는 교역자가 바로 발람입니다. 노골적으로 행음하라는 광고는 못 하지만 자기 몰래 다니면서 행음하고 또 교인이 행음하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는 자, 그가 발람인 것입니다. 발람의 꾀를 쫓는 자다 하고 책망을 했는데 오늘날에도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을 괜찮다고 가르치는 교회와 목사, 행음하는 일에 대해서 이것을 철저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나가는 교회, 이런 자들이 다 발람입니다.
여기에 대한 신령한 뜻으로, 행음한다는 것은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과 벗된 것이 간음하는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벗되는 것, 세상과 짝하는 것, 세상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 교회가 세상 따라 가는 것, 그것이 간음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세속화되는 것, 그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목사가 세속주의 따라 세속화시키고 교회를 세상과 짝하게 만들고, 교회 안에 세상 노래가 들어오고 세상 곡조가 들어오게 하는 것 이것이 다 간음하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다 세상곡조입니다. 워십댄스라는 것이 있다는데 워십댄스라는 건 춤추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이랍니다. 그것을 강습시키는 데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 가면 춤을 추면서 하나님께 말하지 않고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또 거기서 춤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그것을 배워다가 강단에 다 올라가서 춤 추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다 발람의 교훈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그런 춤추는 것을 교회에 받아들이면 그 목사를 치리합니다. 가만히 안 둬둡니다. 어디라고 강단에 올라와서 춤을 춥니까?
워십댄스, 그 춤추는 거 배워주는 곳이 어떤지 보려고, 어떤 목사님이 한번 그곳에 가봤다고 합니다. 가 보니까 와서 같이 춤추자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난 목사입니다’ 라고 하니까 한 여자가 ‘난 찬양대 대장이에요’ 하더랍니다. 목사 보고 좋다고 오라 그러면서 같이 추자고 그러더랍니다. 찬양대 대장도 와서 남녀가 합해가지고 춤추다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람의 교훈 지키는 것입니다. 행음하고 또 우상의 제물을 먹고 하는 그것이 발람의 교훈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무엇입니까? 우상 섬기는 데 제사 상에 놨던 것을 먹는 것이 우상의 제물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한 신령한 뜻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가서 취한 것, 이(利)를 본 것, 그것이 다 우상의 제물입니다. 하나님 뜻을 어기고 따라 갔으니까 그것이 우상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무엇을 얻었으니까 제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또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한 것이 전부 우상의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집을 하나 취했으면 집이 우상의 제물이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직장을 가졌으면 그 직장이 우상의 제물이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결혼을 했으면 가정이 우상의 제물이고, 하나님 뜻을 떠나 이익을 본 모든 것이 다 우상의 제물입니다. 집에다 실어놓은 것, 옷장, 냉장고, TV 등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해다 놓은 것이 우상의 제물인 것입니다. 하나님 뜻을 어기고 또 성경말씀 어기고 취한 것, 또 성경 본문에 없어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해다 놓은 것이 우상의 제물입니다. 신앙양심을 양보하
고 얻어다 놓은 모든 것이 다 우상의 제물입니다. 우상의 제물 먹게 하는 것, 이것이 발람의 교훈입니다. 우상의 제물 먹는 것, 행음하는 것, 즉 교회가 세상과 벗되는 것,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해다 놓은 것들, 이것이 발람의 교훈을 쫓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발람의 교훈과 싸워야 됩니다. 이 발람과 싸워야지 발람을 용납하면 버가모 교회와 같이 됩니다. 또 우리가 안 싸우면 하나님께서 싸우신다 그랬습니다.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킨 것을 책망하심
본문 15절에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당도 이와 같이 한 것을 보니까 발람과 같은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같은 것입니다. 발람하고 니골라하고는 다른 사람이지만 교훈의 내용은 같습니다. 발람이 하던 것과 니골라당이 하는 것이 같습니다. 우상의 제물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말씀으로 너를 심판하리라”
니골라당의 교훈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같은 것입니다. 발람하고 니골라하고는 다른 사람이지만 교훈의 내용은 같습니다. 발람이 하던 것과 니골라당이 하는 것이 같습니다. 우상의 제물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말씀으로 너를 심판하리라”
3. 발람의 교훈과 싸우라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속히 우리에게 임하셔서 그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고 싸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도 발람하고 싸워야 됩니다.
발람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상의 제물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 실제로 우상의 제물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의 신령한 뜻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한 것이 다 우상의 제물이란 것입니다. 또 세상과 벗되는 것이 행음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있습니다. 성경본문에 확실히 나타나지 않았어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한 것은 우상의 제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 신구약 성경에 비추어 봐도 그렇고, 신앙양심을 봐도 그렇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 그것을 취하는 것이 우상의 제물 먹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이 우상의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집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욕심으로 취하면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 됩니다. 직장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발람의 교훈하고 싸워야 됩니다. 이제 말세에 가서는 발람의 교훈 여기에 넘어가는 교회가 많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것 세 가지
본몬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발람의 이름으로 나왔다가 탄로가 되면 니골라당의 이름으로 나왔다가 또 다른 이름으로 나오고 발람이 나오나 니골라당이 나오나 또 다른 것이 나오나 내내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상의 제물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에 나왔던 이단이나 지금 나오는 자나 내용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전에 나왔던 타락된 교역자나 그 다음 시대에 나오는 교역자나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 먹지 않아야 되고 행음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이긴다는 것은 우상의 제물 안 먹고, 암만 좋은 것을 준다고 안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취하는 것은 다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에게 암만 유익과 소득이 많다고 해도, 안 먹고 안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행음하는 것은 세상과 짝하는 것인데 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짝하면 되겠습니까? 세상과 벗된 자는 간음하는 여자라 그랬는데 세상과 벗되면 되겠습니까? 세상과 벗하지 말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였는데, 이기는 자에게 뭘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 기록한 것을 이기는 자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줍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고 그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전부 이기라는 것입니다.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겨라. 이겨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는 무엇을 이기라고 그랬습니까? 발람의 교훈을 이기라. 또 니골라당의 교훈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싸워 이겨야 됩니다.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성
경을 어기고 따라가서 유익을 보게 하는 이런 것들이 다 발람의 교훈입니다.
어떤 교회는 아침 7시에 1부 예배를 본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10시에 봅니다. 7시에 보는 것은 왜 7시에 보느냐 하니까, ‘직장에 나갈 사람들 와서 참여하고 연보하고 가면 된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일날 직장에 나가되 된다는 허가 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일날 직장에 나가도 된다. 주일날 놀러 가도 된다. 놀러 갈 사람은 오전 7시에 참여했다가 가면 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은 주일날 안 지켜도 된다는 허가를 내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야 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심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양식인데, 이것은 성경에 감추어 있는 신령한 양식을 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성경에는 신령한 양식이 많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였는데, 성경 속에 많은 진리가 감추어 있습니다. 새 것과 옛 것, 즉 신령한 양식이 많이 감추어져 있는데 그것을 이기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자가 진리를 깨닫게 되어있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는 사람은 성경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껍데기만 슬슬 핥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을 이기고 이세벨을 이기는 사람에게 그 성경 속에 감추어 있는 신령한 양식, 영이 먹고 자라날 만한 생명의 양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흰 돌을 주심
“이기는 사람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라고 하였는데, 흰 돌은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에 예수님이 돌이라고 하셨습니다. 흰 돌을 준다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준다.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해준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해준다. 이기는 자에게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주고 닮아가게 만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말입니다.
새 이름을 주심
새 이름이라는 것은 새로운 인격입니다. 발람과 이세벨을 이기면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또 새로운 인격이 이루어집니다. 이기는 자는 신령한 감추었던 만나를 먹게 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먹어야 그 생명이 삽니다. 또 흰 돌을 받아야 그 사람 위에 새로운 인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에게 준다고 그랬습니까? 이기는 자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발람을 이기란 말입니다. 타락된 교역자들,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자, 교회 안에 세상 것을 끌어들이는 자, 세상과 짝하게 만드는 자, 이들을 이기지 못하면 감추었던 만나도 없고, 또 흰 돌도 없습니다. 새로운 인격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그저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부터 이겨야 됩니다. 교역자부터 이기면 감추었던 만나를 먹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감추어 있는 진리를 많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인격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발람의 교훈을 쫓지도 말고 발람을 이겨서 이렇게 감추었던 만나를 늘 먹고 흰 돌을 받고 그 돌 위에 새로운 이름이 기록이 되는 이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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