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일 화요일

요한복음 1:35-51 와 보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와 보라
요한복음 1:35-51

35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40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와 보라’하는 말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와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전도할 때에도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와 보라’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께 ‘와 보라’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로 와 보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심

‘예수님께로 와 보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1:1-5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사람이시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빛이 되시고 말씀이 되시는, 이러한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찾아오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셨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것은 사도신경의 첫 마디입니다. 사도신경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모시는 것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것이 다 그 고백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라, 예수에게로 오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께로 오라’고 했습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즉, 성경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로 오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에 주기도문부터 한 번 올리고 사도신경도 한 번 올리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기도문이 아주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하는 이 기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또, 사도신경도 한 번씩 외워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예수님께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저 왔다갔다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갈 때 마음, 영, 몸 모두 가까이 가야 함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에는 육신만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이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심령이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까이, 한 발짝 더 오라, 조금 더 앞으로 오라, 내게로 오라,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멀찍이 따라가지 말고 조금 더 가까이 따라가고 조금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마치 술람미 여자와 같이, 신부의 자리에까지 들어가도록,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오라’고 하셨습니다. 몸뚱이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 심령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뒤에 세우고 예수님께로 조금 더 나아오는 생활, 이것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오기는 했는데, 과연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바깥마당까지 온 사람, 대문까지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앞마당까지 왔다 갔다 하는 사람, 방문까지 온 사람,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가는 사람, 침상에까지 들어가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깥마당, 대문, 안마당, 방문까지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그저 들여다보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는 사람, 들어가서 인사하는 사람, 그리고 침소에까지 들어가 보는 사람은 주님의 종입니다. 교인 중에 어디까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까? 이스
라엘 교인들은 바깥마당까지만 왔다 갔다 했습니다. 안마당에는 못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바깥마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측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가, 예수님께로 어디만큼 왔는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발짝 더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대문간 안으로 들어가고 앞마당에 들어가고 안방에 들어가고 침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셨는데, 가지 않고 버티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가야 합니다. 세상을 붙잡으려고 돈을 붙잡으려고 향락주의와 방탕, 이러한 것들을 붙잡으려고 예수님께로 가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붙잡은 것을 다 내려놓고 와야 합니다. 

돌아오면 메시야를 만나게 됩니다.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보면 예수님이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십니다. 가보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발견한 뒤에 가까운 사람부터 전도함

본문 40-42절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 가보고 난 다음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하며 그 형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부터 데리고 왔고 요한은 야고보를 데리고 왔습니다. 한 동네 사람 등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우리가 데리고 오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는 ‘와 보라’하는 해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한국은 올해가 ‘방문의 해’라고 하는데, 교회에서는 ‘와 보라’하는 해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가봐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인 내 형제, 친구, 동네 사람들부터 데리고 와야 합니다. 부부사이도 이에 해당합니다. ‘와 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셨는데, 빌립은 안드레·베드로와 한 동네인 벳새다 사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빌립이 와 보고 예수님을 발견하였으며 믿게 되었습니다. 또,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르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본문 45절)”고 했습니다. 이것도 자기 친구에게 전도한 것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빌립이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하니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본문 46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 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천한 곳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은 인간의 생각으로 그곳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실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와 보라, 너는 나사렛에서 훌륭한 사람이 나오지 못한다고 여기지
만, 와보면 알 수 있을 것 아니냐, 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2. 나다나엘을 알아보시듯 우리를 다 알아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기를, 47절에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참 신도라는 말입니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로 가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다 알아봐 주십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인지 아닌지, 외모만 이스라엘 사람인지 아닌지, 속에 간사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 다 알아봐 주십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참 이스라엘 사람은 요새로 말하면 참 성도입니다. 진실하여 거짓이 하나도 없는 성도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는 이미 교회에 나간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나일론 신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일론 신자, 아마 진짜 성도가 아니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신자이긴 신자인데, 다른 것이 섞인 신자입니다. 주일도 빠지는 등 못된 짓하는 신자가 나일론 신자입니다. 나일론 신자들은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일론 신자구나, 너는 가짜구나, 너는 속에 진실이 없고 거짓만 가득하구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은 그 양을 알아보시고, 그 양의 상태를 다 아십니다. 참 신자인지, 아니면 반쪽 신자인지 껍데기 신자인지 전부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다 알아주십니다. 자신의 상태보다 더 알아주시지도 덜 알아주시지도 않고, 그대로 알아주십니다. 50%짜리는 50%대로, 70%짜리는 70%대로, 90%짜리는 90%대로, 100 %짜리는 100%대로 알아주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펴보실 때에 참으로 한심해 하실 것 같습니다. ‘이런 나일론이 많이 섞였구나, 반 개짜리가 많구나, 껍데기가 많구나’, 이렇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우리가 사람은 속여도 예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다나엘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 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당시부터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뜻으로서 한국어로 말하면 ‘예수쟁이’가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들이 성도들을 ‘예수쟁이’라고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쟁이’는 전문가라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쟁이’라는 말은 우리 성도들에게 좋은 말입니다.
가짜 신자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집에서는 자기 아버지가 집사 혹은 장로인데, 그 집 자녀가 자기 아버지를 가짜, 라고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된 것과 간사한 것이 없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어린아이와 같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성하는 신자가 되면 예수님께서 다 알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길으시는 양을 아시고, 그 양은 예수님을 압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나를 알아주시며 그때에 나도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어떠한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겠습니까? ‘오라’하는 말씀에 ‘오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참으로 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본문 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와서 보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임금이시라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임금이시고 천지 만물을 다 통치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가면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께로 온 그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간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아시고 불러주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다 알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고가 헛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를 위해 봉사하고, 다치기도 하며, 희생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알아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얼마나 충성을 했는지, 얼마나 하나님께 바쳤는지, 얼마나 주를 위해 희생했는지, 예수님께서 다 아십니다. 이렇게 다 알아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본문 48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보시고 아시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하신 것을 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왜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했을까요?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나무 아래 숨었다고 했는데,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그러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그때에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주여,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언제 보내시겠습니까?,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언제 오십니까?”하고 기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듯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알아주시고 다 보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다 알아주시고 보아주시며, 불러주십니다.

부르심의 두 종류,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왔습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입니다. 외부적으로 ‘오라, 다 오라’고 하신 것은 외적 소명입니다. ‘누구나 다 오라, 혼인잔치가 준비되었으니 다 와서 먹으라’고 하신 것, ‘소경이나 절름발이나 다 와서 먹으라’고 하신 것, 이것이 외적 소명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되 행하심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초청을 내적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적다는 뜻입니다. 내적 소명은 중생한 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속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내적 소명을 받은 자입니다. 혼인잔치와 같이 ‘다 오라’고 하는 초청은 외적 소명입니다. 내적 소명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 속의 중생한 영에게 감동을 주어서 당신께 나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소명이야말로 진짜입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소명을 낚시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낚시 할 때에 보통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우고 부근에 떡밥을 많이 뿌려놓습니다. 이 떡밥을 무는 것은 외적 소명에 해당합니다. 낚시 바늘을 무는 것이 내적 소명입니다. 이 낚시 바늘을 무는 고기는 확실히 낚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소명을 받은 자는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놓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내적 소명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됨

본문 마지막 절인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계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예수님께 참으로 나아가면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전에 야곱이 본 것처럼, 땅에서 하늘까지 사닥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닥다리입니다. 그 곳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모두 주시고, 우리의 것은 하나님께로 다 돌리신다는 뜻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영감을 받게 되고, 우리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다 돌리게 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고 충성하게 됩니다. 몸을 바치고 생명까지 바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다 우리에게 오고, 우리 것은 다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됩니다. 사닥다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로 오고,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즉, 하나님과 교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심령 속에, 그리고 이 땅 위에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며, 하나님과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이러한 특별한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우리들도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 문이 열리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세계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현재 자신이 자리한 곳에서 조금 더 예수님께 가까기 가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로 점점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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