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래가 인본주의를 씀으로 실패함
창세기 16:1-10
창세기 16:1-10
1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년 후이었더라 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 하였더라 7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 아브라함이 인본주의로 하갈을 취함
하나님의 말씀을 인본주의를 써서 이루려고 함
창세기 15:2-4절에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아브람은 “나는 무자하오니 주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되리라”고하셨습니다.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하시면서 뭇별같이 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누구를 후사로 세우려 했습니까? 종 엘리에셀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하였으니 엘리에셀은 후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86세가 되고 사래가 76세가 되었는데도 사래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본문 16:1-2절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못 낳으니까 사래가 ‘이제 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 당시 76세 된 여자가 아이 낳는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76세인 사래는 아들을 날 희망이 없어 보이니까 종인 하갈을 취해서라도 아들을 얻어서 아브람의 후사가 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람의 몸에서 후사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여종 하갈을 첩으로 취한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에 맞게 인본주의를 쓴 것입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했으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인본주의적인 방법을 쓴 것입니다. 요새도 이런 인본주의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는 정신은 좋으나 그 방법이 인본주의입니다. 즉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인데 방편은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목적도 방법도 다 성경에 맞아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됩니다.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안 맞으면 그것은 인본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맞는 목적과 방법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은 공산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투쟁을 하고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해방신학자들도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부흥 시키는 목적을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씁니다. 그것은 하갈을 취해서라도 아들을 낳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인본주의 방법을 써서라도 교회가 부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후사를 어떻게하든지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등과 같이 사람들은 ‘후사’를 얻는 데에만 목적을 둡니다.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어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인본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라고만 했지, 사래에게서 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라”고 하셨는데 사래는 낳을 희망이 없고 또 하나님께서 6사래에게서 낳아야 한다는 말씀을 아직 안 하셨습니다. 사래가 “내 나이가 76세나 됐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당신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했으니 하갈을 취하라”고 자꾸만 졸라댔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생각해보니까 참 그럴 것 같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된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사래에게 아들을 안 주셨으니 아무래도 하갈을 통해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갈을 취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방법이 잘못됐습니다. 원리 원칙에 어긋났습니다. 아무리 사래가 경수가 말라서 아들을 낳을 희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원리 원칙에 어긋난 방법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실 리가 없습니다. 원리 원칙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원리 원칙대로 얻은 아내는 사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원리 원칙대로 뜻을 이루어 나가시고 의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목적도 진리에 맞아야 되고 방편도 진리에 맞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이 곧 인본주의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이루겠다는 좋은 목적을 가지면서, 인본주의 방법을 쓰면 안 됩니다. 요새 교회 부흥시키겠다고 하면서 인본주의를 많이 씁니다. 하갈을 많이 취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부흥은 좋으나 방편이 전부 다 인본주의입니다. 원리 원칙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갈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이스마엘입니다. 인본주의로 얻은 교인이 무엇입니까? 이스마엘 교인들입니다. 또 이스마엘과 같은 집사와 장로도 많습니다. 그 이스마엘 때문에 교회에서 사고 많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스마엘 때문에 사고가 났습니다. 이스마엘이 누구를 희롱했습니까? 이삭을 희롱 했습니다. 하갈을 취해서 자녀를 낳은 것까지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앞으로 이삭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본주의를 써서 교인 만들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본주의로 교인을 만들어서 집사와 장로를 세워 놓으면, 얼마 지나면 그 장로와 집사한테 쫓겨나게 되고, 그들로 인해 교회 망치게 됩니다. 교인 많은 것만 큰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세우는 것이 큰 것입니다. 진리를 세우는 것이 큰 것이고 교인을 얻는 것이 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몇 백 명, 몇 천 명, 몇 만 명 모아 놓아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스마엘 교인들만 많다면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싸우고 다투는데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몇 명이라도 이삭과 같은 신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고요하게 진리를 세워나가며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교회가 됩니다. 사람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로 세우는 교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참 교인들 보다 이스마엘 교인 많아지면 이스마엘 종교가 됩니다. 이스마엘이 많은 교회가 되면 안됩니다.
2. 사래가 하갈의 멸시를 받음
하갈이 교만함으로 사래를 멸시함
본문 4절에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이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했습니다. 자신이 잉태한 것을 알고 교만해져서 주인 위에 올라서려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갈이 교만해진 것처럼 무엇이라도 하나 생기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아이 하나 생겼다 해서 교만해졌단 말입니다. 낳기도 전에 교만해 졌습니다.
교만은 실력을 배경으로 해서 나오는데 뭐 하나 있으면 교만입니다. 아이를 잉태해도 교만, 지식이 생겨도 교만, 명예가 생겨도 교만, 무엇하나 다른 사람보다 나으면 교만해집니다. 독창을 한번 잘했어도 교만해지고 하여튼 무엇이라도 조금 잘하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인이 좀 많아져도 교만해집니다. 개척교회 할 때에는 겸손하고 교회 작을 땐 겸손하다가 교회가 좀 커지면 교만해진단 말입니다. 머리가 조그만 했을 때는 잘 순종하다가 머리가 조금 커지면 교만해져서 자기 윗사람보다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그 다음엔 윗사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사람이 된 사람은 지위가 높아갈수록 겸손해지고, 일이 잘 될 때에 더욱 더 두려워하고 겸손해집니다. 일이 잘 될 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잘 될수록 낮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줄로 믿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라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겸손해야 됩니다. 나는 죄인일 뿐 임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잘 될 때에 교만하지 않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래가 인본주의를 씀으로 멸시받음
본문 5절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하갈이 교만해서 자신을 멸시함을 불만하고 호소했습니다. 누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었습니까? 아들을 얻겠다고 하갈을 준 결과 사래가 하갈에게 멸시를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당하고 누구한테 화풀이합니까? 남편에게 화풀이 하는 것입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고 하며 화풀이한다는 말입니다. 이러니 아브라함의 집안이 편안합니까? 편안치 않습니다. 여종은 여주인을 멸시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들이대고, 지금 이렇게 집안이 편안치 않습니다. 종이 주인을 멸시하니까 집안이 편안치 않게 되어 있고, 또 아내는 남편에게 따지니까 집안이 편안치 않게되었습니다.
왜 집안이 편안치 않습니까? 본래부터 편안치 않았던 집안이었습니까? 인본주의를 썼기 때문에 편안치 않습니다. 원리 원칙에서 어긋났기 때문에 편안치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다는 목적은 좋으나, 방법은 인본주의를 썼기 때문에 편안치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집안이 편안치 않으면 “내가 원리 원칙에서 어긋난 것이 없는가?” 하고 생각해 봐야 됩니다. 누구나 다 원리 원칙에서 어긋난 것이 있습니다. 어디서 내가 원리 원칙에서 어긋났는가를 생각하여 그걸 찾아서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십니다. 또한 사래가 멸시를 당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하갈을 남편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썼으므로 멸시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무엇 때문에 인본주의 썼습니까? 여종이 언제나 여종대로 있을 줄 알고 아브람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종이 언제나 여종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종을 남편에게 줘 놓으면, 자기 위에 올라갈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여종으로 있을 줄 알고 있다가 당한 것입니다.
여종이 변합니다. 원리 원칙에서 어긋날 때에는 다 변합니다. 양이 이리와 염소 새끼로 변하고 또 다른 것으로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이 편안치 않습니다. 또 교회가 편안합니까? 원리 원칙에서 어긋난 이스마엘 교회가 편안하지 않습니다. 원리 원칙에 어긋나게 하여서 교회를 부흥 시키면 그 교회가 편안치 않습니다. 그것은 원리 원칙을 떠나서, 원리 원칙에 어긋나게 모든 일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편안치 않다는 것입니다. 원리 원칙에 어긋나서 일을 하면 교회도 편안치 아니하고 가정도 편안치 아니하고 자기 마음도 편안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쓰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본주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진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해 주기 때문에 벌써 이긴 것입니다. 져도 이긴 것이고 인본주의 써 놓으면 마음이 편안치 아니하고 양심이 편안치 아니합니다. 인본주의를 쓰면 져도 진 것이고 이겨도 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본주의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인본주의 써서 교회를 부흥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이스마엘 교인이 많아져서 교회가 편안치 않게 됩니다.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서로 분쟁하여, 교역자에게 그 화가 다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3. 사래가 하갈을 책망함으로 하갈이 광야로 도망함
그러면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뭐라고 대답합니까? 본문 6절에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바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한 것 입니다. 아브람이 이때에 어떤 잘못을 할 우려가 있겠습니까? 하갈을 두둔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아브람이 86세에 하갈이 처음 잉태했고, 하나님이 “네 몸에서 날 자가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자기 후사로 삼아야 되겠기에, 아브라함이 하갈을 까딱하면 두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원리 원칙에 서 있었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하며 아브라함이 원리 원칙에 섰습니다. 이것이 원리 원칙에 힘 있게 서는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종을 사래가 학대했고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여기서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 것은 악으로 학대한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여종이 잉태했다고 교만해서 자기를 멸시하니까 학대한 것입니다.
사래가 주인의 위치에 굳게 선 것은 잘한 것입니다. 아마 책망을 한것 같습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왜 그러느냐”고 책망을 한 모양 같습니다. “너는 종인데 어째서 내 위에 올라가려고 하느냐. 네 자리로 내려가라”고 하면서 종의 자리에 세우려고 아마 책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학대같이 된 것입니다. 하갈의 입장에서는 볼 때에는 학대입니다. 자기가 주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래가 눌러놨단 말입니다. 눌러 놓으니까 억울해서 하갈은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이 교만하면 제 자리에 세워 놓아서 언제나 하나님이 준 위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원리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준 위치를 빼앗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준 위치가 있고 질서가 있지 않습니까? 그 위치를 빼앗기면 안 됩니다. 호주는 호주의 위치에 있습니다. 호주의 위치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랫사람이 교만해도 호주에게는 호주의 위치가 있습니다. 그 위치를 언제나 유지해나가는 것이 원리 원칙입니다.
어떤 집은 여자가 호주가 된 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집안이 거꾸로 된 것입니다. 아무리 여자가 호주가 되려고 해도 남편이 호주 노릇을 해야 됩니다.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호주가 호주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됩니다. 자기 위치를 지켜야 됩니다. “바가지 긁어서 구멍이 뚫려도 괜찮다” 하는 정신을 가지고, “바가지 깨뜨리려면 깨뜨려라”하며 언제나 담대히 나가면 됩니다. 사래가 담대히 자기 위치 지키지 않았습니까? 담대히 자기 위치를 지키니까 여종이 다음에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랫 사람은 복종시키고, 질서를 바로 잡아 나가야 그 집안이 바로 되고 교회도 바로 되고 모든 것이 바로 됩니다.
학대를 했다는 것은 사래가 자기 위치를 지켰단 말입니다. 종에게 종의 위치를 다시 내려 세워놨습니다. 아이 가졌으면 가졌지 네 까짓 것이 무엇이냐 내려가라 이렇게 하니까 하갈이 어떻게 됐습니까?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는 것이 보통 방법이란 말입니다. 도망친다고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도망친다고 해서 무서워하면 마귀에게 잡힙니다. 마귀 역사인데 도망치게 나둬야 합니다.
4. 하나님이 하갈을 불쌍히 여기심
본문 7-10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 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하갈에게 보냈습니다. 하갈은 도망쳐서 광야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처럼 도망친 사람은 광야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한 보금자리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망을 안가야 행복한 자리에서 늘 삽니다. 도망친 사람은 광야 생활하는 것입니다. 광야 샘 곁에 가서 샘물 좀 먹으려고 합니다. 광야생활은 쓸쓸하고 고독합니다. 행복한 보금자리를 떠났으니 행복하지 않습니다. 윗사람을 섬기지 아니하고 교만하다가 다스리려고 할 때 도망친 교역자들도 많습니다. 교역자들도 조금 잘되면 교만해져서 제가 제일인 줄 알다가, 자기 의견 안 들어주고 좀 다스리려고 하면 도망칩니다. ‘총회에서 탈퇴한다. 딴 데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망쳐 봐야 광야 생활입니다. 행복스러운 그 보금자리에서 떠나서, 광야 샘물 곁에 앉아 있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본문 8-9절에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돌아가서 복종하라” 즉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망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돌아가서 학대를 받아도 가서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사래가 학대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한 일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갈은 사래가 학대했기 때문에 억울해서 도망쳤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네가 주인인 사래에게 한 것을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책임을 사래에게만 전가시키지 말고, 하갈이 사래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태도가 이스마엘을 잉태하기 전과 같았는지를 생각해 보았어야 합니다. 잉태했다고 여주인을 멸시했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종하라고 돌려보내십니다. 돌려보낼 때 돌아가서 복종만 하면 “아이가 큰 아이가 되고 들나귀 새끼같이 강해진다”고 약속하십니다. 들나귀가 얼마나 강합니까? 네가 낳은 아이가 건장하고 강한 자가 될 것이고 그 모든 형제가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갈이 돌아가서 윗사람에게 복종하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은 질서를 복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고 그 질서를 유지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창성케 해주시고 앞으로 잘되게 해주십니다. 그 질서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하겠다고 참지 못하고 나가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참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역자들도 참아야 합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참지 못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하갈에게 주인에게 돌아가서 복종을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서 복종을 해라. “네가 윗사람에게 원리 원칙대로 복종하면 네가 잘 된다.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고 잘 되는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복종하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복종 안 하면 잘 될 것 같아도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복종해야 사는 길입니다. 잘 되는 길은 언제나 같습니다. 어디나 다 같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질서를 잘 지키는 것, 다시 말하면 가정에서도 호주와 부인의 질서, 교회도 질서 아래서 서로 복종하면서 윗사람을 잘 모시면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은 질서를 복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고 그 질서를 유지하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창성케 해주시고 앞으로 잘되게 해주십니다. 그 질서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하겠다고 참지 못하고 나가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참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역자들도 참아야 합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참지 못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하갈에게 주인에게 돌아가서 복종을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서 복종을 해라. “네가 윗사람에게 원리 원칙대로 복종하면 네가 잘 된다. 그것이 네가 사는 길이고 잘 되는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복종하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복종 안 하면 잘 될 것 같아도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복종해야 사는 길입니다. 잘 되는 길은 언제나 같습니다. 어디나 다 같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질서를 잘 지키는 것, 다시 말하면 가정에서도 호주와 부인의 질서, 교회도 질서 아래서 서로 복종하면서 윗사람을 잘 모시면 잘 되는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