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돌아와 에서와 화목함
창세기 33:1-17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4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5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6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
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2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창세기 33:1-17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4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5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6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
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2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 에서가 야곱을 환영함
야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응답 받음
본문 1-2절에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천사가 환도뼈를 쳐서 위골된 뒤에야 회개하고 바로 섰습니다. 환도뼈를 맞기 전까지는 살려달라는 기도만 했습니다. 창세기 32장 11절에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형이 와서 자기를 칠까 겁이 나서 밤새도록 살려달라고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고 결사적으로 달라붙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나야 그만 둔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전에 어떤 유명한 분의 설교에서도 이 말씀을 ‘우리가 기도할 때 일단 목표를 정했으면 어떻게든 하나님께
따내도록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결사적으로 매달리라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목표를 걸어놓고 기도를 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 허락받기까지는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곧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결사적으로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온다는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기도했으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그만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매달리고, 금식하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따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르친 것입니까? 현대 교회들이 이 구절에 대해 보통은 다 그런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잘못 되었는데도, 무조건 하나님 앞에 관철하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운 사람은 신앙이 잘못됩니다. 교인들에게 다 그렇게 가르쳐 놓고, 신학생들에게도 다 그렇게 가르쳐놓기 때문에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바른 것을 배우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을 자꾸 걸어 나가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라도 바로 아는 것이 우리 신앙에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응답해 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섰기 때문에 응답해주신 것이지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들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가 바로 섰습니까? 환도뼈를 맞고서야 바로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까? 그 사람은 환도
뼈를 쳐야만 회개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대로 해달라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보통 뼈가 아닌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대들보가 부러져야만 회개하고 바로 서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뼈를 치시니까 야곱이 이제는 회개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항복을 하고, 이제는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내놓았습니다. 과거의 죄도 회개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애쓰던 것, 자기가 계획하던 것, 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을 다 내놓고 이제는 주님 한 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리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갈 때에, “너는 이스라엘이라” 하는 명칭을 주신 것입니다.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돋을 때에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브니엘을 떠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33장에서 다시 수난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떤 야곱
승리했으니까 이제는 담대한 즐거움으로 에서를 향해서 나가야 되겠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았을 때에는 승리했는데, 막상 눈을 딱 떠보니까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저기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까맣게 많은 한 부대가 오는 것을 보고 ‘저들이 와서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육신의 생각이 쏙 들어왔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눈이 멀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각자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다 맡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종과 그 여종이 낳은 자식들을 맨 앞에 세우고, 그 뒤에는 레아와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그리고 맨 뒤에는 라헬과 요셉을 세워두었습니다. ‘에서가 와서 치면 여종부터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레아인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은 아끼는 사람이니 안 죽어야 되겠다는 것이 잘한 것입니까? 엊저녁에 기도는 왜 했습니까? 기도해놓고는 또 물러섰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승리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주셨는데, 왜 또 돌아가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긴 했지만, 이름만 이스라엘이지 여전히 이스라엘이 되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또 나왔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다 된 것 같지만, 실제로 현장에 나가면 또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가는 길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시
지 않았습니까? 또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승리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주시지 않았습니까? 가라고 해서 가는 길이고,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는 길이며, 또 하나님의 군대로 보호해주시는 것도 보여주셨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얻게 하셨는데, 왜 또 인본주의를 쓰냐는 것입니다. 에서가 와서 칠까봐 그런 것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가 와서 치면 종부터 죽으라고 한 것이 말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야곱이 지금 이렇게 해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가나안까지 무사히 인도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천사를 보내서 보호해주시고 계신데 야곱만 믿음을 안 쓴 것입니다. 야곱만 자기의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또 틀렸습니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힐 필요가 또 무엇입니까? 야곱의 본바탕이 또 나왔습니다. 에서를 만나게 되면 그저 반갑고 참 고마워서 나가서 인사하고 손잡고 입 맞추면 좋았겠는데, 일곱 번 몸을 굽힌 자체가 옛날 버릇이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되겠는데 아직도 버리지 않아 도리어 마이너스가 된 것입니다. 에서가 무던해서 그렇지 알만한 사람 같으면 봐주려고 오다가도 ‘요거 옛날 본성을 아직도 못 버렸구나’ 하고서 단박에 알았을 것입니다. 무엇하러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신에 대한 경배인데, 이것은 지나친 것이자 간교한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자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 주신 것을 다 내버리고, 또 다시 인간의 수단으로 해보려고 돌아간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마음이 무던합니다. “달려와서 목을 안고 어긋맞기고 입 맞추고 피차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마음이 좋습니까? 옛날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
는 친절하게 동생을 맞아서,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은 것처럼 이렇게 즐거워하고 맞아들였습니다. 이런 것 을 보면 에서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야곱보다 인격적으로 나은 것 같습니다. 또 에서가 처음에 400인을 데리고 올 때에는 야곱을 해하려는 심정이었다가도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5-7절에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
불어 나아와 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 나와서 절했습니다.
2.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드림
야곱이 에서를 만나 그에게 절함
본문 8절에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앞서 보낸 그 모든 떼가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종들이 미리 말했을 것입니다. 에서가 다시 물어보자 야곱도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고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 그에게 절함
본문 8절에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앞서 보낸 그 모든 떼가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종들이 미리 말했을 것입니다. 에서가 다시 물어보자 야곱도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고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9-10절에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참 좋은 뜻으로 동생의 선물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며 하나님을 갖다 붙였습니다. 이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형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갖다놓은 것은 야곱이 지나친 아부를 한것입니다. 또 절한 것은 좋지만 일곱 번까지 땅에 엎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본주의를 쓴 것인데, 에서가 거기에 감동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임
에서가 처음에 사백 인을 거느리고 출발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겠습니까? 야곱을 기쁨으로 영접할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겠습니까? 해석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만 보지 말고 다른 사건들에서 어떻게 했나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출발시키신
원 목적은 야곱을 바로 세우려고 야곱을 징계할 목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마음을 변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반도 그렇지 않습니까? 야곱이 라반 몰래 도망하여 갈 때,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고 쫓아가다가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징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회개하고 바로 설때, 원수가 변하여 도리어 도움을 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여러 말씀에 비추어 보면 에서가 처음에는 야곱을 해하려고 출발했다고 해야 다른 데에 맞을 것 같습니다. 환영하는 마음으로 사백 명을 데리고 떠났다고 하면 기쁜 얼굴이 나타났겠는데, 그 종들이 와서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더라’ 하고 보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얼굴에 조금도 환영하는 기분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야곱을 회개시키려는 몽둥이로 쓰셨습니다. 몽둥이는 때려 부수려고 쓰는 것이지 화목하려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야곱이 씨름하던 날 밤에 환도뼈를 치시자 ‘아이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할 그 때, 에서의 마음이 변화된 것입니다. 에서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야곱이 바로 설 때 하나님께서 돌려놓으시면 싹 변하는 것입니다.
잠언 21:1 절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원리로 볼 때 ‘하나님께서 에서를 몽둥이로 쓰셨다가 야곱이 회개하고 바로 설 때에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셨고, 그래서 기쁨으로 영접하게 되었다’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울도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러 왔다가 축복하고 가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에서에게 강권하여 예물을 줌
본문 11절에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물을 강권해서라도 드리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예물 드려야 될 사람에게는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18장 16절에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선물을 드려야 될 사람에게는 이렇게 강권해서라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드리려고 작정해 놨던 것인데 도로 거두는 것은 인사가 아닙니다.
본문 11절에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물을 강권해서라도 드리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예물 드려야 될 사람에게는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18장 16절에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선물을 드려야 될 사람에게는 이렇게 강권해서라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드리려고 작정해 놨던 것인데 도로 거두는 것은 인사가 아닙니다.
3. 에서의 호의와 야곱의 사양
본문 12-14절에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
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야곱의 앞잡이가 되어 인도해주겠다고 하자 야곱이 자식들이 유약하고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으므로 형님이 먼저 가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데렸다는 것은 새끼를 낳아서 데리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또한 야곱이 말하기를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잘못한 것입니다. 앞서가면 자신이 따라가겠다는 것은 좋은데, 세일로 가서 에서에게 나아가겠다고 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가 있는 세일로 가려는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형님의 마음을 좀 기쁘게 하려고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한 것은 또 수단을 쓰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형님이 이렇게 호의로 대해줬는데도 또 속여먹은 것입니다. 그래도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또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본문 12-14절에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
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야곱의 앞잡이가 되어 인도해주겠다고 하자 야곱이 자식들이 유약하고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으므로 형님이 먼저 가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데렸다는 것은 새끼를 낳아서 데리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또한 야곱이 말하기를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잘못한 것입니다. 앞서가면 자신이 따라가겠다는 것은 좋은데, 세일로 가서 에서에게 나아가겠다고 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가 있는 세일로 가려는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형님의 마음을 좀 기쁘게 하려고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한 것은 또 수단을 쓰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형님이 이렇게 호의로 대해줬는데도 또 속여먹은 것입니다. 그래도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또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본문 15-16절에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자신의 종자 두어 사람을 두어서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완곡히 사양하자 에서는 자신의 본 곳인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4. 야곱이 숙곳과 세겜에 머무름
하나님이 명하신 곳까지 가지 않은 야곱
본문 17절에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가 떠난 다음에 야곱이 무엇을 했습니까? 야곱이 형에게는 먼저 가시면 자신의 나귀들을 천천히 데리고 형님께 나아가겠
다고 해놓고서는 세일로 가지 않고 숙곳에 집짓고 거기다가 이삿짐을 다 풀어놨습니다. 이것도 야곱이 또 잘못한 것입니다. 숙곳은 가나안땅이 아닙니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은 조상의 땅 가나안입니다.
창세기 31장 3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고 하였고, 창세기 32장 9절에는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
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고 하였으며, 창세기 31장 13절에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창세기 26장 23-24절에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조상의 땅으로 가라는 것인데, 야곱은 숙곳에 이삿짐을 풀어놓고 장막을 세우고, 우리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끝까지 안 간 것입니다. 왜 요단강도 건너가지 않고 이삿짐을 거기다 풀어놓았겠습니까? 숙곳은
요단강 근처의 벌판인데, 거기가 양 먹이기에 상당히 좋았던 모양입니다. 목장하기 좋은 곳이니 거기다 장막을 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가다가 끝까지 가지 아니하고 조금 에누리한 것입니다. 근처까지는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서 가다가 너무 힘이 드니까,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머물면서 좀 쉽게 믿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다 가야 되겠지만 너무 힘이 드니까, 또 여기가 들판이 넓고 양 먹이기 좋으니까, ‘여기서 좀 삽시다. 하나님, 사정 좀봐주시오. 하나님께서도 내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어떻게 다 합니까? 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에 정착함
본문 18절에 “33장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후에 숙곳에서 떠나 요단 강을 건너 세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밧단아람에서 평안히 가나안에 도착하여 장막을 친 것입니다. 야곱이 아마 숙곳에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세겜까지는 왔으나 아직도 부친이 계신 곳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34장에서 또 한 번 큰 징계를 받게 됩니다. 잠언 29장 1절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3장 19-20절에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 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세겜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밭을 은 100개를 주고 산 것은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세겜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으며, 야곱이 아직도 부친이 있는 곳에 가려면 좀 더 가야 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겜은 야곱이 정착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곳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는 데, 그 뜻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자기는 이스라엘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이 제단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 것은 알맹이 없는 피상적 명칭입니다. 야곱의 신앙생활은 아직도 의식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34장에서 징계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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