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집을 세우라
잠언 24:16-34
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17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23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24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26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27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 28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찌니라 29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 30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32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33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34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24:16-34
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17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23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24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26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27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 28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찌니라 29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 30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32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33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34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1.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남
의인도 혹시 넘어지나 칠전팔기(七顚八起)로 일어서지만, 악인은 한 번 넘어져도 망함
본문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아주 엎드러지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안 넘어가다가도 마지막에 한 번만 넘어가면 아주 넘어가고 맙니다. ‘의인’은 믿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잘 믿고 믿음을 지키며 소망을 든든히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말씀대로 나가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잘 지키는 사람도 가다가 혹시 엎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두 번 엎드러져도 다시 일어서야 하고, 세 번 엎드러졌어도 다시 일어서야 하고, 일곱 번 엎드려졌어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엎드러지지 않고 잘 나가다가도 한 번만 엎드러지면 멸망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왜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겠습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믿고, 또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을 믿으며 소망을 가지고 나가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또 의인은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엎드려졌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붙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엎드러졌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양심에 힘이 있습니다. 영에 힘이 있습니다. 의인은 혹시 실수해서 엎드러졌어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 양심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음, 회개하며 부르짖는 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곤 합니다. 일곱 번 넘어졌어도 여덟 번째에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완전 승리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안 지키고 죄만 짓고 나가는 사람은 잘되어나가더라도 한 번만 넘어가면 그때에 아주 거꾸러지고 맙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도 없고, 의뢰하는 것도 없고, 신앙 양심도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망하고 맙니다. 하여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지혜를 가지고 믿음의 달음박질을 잘해나가는 사람은 칠전팔기의 역사가 나타나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2. 원수가 넘어질 때에 기뻐하지 말라
본문 17-18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원수가 엎드러지고 넘어질 때에 ‘잘 망했다. 시원하게 망했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원수에 대한 진노를 네게로 돌리실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엎드러지고 망할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가 하며 두려워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고 엎드러질 때에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에 대한 진노를 네게 돌이키실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라고 하였는데,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분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행악자가 잘산다고 해서 분을 내면 안 됩니다. ‘저런 것이 뭐가 잘됐나’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등불은 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3. 왕을 공경하고 반역자와 손잡지 말라
본문 21-2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고 하였습니다. 반역자는 급속히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을 경외하며 반역자와 손을 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할 것이므로, 이 두 자의 멸망을 알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4. 재판을 공정히 하고 집을 다스리며 세우라
공정한 재판
본문 23-25절에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백성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고, 악인더러 옳다고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재판할 때에 낯을 봐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낯을 보고 잘못된 것을 옳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악인더러 옳다고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악한 것을 옳다고 하면 하나님께도 저주를 받습니다. ‘오직 그를 견책하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을 옳다고 하지 말고 견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을 얻게 되고 좋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을 견책해야지, 옳다고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공정한 재판
본문 23-25절에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백성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고, 악인더러 옳다고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재판할 때에 낯을 봐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낯을 보고 잘못된 것을 옳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악인더러 옳다고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악한 것을 옳다고 하면 하나님께도 저주를 받습니다. ‘오직 그를 견책하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을 옳다고 하지 말고 견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을 얻게 되고 좋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을 견책해야지, 옳다고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본문 26절에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적당한 말로 대답하는 것은 입맞춤과 같이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밖에서 다스리라’
본문 27절에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다스리고 밭에서 예비하고 집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다스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일을 할 때에 자기 주관과 자기 고집대로, 자기 판단대로만 하지 말고, 밖에서 볼 때에 인정받을 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사람이 본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앞에도 바로 하며 덕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공의(정의)와 진리로 모든 것을 하여야지, 자기만 옳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하여야지, 제가 옳다고 하면 뭐합니까?
본문 27절에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다스리고 밭에서 예비하고 집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다스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일을 할 때에 자기 주관과 자기 고집대로, 자기 판단대로만 하지 말고, 밖에서 볼 때에 인정받을 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사람이 본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앞에도 바로 하며 덕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공의(정의)와 진리로 모든 것을 하여야지, 자기만 옳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옳다고
하여야지, 제가 옳다고 하면 뭐합니까?
자기 혼자 왕이 되었다고 하며, 제일이라고 여기면서 교만하게 돌아가는 자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 혼자 옳다고, 잘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일을 자기에게 비교해서 ‘잘했다. 괜찮다’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괜찮다고 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나 교역자들이 보기에 인정받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틀렸다. 베드로가 옳다. 게바가 옳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밖에서 볼 때에 모든 것이 구비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인정받을 만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만 그럴듯하게 인정을 받으려고 외식하며 꾸미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옳다 인정함을 받을 정도에까지 이르도록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다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사람이 옳다”, 그리고 부모가 보기에도 “그 자식이 옳다”라고 인정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 역시 자식이 보기에 옳다고 인정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나아가 지금 같은 시기의 사람들 뿐 아니라, 장래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옳다고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도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밖에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밖에서 모든 것이 다 구비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다 인정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도록 모든 것을 하라는 말입니다. 즉, 정의와 진리와 공의로 모든 것을 해나가면서 집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밭에서 예비하라’
그리고 ‘밭에서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 밭은 먹을 양식이 나오는 곳인데, 먹을 양식이 나오도록 예비해서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즉, ‘밭에서 예비하라’는 것은 양식 준비를 잘하라는 뜻입니다. 양식 준비를 잘하지 못하면 집을 지어도 먹고 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삽니까? 그러므로 양식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속에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미국의 어떤 교단에서 신 신학과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됐는데, 그 교단에 양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보니까 그 교단이 아무 힘이 없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반대하는 것도 물론 하여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양식, 생명의 양식, 그 양식이 있어야만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양식이 없으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밭에서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양식을 항상 예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영적 양식, 진리의 양식, 생명이 사는 양식,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교회 사업을 잘하고 전도 사업을 잘하고 또 다른 것을 잘해도, 가다가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양식, 즉 진리는 있는데, 밖에서 다스리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저 혼자만 옳다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양식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밖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덕을 세워야 합니다. 덕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함을 받아야 하며, 신령한 양식이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바울에게는 언제나 양식이 풍성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갈 때에 무슨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디로 갈 때에는 반드시 신령한 양식을 가져갔습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눠 주면 그것을 받아먹은 사람들의 심령이 힘을 얻고 새 생명을 얻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어디 갈 때에는 밭에서 준비를 잘했다가 신령한 양식을 가지고 가서 나눠줘야 합니다. 다시 말하는데 바울은 어디 갈 때에 신령한 선물을 가져간다고 하였습니다. 먹으면 다 없어질 토마토 바구니나 과자 봉지, 그런 것들을 사가지고 가지 않고, 신령한 선물을 가져갔
습니다. 우리도 어디에 갈 때에 신령한 선물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가야겠습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에게 하나씩 가지라고 하면, 처음 보는 것이고 아주 좋은 것이므로 받을 것입니다.
습니다. 우리도 어디에 갈 때에 신령한 선물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가야겠습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에게 하나씩 가지라고 하면, 처음 보는 것이고 아주 좋은 것이므로 받을 것입니다.
‘집을 세우라’
밭에서 준비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가 있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나눠주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이 견고합니다.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후에 내 집을 세울찌니라’, 그렇게 세워진 집은 만세 반석 위에 세운 집입니다. 밖에서 잘 다스리고, 밭에서 준비를 잘하여, 양식이 풍족한 가운데 진리의 생명의 터 위에 집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집이 만세 반석 위에 세운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그 집을 흔들지 못합니다. 또 그렇게 집을 세워놓으면 그 집이 점점 더 견고해집니다. 자라나는 것입니다.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밭에서 예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잠언24장 13절에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꿀’과 ‘송이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더 달도록, 신령한 양식으로 그 말씀을 먹고 준비하며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이 견고하게 됩니다. 밖에서 다스렸으니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덕이 있습니다.
옳게 만들어서 의와 공의, 정의 위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 옳은 진리를 가지고 집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양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양식에 머물면서 자기들도 그 양식을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더 달게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는 것입니다. 양식이 풍성한 그런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이 얼마나 좋은 집이 되겠습니까? 그 집은 진리로 세워진 집이고, 만세 반석 위에 세운 집이며, 양식이 풍성한 집니다.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 양식을 먹되,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달게 먹습니다. 감사와 찬송을 하며 삽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집에 들어오면 그 양식을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 하여간 다른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집이 필요합니다. 그런 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집입니다. 우리가 이런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옳게 만들어서 의와 공의, 정의 위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 옳은 진리를 가지고 집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양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양식에 머물면서 자기들도 그 양식을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더 달게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는 것입니다. 양식이 풍성한 그런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집이 얼마나 좋은 집이 되겠습니까? 그 집은 진리로 세워진 집이고, 만세 반석 위에 세운 집이며, 양식이 풍성한 집니다.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 양식을 먹되, 꿀보다 달고 꿀송이보다 달게 먹습니다. 감사와 찬송을 하며 삽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집에 들어오면 그 양식을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 하여간 다른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집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집이 필요합니다. 그런 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집입니다. 우리가 이런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재판은 바로 하고 원수는 사랑하라
본문 28-29절에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찌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을 해도 그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내게 행한 대로 갚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판할 때에는 행한 대로 갚아줍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재판할 때에는 행한 대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싸워서 A가 B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B가 A의 이도 부러뜨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눈을 하나 상하게 했으면, 저 사람 눈도 상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것은 재판할 때 쓰는 법이고, 성경에서는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행한 그대로 행하지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
해주며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재판은 바로 해야 합니다.
5. 게으른 자에게는 빈궁이 강도같이 옴
게으른 자는 비참해짐
본문 30-32절에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증왕(曾往)에, 즉 예전에 게으른 자의 밭,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보니까,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으며 돌담이 다 무너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생각이 깊었고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 게으른 자는 이와 같이 되는구나. 게으른 자는 반드시 망하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 33-34절에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만 아는 것입니다. 잠언 26장 13-14절에도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라고 한 것을 보니까 그래도 마음을 푹 놓고 자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졸자고 하다가 손을 모은 것을 보니 기도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라고 한 것을 보니까 그래도 마음을 푹 놓고 자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졸자고 하다가 손을 모은 것을 보니 기도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앉아서 졸 바에는 누워서 조는 것이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다가 ‘좀 더 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졸다보니 ‘좀 더 누웠다가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좀 더 눕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좀 더 눕다 보니, 잠언 26장 14절에 나온 말씀처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같이 침상에서 구르게’되었습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을 압니까? 문빗장이 있으면 돌쩌귀로 그 문을 닫지 않습니까? 문짝이 돌쩌귀에 붙어서 문빗장이 문 앞으로 떨어지지 못합니다. 그렇게 구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치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처럼, 침상에서 떠나지 못하고 구른다는 것입니다. 여기로 뒤집어졌다, 저기로 뒤집어졌다, 왼쪽으로 뒤집어졌다, 오른쪽으로 뒤집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좀 더 졸자’라고 하면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다가 그 다음에는 ‘좀 더 눕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주 누워가지고 돌쩌귀가 돌아가는 것처럼 돌돌 구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마음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일어나기는 일어났고, 손을 모으고 좀 더 기도하기는 했지만, 결국 졸았습니다. 그리고 좀 더 졸다가 그 다음에 누웠습니다. 누운 다음에는 그 다음부터 구르는 것입니다. 침상에서 돌돌 구르다가 자고 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나가서 일하라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면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라고 하였습니다. 궁핍함이 갑자기 온다는 것입니다. 또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하였는데, 곤핍이 갑자기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빈궁이 오고 곤핍함이 생겨서 장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나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 부지런히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못씁니다. 밖에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저 혼자 잘 믿는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잘 믿는다는 인정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인정하시겠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에는 양식이 예비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양식을 가지고 나눠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게으른 사람은 못 씁니다. 게으른 사람은 썩어진 나무와 같습니다. 썩어진 나무에는 도장을 새길 수 없고, 썩어진 나무로는 책상이나 의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또 썩어진 나무로 문짝이나 집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 데도 못 씁니다. 게으른 자는 썩어진 나무입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눕자’라고 하다가 침상에서 돌돌 구르는 사람은 못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게을러서 되겠는가? 이제는 믿는 일에 정신을 차리고 힘을 써야 되겠다. 내가 좀 더 성경을 많이 봐야 되겠다. 이제는 내가 좀 더 신령한 양식을 얻어먹어야 되겠다. 좀 더 믿는 일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며 힘을 써야 합니다. 게을러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안 하고, 심방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는데, 그런 사람은 집에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집에 가서 침상에서 돌돌 구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셨습니다. 게으른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하라고 하신 것은 해야 합니다. 자기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명령을 다 순종해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일하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나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일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라도 해서 먹고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소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며, 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덕이 되라는 것입니다. 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양식이 있고, 부지런히 자기 할 일을 잘해서 모든 것을 바로 해나가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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