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6일 목요일

아가 1:1-17 처음 사랑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처음 사랑
아가 1:1-17

1솔로몬의 아가라 2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8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9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12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3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4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5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1.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

본문 1절에 “솔로몬의 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아가(雅歌)’는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노래가 일천 다섯이나 되는데(왕상 4:32), 아가서는 그 가운데 일부입니다. 아가서는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한 것으로 왕은 예수님, 술람미 여자는 신령한 성도, 예루살렘 여자는 보통 신자를 가리킵니다.
아가서는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육적으로 이용하면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본문 2절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는 것은 신령한 성도인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서 입 맞춰 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더불어 영적 교통을 하며 교제하기를 원하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멀리서 보고 따라다니지 않고, 좀더 신령한 영적 교통하는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도가 멀리서 따라 다니는 것을 원치 않고 좀더 가까이 나아와서 신령한 영적교통을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달콤하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합니다. (시 104:15).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은 달고 성도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그 사랑에 도취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2장 1-11절에는 예수님께
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생명운동은 변화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기쁘고, 즐겁고, 달고, 도취가 되게 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그 사랑 속에 들어간 성도가 참된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포도주보다 나은 신령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본문 3절에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모든 더러운 냄새가 제거되고, 썩어져 가는 것이 방지되고,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마귀가 벌벌 떨고, 심령 속에서 향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격을 가리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을 떠나지 않는 생활을 하면, 그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향기가 점점 충만하게 됩니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처녀들은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성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도 열 처녀 비유가 있는데, 열 처녀는 믿는 성도,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지극히 큰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란 예수님께서 술람미 여자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 곧 보통 신자는 침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왕을 따라 다니면서 섬길 뿐입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 곧 신령한 성도는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침궁에까지 들어갑니다. 침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신령한 영적교통을 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밀실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동거동락(同居同樂)하는 성도가 술람미 여자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섬깁니다.

신령한 영적인 골방에 들어가는 성도, 예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는 침궁으로 들어가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영적 골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성도는 예루살렘 여자와 같은 육에 속한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침궁에까
지 들어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신령한 자리,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주님과 만나 영적 교통하는 자리에까지 들어가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며 보시고,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는 것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들러리 서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잘 믿는 사람들의 들러리를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
주에서 지남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낫습니다.
또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좋기 때문에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2.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사랑

본문 5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믿는 사람이고, 술람미 여자는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영적으로 예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서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외적으로는 보잘 것이 없으나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영적으로 주님과 교통하며 동행하는 신앙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간증하려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얼굴이 검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름답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얼굴이 검은 것은 일광에 쬐었기 때문입니다(6절). 술람미 여자가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험과 핍박을 받는 동안에 얼굴이 까매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믿음을 지키려고 하면 여러 가지 시험이 많이 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려고 들로 산으로 해매니까 얼굴이 까매졌습니다. 주님을
따라 다니느라고 얼굴이 까매졌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술람미 여자가 외모는 보잘 것 없으나 그 속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하였는데, 게달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 그 족속은 검은염소 털로 만든 장막을 치고 유목 생활을 하였습니다(창 25:13; 사21:17). 그러므로 ‘게달의 장막 같다’는 것은 염소 털같이 검고 너저분하여 아무 모양이나 광채나 볼만한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호화찬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 지키기 위해서 환난 받는 성도의 외모가 게달의 장막과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십니다.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속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이와 반대로 외모를 아름답게 단장하고 호화로이 꾸몄을지라도 믿음을 잘 지키지 못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게달의 장막과 같이 추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모만 꾸미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많이 닮아가고, 신령한 세계까지 들어가서 예수
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술람미 여자와 같이 신령한 영적 골방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영적 교통을 하며 생명의 역사가 있으면 예수님께서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술람미 여자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그 세계에 들어가
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속사람의 생명의 역사를 보시므로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본문 6절에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미의 아들들이 그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기 때문에 그 포도원에 가있는 동안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된 것입니다. ‘일광에 쬐어서’란 세상 풍파에 시달린 것을 가리킵니다. 술람미 여자가 포도원지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 얼굴이 검게 되었습니다.

‘흘겨보지 말 것’이란 업신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미의 아들들’이란 육신의 친척들과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나를 노하여’란 세상사람들은 술람미 여자가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안하고 주님만 따라가고 주의 말씀만 따라가므로 노하였습니다.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육신의 친척들이 술람미 여자를 세상의 이용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술람미 여자를 세상의 이용물로 삼아서 세상 일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술람미 여자가 그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또 세상의 모든 일로 시달
리는 동안에 얼굴이 거무스름해졌고 외모가 보잘것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는 그 가운데서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술람미 여자가 포도원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예수님께 있고 예수님만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는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명령을 잘 지켰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첫째로 하였고 포도원 지키는 것은 둘째, 셋째로 하였습니다. 포도원을 지키면서 생활하는 동안에, 믿음을 지키려니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으로 시달려 얼굴이 거무스름해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므로 속은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성도가 세상 일을 하면서도 믿음을 잘 지켜 속사람을 단장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욥이 많은 시련을 당했는데, 그것이 일광에 쬐어 거무스름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거기서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하며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고 하였는데, 어미의 아들들이 왜 노했습니까? 자기들이 하라는 대로 안 하였기 때문에 노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에 결혼식이나 생일집이나 제삿집에 오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안 갔기 때문입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란 술람미 여자는 믿음을 지키려고 신앙에 위반되는 것은 안하다 보니까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느라고 세상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믿음을 지키는 문제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면, 부모 공경을 제대로 못하고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배와 그물과 부친을 작별하고 따라갔습니다(마 4:18-22). 이것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가다 보면 세상 일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가정에서 자기 할 일을 잘해야 되고, 부모를 잘 공경해야 되고, 자녀를 잘 길러야 되고, 직장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떨어지는 수도 있고, 세상 일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만 잘 따라 갔다면 대성공입니다.

본문 7절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 하는 말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는 “예수님이시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양 떼를 어디서 먹이시는지, 오정은 더운 때니까 쉬는데 어디서 예수님께서 쉬시는지, 곧 예수님의 안식처와 예수님께서 신령한 양 떼를 먹이는 곳을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믿어야 바로 믿고, 어떻게 믿어야 바로 믿고, 어느 곳에 가야만 주님과 같이 안식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떻게 믿어야 주님의 신령한 양이 되는가? 어떻게 믿어야 주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가? 어디에 진리가 있는가? 어디서 주님이 생명 운동을 하시는가?’를 찾아 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아무데나 가서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께서 인도 하시는 곳을 찾아가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생명의 꼴을 먹을 만한 곳에 가서 꼴을 먹어야 생명이 살고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필요한 꼴을 먹이는 곳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필요한 양식을 공급했고,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는 엘리야를 통해서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셨는데, 거기가 안식처입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참된 양식을 먹였고, 왜정 말단에 신사참배 바람이 불었을 때는 주기철 목사와 이기선 목사를 통해서 참된 양식을 먹였습니다. 이북에서 기독교
연맹 바람이 때에 유명한 목사들이 거기에 가입했습니다. 또 해방 후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했습니다. 남북 미소 공동 회담을 할 때에, 기독교가 정당 대표로 들어가려고, 정당을 조직했다가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이 되는 바람
에 그들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었는데, 교회가 정치 운동을 하는 바람에 참된 진리 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정치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정치 운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기선 목사님께 공안들이 당신은 무슨 당에 들었냐고 물었을 때에 “나사렛 예수당”에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당은 무엇을 하는 당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을 믿고 회당(예배당)에서 천당으로 가는 당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갔습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그 시대에 성경을 많이 가르쳤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율법주의이고, 왼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폐법주의입니다. 재건파는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율법주의로 나갔고, 현실 교회는 성경을 떠나서 무슨 짓을 해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왼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말씀대로만 나가야 합니다. 성도는 ‘양 떼를 바로 먹이는 곳이 어디인가? 생명을 살리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가려고 애쓰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왜정 말단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현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 당시에 김현봉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셨고,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진리를 바로 가르쳐 주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 김용기 장로를 여러 해 전에 만났는데 왜정 말단에 아현 교회 김현봉 목사님이 진리를 바로 가르쳐 준다고해서, 아현 교회당에 나갔다고 합니다. 당시 덕소에서 아현 교회까지는 70리나 되었는데, 그곳까지 달려서 갔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양 떼를 바로 먹이는 곳이 어디인가? 생명을 살리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서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생명이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고 하였는데, 부끄러울 때 얼굴을 가리웁니다. 성도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잃어 버렸거나 신령한 꼴을 먹지 못하고 자기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면 예수님 앞에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예수 믿는 사람의 속에서 영적 양식이 되고, 힘이 되고,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기쁘고 즐거움이 충만하고 떳떳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참된 영적 양식의 꼴을 먹지 못하고 생명의 역사가 없으면 동무 양 떼 곁에서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부끄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가 어떻게 떳떳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양 떼 먹이는 곳에 가서 신령한 꼴을 먹지 못하고, 오정에 쉬게 하는 곳에 가서 영적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이런 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써 찾는 것입니다.

3. 앞서 간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랑

본문 8절에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힘써 찾는 술람미 여자와 같은 성도를 어여쁘게 보십니다.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던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며 신령한 꼴을 먹던 참된 신자들의 발자취, 즉 옛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앞서 간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신앙이 귀합니다. 예레미야에서 옛길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6장 16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옛적 길’은 옛날 믿음의 선진들이 바른 진리대로 믿은 길입니다. 시대와 사상과 사람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양 가운데 염소 새끼 노릇하는 양을 잘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염소 새끼를 잘 먹여야 다른 양을 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염소 새끼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내어 쫓으면 다른 염소 새끼가 또 나옵니다. 염소 새끼에게 받히지 않으면서 잘 다스려야 능력 있는 교역자가 되고 양을 잘 먹일 수 있습니다.

본문 9-10절에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의 말입니다.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신랑되시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볼 때에 바로의 병거의 준마와 같이 잘 보신다는 뜻입니다. 잘 먹어서 살이 찌고, 힘이 세고, 아름답게, 아주 좋게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용맹 있게, 귀하게, 힘 있게 봐주십니다.
그리고 ‘땋은 머리털’이 나왔는데,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땋은 머리털은 권세 아래 있는 표입니다. 여자들의 땋은 머리털은 남편들의 권세 아래 있는 표이고,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표입니다. 또 자기의 머리되는 윗사람의 권세 아래 있는 표입니다. 성경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세 아래 있는 생활이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름답고, 교회에서도 교회의 권세 아래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단에서도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셔서 그 아래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자녀는 부모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에 위반되는 것은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부모의 말을 다 순종하는 것이 옳은 것이나, 신앙에 위반되는 것은 순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느라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권세 아래서 잘 복종하는 생활, 윗사람과 법을 잘 받들고 순종하며 나가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모두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님께 순종하면 장수한다고 하였습니다.

‘장수한다’는 것은 가다가 망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성경말씀대로 인도해줄 때에 잘 순종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면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제도 아래서 잘 순종하면 거기서 귀히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제일인줄 알며, 자기 마음대로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권세 아래서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며 순종하고 나가면 모든 것이 잘됩니다. 순종만 하면 잘되는데, 순종을 안 합니다. 조사들은 목사의 권세 아래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들 위에 세워놓으신 당회장 목사를 잘 순종하면 앞 길이 열립니다.
‘구슬’은 순종을 말합니다. 잠언 1장 8-9절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금사슬과 구슬로 순종을 나타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고 예수님 보시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1절에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고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너를 위해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금사슬’은 믿음을 뜻하고, ‘은’은 행동을 가리킵니다. 믿음을 쓰는 것은 금사슬이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은입니다. 금사슬에 은을 박았으니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행함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자라나야 하고, 행함으로 은을 박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해야 합니다.
시험으로 오는 모든 것들을 이겨야 합니다. 또 행하기 힘든 것을 십자가를 지고 행해야 합니다. 하여간 금사슬에 은을 박아 만드는 일, 행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행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하고, 행하지 못한 것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내가 행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아서 잘 행해야 합니다, 권세 아래 있지 못했으면 그것을 행하고, 순종하지 못했으면 그것을 찾아서 순종해야 합니다.

4. 향기와 생명이 있는 사랑

본문 12절에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상에 앉으셨을 때에 나드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12장 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
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것처럼, 마음과 정성, 생명 전체를 다 예수님께 쏟아 부어야 간절한 마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의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 예수님은 내 품 가운데 향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향기의 주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향기를 전하게 됩니다. 그 향기가 다른 사람에게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향기로운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옵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향기가 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향기가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벨화’라는 것은 봉선화와 같은 꽃인데, 키가 아주 커서 열 자쯤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엔게디의 포도원에 포도가 많이 있는데, 사람으로 치면 작은 키 두 명 길이의 큰 고벨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아름답고 뛰어난 분이십니다.

본문 15절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입니다. ‘내 사랑’이라는 것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비둘기 같다’는 것은 순결과 온유, 그리고 영안(靈眼)이 열려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눈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눈이 무엇입니까? 영안이 열린 것, 순결한 상태, 영안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고, 영안이 열린 상태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 16-17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 하는 말입니다. ‘침상은 푸르고’라고 하였는데, 푸르다는 것은 생명 빛을 말합니다. 시편63편 6절에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푸른색은 생명의 빛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은 언제나 생명의 생활입니다. 하여간 침상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침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향목 들보와 잣나무 석가래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백향목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집은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집입니다. 그리고 잣나무는 사시로 청청하여 변함이 없는 나무입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신앙을 가리킵니다. 변함없는 예수님이십니다. 침상은 푸르고, 생명 있는 침상이고, 집은 백향목 들보로 향기가 나는 집입니다. 그리고 잣나무 석가래로 언제나 변함이 없는 생명의 역사가 있는 집입니다.
우리는 변함없는 신앙을 가지고, 그러한 생활을 하며, 변함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것은 칠면조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변할 수 없습니다. 침상에 언제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변함없이 계속하여 향기가 나는 집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는 아름다운 집과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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