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함
누가복음 20:27-47
누가복음 20:27-47
27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後嗣)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37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40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41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저희는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1. 사두개인이 부활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함
모세 오경에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신명기 25:5에 형이 결혼했다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의 아내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취해서 제일 먼저 낳는 아들을 형의 아들로 하고, 그 다음에 낳는 아들을 자기 아들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형의 후대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예전에 그런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데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칠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아들이 없이 죽었다며 말을 꺼냅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형의 아내와 살았다고 예를 듭니다. 그런데 그도 아들이 없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뒤에 셋째 동생이 또 그 형수하고 살았지만 역시 아들이 없이 죽었다고 예를 듭니다. 다시 넷째 동생이 살았지만 똑같이 죽고, 결국 일곱째까지 그 한 여자와 살았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부활할 때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부활이 있으면 서로 자기 아내라고 하며 싸움이나 생기니, 부활이 있으면 안 된다, 즉, 부활이 없어야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물욕, 정욕, 사욕이 없는 신령한 몸인 부활체
이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본문 34-3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한 자들은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죽어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살 때에는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고 하지만, 훗날 부활할 때에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장가가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습니다. 부활의 자녀로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또 다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천사와 동등이고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부활한 성도는 천사와 같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적 사람입니다. 부활체는 물욕이나 정욕, 사욕이 없습니다. 성도는 물욕과 정욕과 사욕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부활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죽어서 부활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몸으로 부활합니다. 다시 먹지 않아도, 영원히 먹지 않아도 굶주리지 않습니다. 먹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몸입니다. 그런 신령한 몸으로 이다음에 부활하게 됩니다. 천사와 동등인 순전히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서 말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신령한 몸으로, 영적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부활할 때는 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거론하며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부활할 때에는 다 거룩한 사람으로, 물욕과 정욕과 사욕이 없는 사람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부활체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뉘 아내가 되리이까?’하는 그런 차원의 물음은 부활할 때에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본문 37절에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며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가시나무떨기’, 그 가시나무 떨기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6에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신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떠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앞서 언급한대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이삭의 하나님이다”, 또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 몇 년 뒤에 모세가 났습니까? 아브라함은 주전 이천 년 전 사람이고, 모세는 주전 천오백 년 전 사람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죽은 지 오백 년쯤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이 죽은 지 벌써 오백 여년이 되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신 겁니까?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어 없어지는 자의 하나님이 되실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신데, 죽어서 없어진 사람의 하나님이 되실 리가 없습니다. 죽어 없어진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고, 또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죽어 없어진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다 죽어서 육신은 지금 다 썩어 없어졌는데,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신데 죽은 자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가서 살아있다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서 하나님과 같이 교제하고, 같이 즐거워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같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어 없어진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살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가 죽어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두개 교회는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 부활도 없다, 천사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두개 교회는 사람에게 부활도 없고 영도 없으며, 천사도 없고, 죽으면 다 없어진다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늘나라에 가서 살아있다는 증거가 확실히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왜 죽으면 없어진다고 하느냐, 하늘나라에서 살아있으니 이다음에 부활할 것이 확실하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본문 39-40절에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바리새파에서 나온 서기관들입니다. 이곳에 지금 사두개파에서 나온 서기관도 있고 바리새파에서 나온 서기관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이 있다고 답하시니 바리새파인들의 마음이 좋습니다. 또 천사가 있다고 천사와 동등이라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늘나라에 가서 있다고 하니, 자기들 바리새교인들의 교리에 딱 맞습니다. 그러기에 “옳습니다”하고 예수님 말씀을 지지했습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바리새교인들의 교리가 옳습니다. 사두개 교회는 교리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현실주의자들, 신(新) 신학자들의 교리입니다. 바리새교인들은 보수적이고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하며 더 이상 아무 것도 감히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썩을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바꿔 가지라
본문 41-43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고, 죽을 것으로 썩어질 것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안 죽을 것으로 다시 살고, 영원한 그 영광의 몸으로 우리 성도들이 다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몸은 안 먹어도 배 안고픈 몸, 다시는 병나지 아니하고 사망이 없는 몸입니다. 우리는 다 그 신령한 몸을 가지고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육신의 몸은 조금만 잘못 다루면 피곤하고 병이 나고, 또 안 먹으면 배가 고픈, 그런 몸입니다. 이 육신의 몸으로는 오래 살 바가 못됩니다. 이제 그렇지 않은 몸으로 다 바꿔 가지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 가지고는 오래 갈 수가 없으니 다 와서 바꿔 가지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으로 오래 산다고 해도 그건 욕입니다. 오래 살아도, 건강해서 활동을 잘 하면 모르지만, 활동도 잘 못하는 데 오래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몸으로 바꿔 가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꿔 가지고 나면 그것은 참 좋은 몸입니다. 늙지도 아니하고,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아니하고, 병나지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합니다. 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안 받아 어디 가겠다고 하면 가지고 오겠다고 하면 와집니다. 보이려면 보이고 또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령한 몸으로 다 바꿔 가지고 영원히 살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주셨습니다. 그 부활의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한 몸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몸이 시원치 않으면 다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썩어질 것을 가져오면 썩지 않을 것을 주십니다. 병나는 몸 가지고 오면 병 안 나는 몸으로 주십니다. 죽어서 갈 때 가지고 가면 안 죽는 몸으로 주시고, 육의 몸 가지고 가면 무슨 몸 주십니까? 네, 신령한 몸을 주십니다. 다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이 이제 우리에게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게다가 종자를 심으면 거기에서 신령한 몸이 나옵니다.
우리에게서 부활한 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건강해도 몇 살 산다고 했습니까? ‘인간의 연수(年數)는 칠십이요, 건강하면 팔십’이라고 했는데, 백 세 이상 산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백 세 사는 사람 쉽지 않습니다. 구십 세 산 사람이 혹시 있고, 백 세 산 사람은 서울에 한 두 사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 세 그 이상 사는 사람은 몇 십, 몇 백만, 몇 천만에 하나 있을지 말지 하는 것입니다. 또 백 세 살면 뭐 하겠습니까? 백 세 산다고 쭉 건강하고 자기 할 일 다 합니까? 그러므로 잠시 잠깐 있다가 가야하는 몸인데, 그 몸을 가지고 이제는 부활할 때에 신령한 몸으로 다 바꿔 가지려면 신령한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령한 것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곧 신앙의 준비입니다. 신앙 준비를 잘 하면,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 준비과정입니다.
본문 41-44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말씀인 시편 110:1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하셨는데, 처음의 ‘주께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뒤에 ‘내 주께’는 그리스도입니다. 즉,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했을 때, 처음의 주는 하나님이시고 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에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고 예수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하고 물어보니, 본문 45절에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까? 대답 못했습니다. 한 사람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 대답 못했습니까? 이 사람들은 영에 대한 것을 모릅니다. 육신에 대한 것만 압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다’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즉, ‘육신의 자손이다’라는 것을 알 뿐이지 영적으로는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영적으로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영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부활도 모르고, 또 하나님께로 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는 것도 모릅니다. 이 신령한 도리를 전혀 모르고, 전부 육신적으로만 생각을 하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2. 외식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먼저 인사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본문 46절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 가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다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문안 받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먼저 인사 하십시오.
그런데, ‘난 인사 받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 ‘인사 받지도 아니하고 하지도 아니한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바로 된 것입니까? ‘기소불욕이면 물시어인하라’, 이것은 제가 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공자의 교훈입니다. 자기가 인사 받기 원치 않는다고 해서 나도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둘 다 안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런 행동이 예수님의 교훈에 맞습니까? 맞니 않습니다. 그런 행동은 공자의 교훈에 맞는데, 그렇게 하려면 공자한테 가십시오. 그런 사람은 공자한테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적극적으로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인사 안하면 자신이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저 사람이 자기를 미워해도 자기는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으로 원수를 이겨라”,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이렇게 점점 예수님의 교훈대로 하면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나가게 됩니다. 인사 안하던 사람을 인사하게 만들고, 미워하는 사람의 그 미워하던 것을 없어지게 만들고, 원수를 사랑으로 정복해서 그 원수를 친구로 만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적극적으로 나가서 모든 것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또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에게 분부한 것을 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나가라는 것입니다. 주라는 말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줘라, 복음을 받았으니 복음을 줘라”, 이러한 뜻입니다. 적국(敵國)에 가 죽어서 그것으로 제자를 삼아 모든 족속을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네가 안하니까 나도 안한다’ 그러면 거기에 성령이 계시겠습니까? 이러한 태도는 마음 문을 딱 닫아놓고 서로 쳐다보고 인사도 안하고, 소 닭 보는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소와 닭아 서로 마주하면 소는 ‘저게 닭이다, 꼬리가 길구나’하고, 닭은 또 ‘저게 소다’하며 멀뚱히 바라볼 뿐입니다. 소하고 닭하고 무엇 통하는 게 있습니까? 둘 사이에는 아무런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두 사람 이상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 같이 모여 있어도 아무 관계 없이 지나가는 것은 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관계 없이 나가는 것, 그것은 교회도 아니고 사회도 아닙니다. 길에 나아가 보면 한 사람은 지나가고 한 사람은 지나옵니다. 저기 한 사람이 오고 자기는 갑니다. 지나가는 길에 서로 무심히 오고 가고 하는데, 그게 사회입니까? 그것은 사회가 아닙니다. 사회가 되려면 다른 사람과 관련을 가져야 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관련을 가질 때 사회가 구성됩니다. 서로 간에
인사도 하고, 어디 가는 것으로 보이면 “아, 어디 가십니까? 난 어디 갑니다”하며, 서로 이렇게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가 됩니다.
교회도 서로 관련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돼 있습니까? 성도가 서로 교통했다, 고 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며”라고 했는데, 가르침을 받은 다음에는 서로 교제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교제가 교회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을 하는 데에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아무런 교통 없이 그저 배급 타러 나온 사람처럼 앉았다가, “배급 탔다. 이제 가자”
하고 자루 메고 달아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데에서 교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또, 인사 받기만 좋아하지 말고 인사 하기를 좋아하십시오. 먼저 하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먼저 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받는 사람보다 먼저 인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있습니다.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성경에 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 뿐 아니라, 사랑을 주고 인사도 먼저 주고 서로 교제하는 말을 먼저 주라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소 닭 보듯 지나가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옆에 부호장여관 주인이 손 사장인데,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오다가 요새 안 나옵니다. 며칠 전에 만나게 되어 “아, 손사장님 오래간만에 오십니다”하고 악수 한 번 하고, 교회 나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술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오늘 또 술 잡쉈구나’싶었습니다. 이제 술 끊고 교회 나오시라고 했더니, 명년(明年)에는 나간다고 합니다. “명년에는 나갈 거니까 목사님 조금 참아주십시오”하면서 목사님 말은 순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년에 나오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누가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명년에 누가 가서 데려오십시오. 정월 초하루 날 가서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올해 83세라는데 건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건강하게 해주시는 데 하나님 섬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니, 나오기로 꼭 약속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손 사장을 봤는데 “안녕하셨어요?”하고 쑥 지나갔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친절하게 하고, 사랑을 베풀고 어떻게 하든지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 인사를 주고, 또 좋은 말도 해주어야 합니다. 주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인사 먼저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서기관들은 먼저 인사 하지 아니하고 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또 어디에 가면 높은 자리에 떡하니 앉기를 좋아하고, 문안받기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받는 판결이 무겁습니다. 심판을 중하게 받는다고 했습니다. 본문 47절에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심판이 크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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