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일 토요일

잠언 26:1-12 미련한 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미련한 자
잠언 26:1-12

1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 2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3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4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5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6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7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10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찌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12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1. 미련한 자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음

본문 1절에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오는 것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자가 미련한 자입니까? 미련한 자는 우둔하고 깨닫지 못하며 모든 일을 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 미련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기면 일이 다 잘못됩니다. 지혜 있고 일을 할 만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지, 우둔하고 완악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영예’에 대한 귀한 일을 맡기면 일이 다 틀어진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신령한 뜻

미련한 자에 대한 신령한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잠언 14장 9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심상히 여기는 자가 미련한 자라는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가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또 누가복음 12장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곳간을 크게 짓고 거기에 물질을 많이 쌓아놓고 편안히 먹고 쉬자’라고 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즉, 예수를 믿어 영혼이 있는 줄 알아도, 내세주의로 나가지 않고 현실주의로 나가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미련한 자에 대한 신령한 뜻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가 미련한 자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미련한 자이고, 
셋째는 회개하지 않고 죄를 심상히 여기는 자가 미련한 자이고, 
넷째는 하나님을 공경해도 현실주의로 나가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하였는데, 영예라는 것은 직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런 사람에게 직분을 주는 것은 적당치 않습니다. 특별히 교역자로 믿음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을 세우는 것은 아주 적당치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직분을 주는 것은 여름에 눈이 오는 것,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은 다 곡식에 해가 됩니다. 여름에 눈이 와도 곡식에 해가 되고, 추수 때에 비가 와서 곡식이 비를 맞아도 곡식이 다 변질되고 썩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귀한 직분을 맡기게 되면 교회에 막대한 손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벌벌 떨지 않으며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직분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까닭 없이 남을 저주하는 자는 불쌍한 사람임

본문 2절에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까닭 없는 저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저주 받을 일이 없는데 공연히 어떤 사람이 저주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저주 받을 만한 일을 하였는가? 저주 받을 일이 무엇인가?’를 따져보아도 그런 일이 없으면, 그 저주는 참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또 제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날아가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저주가 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어긴 것은 저주 받을 일입니다. 성경말씀에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저주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어기지 않았으면 아무리 다른 사람이 나를 저주해도 그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을 저주하고 위협하며 공갈하여 포로로 잡아서 자기의 이용물로 삼으려고 하는데, 그들이 그런 까닭 없는 저주를 아무리 한다 해도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저주를 받는다, 아이가 죽는다, 무엇이 어떻게 된다, 집안이 망한다고 하며 저주를 하는데, 그러한 저주는 백만 마디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저주가 미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서 ‘그 저주가 미치지 않을까?’라고 하며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미치지 않습니다.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그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비가 날아가서 사라지고 새가 떠들다가 그만 두는 것입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하나도 자신이 받을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주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에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저주할 때에 분하다고 같이 싸우면 안 됩니다. “왜 저주하느냐?”라고 하며 싸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그러나 그 저주는 내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네게 다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면서, 저주하려면 하고 말라면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여간 저주를 받고 있는 사람이 그런 저주 받을 일을 하지 않았으면, 그 저주는 저주하는 상대방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게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저주 받을 일이 없는데 저주하면 그 저주가 그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주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에게는 채찍이 적당하고, 나귀에게는 자갈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가 적당합니다. 자갈이라는 것은 쇠나 밧줄을 입에다 끼우는 것입니다. 짐승의 입에 끼워서 그것을 잡아당기면 입이 아파서 끌려오는 것입니다. 꼼짝 못하고 끌려오는 것입니다. 나귀가 말을 안 들으면 자갈이라도 끼워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 말을 안 들으면 채찍이라도 때려서 그 말을 부리듯이, 미련한 자가 말을 안 들으면 막대기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대기로 때려서라도 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를 미련하다고 해서 가만히 놔두면 안 됩니다. ‘미련하니 새끼로 동여매서 내버리자’고 하면 안 됩니다. 새끼 묶어서 내버리는 것은 못쓰겠다고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해서 못쓰겠다고 내버리지 말고, 말이 말을 안 들으니 못 쓰겠다고 내버리지 말고, 또 나귀가 말을 안 들어 내버려야겠다고 하지 말고, 말은 채찍으로 부리고 나귀는 자갈을 매기고 미련한 자는 채찍질을 해서라도 부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부리고 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부리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뿔로 받는 소도 잘 부리면 일을 더 잘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도 불순종하는 자에게 징계의 막대기를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아니하고 미련하게 돌아가면 막대기만 받을 뿐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대답할 것과 대답하지 말아야 할 것

본문 4절에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 거기에 피동되어서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 같지 않은 말을 할 때에 거기에 답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같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말 같지 않은 것은 듣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리석은 자가 말 같지 않은 말을 할 때에 거기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답하면 그와 같이 되므로, 미련한 자가 말 같지 않은 말을 할 때에는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미련한 자의 쓸 만한 말도 가만히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5 에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말을 자꾸 할 때에는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4절에는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 대답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본문 5절에는 대답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대답하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미련한 자에게 바른 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 대답해주지 말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 같이 어리석은 말을 가지고 변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와 어리석은
것을 가지고 변론하지 말되, 미련한 자에게라도 바른 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말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미련한 사람이 “저 사람이 파리 몇 마리를 잡아먹고 왔다”라고 했다고 합시다. 파리를 안 잡아먹었는데 파리를 잡아먹고 왔다고 하면 “내가 언제 잡아먹었느냐?”, “네가 잡아먹는 것을 봤느냐?”,“네가 잡아먹었다”, 이렇게 하면서 서로 파리를 잡아먹었다고 변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괜히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파리를 잡아먹었다고 할 때에 그냥 “나는 파리를 안 잡아먹었다”라고 하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됩니다. 만약 파리를 잡아먹었으면 파리를 잡아먹었다고 하면 되고, 안 잡아먹었으면 안 잡아먹었다고 하면 됩니다. 아무리 파리 백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해도, 나만 안 잡아먹었으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도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상대방이 파리를 자꾸 잡아먹었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까 파리를 잡아먹긴 먹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파리를 안 잡아먹었다”고 한 마디만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마디만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에 나가다가 타락이 되어 요새는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교회에 연보를 하면 교회에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놓고 돈을 높이 던져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이 떨어질 때에 둥근 원 안에 들어간 것은 교회에서 쓰고, 밖으로 나온 것은 목사가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만히 놔두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듣고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는 목사가 돈 챙기는 곳이 아니다, 제직회의 재정부에서 맡아 관여를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또 다음에는 유대교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그렇게 한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듣고 그런 줄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유대교인들은 구약성경을 믿는 사람들인데 구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다고 한 마디 해줬습니다. 그러자 자기네들끼리 “우리가 잘못 들었는가 보다. 어디서 가짜만 듣고 다닌다”라고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적당한 말을 한 마디씩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 다시 말해 괜히 쓸 데 없는 말을 하자고 할 때에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쓸 데 없는 변론을 할 때에는 마귀에게 피동되는 것이고,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말, 적당치 않은 말을 할 때에는 정당한 말로 대답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정당하게 대답을 해주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정당한 대답도 안 하면 미련한 사람이 자기가 지혜로운 체하고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고 떠들며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전파되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한 마디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 6절에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진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기별을 하면 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못한 사람 편에 무엇을 기별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자기 발을 베어 버린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발을 찍는 것과 같이 손해를 본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무엇을 부탁할 때에 믿음이 있고 진실한 사람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막대한 손해를 봅니다. 따라서 믿을만하고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부탁을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편지로 하든지, 다른 방법으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면 금방 전해주지 않고 몇 달 있다가 전해줍니다. 차라리 우편으로 하면 벌써 전해주었을 것을, 그러다가 잃어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게다가 아예 안 전해주는 수도 있습니다.

본문 7절에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의 잠언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잠언’의 뜻은 ‘유사하다’입니다. 즉, 잠언은 ‘근사한 말, 옳은 말, 좋은 말’을 가리킵니다. 미련한 자가 중요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취한 자의 손에 있는 가시나무와 같고 저는 자가 힘없이 다니는 것과 같아서 말에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다리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미련한 자가 근사한 말,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힘이 없습니다.

본문 8절에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매에 돌을 매면 돌을 던져도 나가지 않습니다. 물매에다 돌을 그냥 두고 그것을 쳐야 나가지, 물매에 돌을 매서 치면 돌이 제대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와 같이 미련한 자에게 귀한 직분과 사명을 맡기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맨 것과 같아서 나가지 않고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이 안 됩니다. 목적 달성이 안 됩니다. 미련한 자에게 무슨 사명을 맡기면 그 일이 성공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돌을 물매에 맨 것과 같이 나가지 않아서 실패하고 맙니다.

본문 9절에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와 같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그것으로 막 후려갈겨서 많은 사람을 상하게 만듭니다.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로 막 후려갈겨서 여러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미련한 자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 좋은 말은 소용이 없고 도리어 손해만 납니다.

본문 10절에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찌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나가는 자를 고용하면 그 사람이 일을 잘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자는 첫째 성의가 없고, 또 일을 잘할 줄 모릅니다. 지나가다가 일을 하므로 일의 사리를 잘 모르고 일의 내용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를 고용하면 일의 내용도 잘 모르고 성의도 없으며 빨리 지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므로, 일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하는 것과 같아서 일이 잘 안 됩니다.
세상에서도 미련한 자가 다스리면 일이 잘 안 되는 것같이, 하나님의 일에는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벌벌 떨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잘 안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을 고용하면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데려다가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11절에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개는 토했다가 다시 먹습니다. 그와 같이 미련한 자는 잘못된 것을 회개했다가 그 미련한 것을 또 행합니다.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된 줄을 알고 다시 안 하겠다고 했다가 또 다시 하는 것입니다.
노름하는 사람이 다시는 노름을 안 한다고 손가락을 잘라서 싸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채 낫기도 전에 또 가서 노름을 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는 자기의 잘못을 회개한다고 해도 얼마 후에 거기에 또 들어갑니다. 잘못을 고친다고 해도 구렁텅이에 또 들어가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잘랐어도 그것이 채 낫기 전에 또 노름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로 안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진리를 바로 깨닫고 죄를 두려워하며 믿음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구렁텅이에 안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 하지 아니하고, 그저 안 할 것이라고만 하면 그 사람은 오래 못갑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또 구렁텅이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리에 있지 말고, 지혜로운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떨며 죄를 무서워하는 자리에 설 때에 그런 구렁텅이에 다시 안 들어갑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함

본문 12절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혜가 있다. 제가 잘한다’고 하는 태도가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련한 자보다 더 미련합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하면 미련한 자보다 더 미련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실제로 지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지혜롭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실제로 자기에게 지혜가 있어서 지혜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도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까? 실제로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그 자체로 벌써 지혜가 없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섰다 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증거요, 믿음이 없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스스로 섰다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사는 것이 믿음이고, 되지 못한 것, 자기의 부족한 면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같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미련한 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
무엇을 모르는 것 같으면 자신은 다 알고 있으니 자기에게 와서 물어 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에게 “말을 잘못했으니 이제는 이렇게 하십시오. 모르는 것을 나에게 물어보라고 한 것 까지는 좋은데, 내가 모르는 것은 빼놓고 아는 것만 가르쳐준다고 말하십시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자기가 다 안다는 것은 자신은 모르는 것이 없이 백과사전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백과사전보다 백 배 낫다고 할지라도 모르는 것이 언제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다 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잘한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잘한다. 졸지 않는다’라고 하다가 한 번 넘어지니, 뒤에 선 두 사람까지도
꽝 하고 넘어갔습니다.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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