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3일 화요일

요한복음 2:1-11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요한복음 2:1-11

1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모친 마리아가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예수님께 알림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청함을 받아 가 계셨습니다. 또, 예수님과 제자들도 청함을 받아 그곳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이 이 혼인잔치에 청함 받은 것을 보면, 아마도 친척관계의 어느 사람이 혼인잔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혼인잔치를 하는 중에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연회에 쓸 포도주가 부족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르기를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 그곳에 포도주가 모자란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보고 ‘여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여자’라는 말은 존칭어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존칭어를 사용하여 말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주의 자격으로 지금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육신의 어머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예수님께는 하나의 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여”라는 호칭을 쓰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로서 구주의 자격으로 구속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어머니라 하더라도 한 명의 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속 사업에 상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신성(神性)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마리아는 한 명의 여자일 뿐, 구속 사업을 성취할 수 없는사람입니다.

물 떠온 하인들만 아는 포도주의 비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여기에 오셨는데,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렸으니 무슨 일인가 하실 것이다, 라고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키시든지 그대로 다 순종하라, 고 미리 말을 해 둔 것입니다.
이날 혼인잔치 자리에는 두세 통 되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들은 그들의 결례(潔禮)를 위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그 돌 항아리 물에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발까지 씻기도 했습니다. 즉, 손을 씻기 위하여 대문 안에 돌 항아리 여섯을 놓고 거기에 물을 길어 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항아리 물에 손을 씻고 나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하인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물의 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고원지대이여서 우물이 다 깊고, 또 물이 충분한 우물을 발견하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멀리에까지 가서 물을 길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물이 많지 않고 또 우물 안은 대개 깊었습니다. 하지만 하인들은 멀리에까지 가서라도 깊은 데에까지 들어가서라도 물을 길어다 항아리의 아구에까지 채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고, 하인들은 항아리의 물을 떠서 잔치의 책임자인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본문 9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라 상당히 걱정을 했는데, 이제 갑자기 좋은 포도주가 왔습니다.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연회장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하인들은 그것을 떠다 주고 나서 또 다시 그 길어온 물을 가지고 연회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연회장은 그저 하인들이 계속해서 포도주를 가져 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함

누가복음 5:37-38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는 터지고 포도주도 쏟아져서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이 지역에서는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담아 저장했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의 경우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병에 넣고 뚜껑을 닫아 놓으면, 병의 몸통이나 뚜껑 부분이 부풀어 올라옵니다. 그러다 간혹 뚜껑이 팽하며 튀어 날아가 병 안에 담긴 포도주가 쏟아지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이다 병 뚜껑을 열 때에 약간의 사이다가 병 밖으로 뿜어 올라오는 것처럼, 새 포도주는 팽창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낡은 가죽 부대는 이미 낡아 버려 그 안에 담긴 물질의 팽창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새로 만든 포도주를 그 안에 담을 경우, 그것이 자꾸 팽창하면 견디다 못해 결국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부대는 째지고 포도주도 쏟아져 버리게 됩니다. 결국 둘 다를 내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로 만든 가죽 부대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 가죽 부대 안에 새 포도주를 담았을 때, 포도주가 조금 부풀어 올라와도 부대는 견뎌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새 생명 운동’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새 생명 운동과 관련하여, 로마서 7:6에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새 것은 영입니다. 영의 역사,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적 새 생명 운동, 이것이 새 포도주 운동입니다. 달리 말해, 새 생명 운동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의문과 제도 등의 구습(舊習)을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미 다 지나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도 주님께서 하시는 새 생명 운동을 친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보내신 일생 동안 여러 이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그 처음이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처음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새 생명 운동이 이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즐거운 혼인잔치 집이다

예수님께서 혼인잔치 집에 가셔서 포도주를 만드신 일에는 또 다른 의의가 있습니다. 아가서 2:4에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어디나 혼인잔치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잔치 집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먹을 것도 많습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흥겨워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잔치 집입니다. 또, 잔치 집에 가면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척들이나 친구들도 있습니다. 

저도 이북에서 헤어지고 난 뒤, 한 40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결혼식장에 가보니 다 와있었습니다. 만나보니 다들 나이 들어 늙어 있었지만, 그래도 옛날 모습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잠시지만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 집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그 일이 이렇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어디나 언제나 잔치 집입니다. 그 자리에는 함께 축하하고 기뻐할 즐거운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잔치 자리에 가면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 해도 먹을 것이 조금은 있지 않습니까? 보통은 떡도 하고 녹두전도 하고 계란도 부치고 돼지고기도 사놓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영적인 잔치 집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기쁨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아주 좋은 집입니다.

2. 예수님께서 계신 혼인잔치

혼인잔치에 청한 사람들은 오지 않고 이방인인 우리가 감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몇 번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살진 송아지를 잡아놓고 “다 오시오”하고 초청을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청함 받은 사람들이 모두 왔습니까? 다 안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 사러 갑니다”,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장가 갑니다”라고 하면서 안 왔습니다. 혼인잔치에 오라고 해도 이렇게 이유를 대고 안 옵니다. 

살진 짐승을 잡고 그 외에도 많은 음식을 해 놓았는데 초청한 사람들이 안 오니, 결국 잔치자리를 배설한 주인은 종들에게 말합니다. 나가서 거리 아무데 어디에든지 만나는 사람들을 다 청해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종들은 거리에 나가 소경과 절름발이 등 여러 사람을 잔치자리로 불러옵니다. 그리하여 그 잔치 집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이 이야기에서 뒤늦게 잔치 집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입니다. 애초에 청한 유대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아서 이제 병자와도 같은, 되지 못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청하여 당신의 잔치 집에 모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잔치 집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 집에 들어갈 자격이 됩니까? 우리는 이방 사람들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볼 때에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개와 같은 사람들로, 사람으로서 온전한 취급을 안 하는 외인(外人)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잔치 집에 온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안식을 먹으며 생수를 마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주께서 잔치 집에 오셨기에 우리가 잔치 자리에 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잔치에 오신 일입니다. 주님께서 잔치에 오신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치 집에 오지 않으셨다면 잔치자리가 크게 실패할 뻔 했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포도주가 모자라는 상황, 이런 경우를 경상도 말로 ‘파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상황이 아주 파했다는 뜻으로, 실패했음을 가리킵니다. 포도주가 모자라면 잔치는 실패한 것이요 잔치 집은 다 절단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잔치 집에 오신 일, 지금 와 계신 그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잔치 집에 예수님께서 오심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잔치 집에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찬송가 중에도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라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자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 잔치를 배설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찾아오신 그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들판에 내 버려졌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에스겔 16:4에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꼽 줄도 자르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들판에 내 버려졌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이리나 타조와 같은 자들을 예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즐거운 잔치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주님께로 찾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께 어떻게 찾아가겠습니까? 우리가 하늘나라에 어떻게 찾아갈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의 잔치 집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포도주가 사라진 그 때 예수님께 아뢸 수 있음

잔치 중에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이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때 예수님께 문제 상황을 아뢸 수 있었던 것, 그 자체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면 누구에게 보고했겠습니까? 

이 세상의 포도주는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것은 가다가 결국 끝이 있습니다.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한도가 있어서 모자랄 날이 옵니다. 끊어질 날이 오게 됩니다. 이 잔치 자리와 같이, 처음에는 포도주가 넘치게 많아서 아마도 모인 사람들이 여러 잔 마셨을 것입니다. “이거 한 잔 먹어라, 하하!”라고 하면서 다들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손님들이 많이 오면 모자라게 됩니다. 별 수 있겠습니까? 세상 것은 이렇게 오래 못 갑니다. 얼마 가면 모자라게 됩니다. 다 고만 고만 해질 날이 옵니다. 물질이든 무엇이든 아무리 많은 것 같아도 얼마 가면 다 없어질 날이 옵니다.

세상에서 마시던 포도주가 없어지면, 그 잔치는 심심하게 됩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얻는 행복이나 즐거움,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사라질 날이 옵니다. 아무리 좋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조금 지나고 나면 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끊어지고 맙니다. 포도주와 같이 달콤하고 맛이 있어서, 마음에 아주 좋게 여겨지지만, 얼마 안 가서 다 없어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끊어질 날이 옵니다. 

그때가 왔을 때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가 보고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포도주가 다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의 힘으로는 제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것이 사라진 다음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며 예수님 앞에 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 가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서 사정을 풀어 놓고 그 속을 아뢸 수 있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아뢰겠습니까? 설령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려 해도, 그들이라고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도 항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얼마 있으면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친구들에게 가서 아뢰려고 해도, 그들이 얼마 동안 얼마만큼은 조금 도와주겠지만, 분명히 그 도움에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누는 위로의 말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사정을 알릴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봐야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몰라도, 조금의 도움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예수님 밖에는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실 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호소해야 합니다.
포도주가 없어졌습니다. 이것 참 큰일이 났습니다. 이제 다 절단이 나게 생겼습니다. 이제 혼인잔치가 ‘파이’입니다. 다 ‘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가다가 실패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예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아뢸 때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지금 벌어진 이 일에 인정(人情)을 갖다 붙이면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라는 그 관계, 육신의 사정, 이러한 것은 다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정을 예수님께 아뢸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보시기에 정당하고 합당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일하심은 인정을 보고, 그것에 끌려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별것을 다 구합니다. 예를 들면, ‘아들 하나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 보고 나면 ‘또 하나 더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이렇게 ‘무엇을 주십시오’, 또 ‘무엇을 주십시오’라고 헌 신짝 같은 세상 것들, 시시한 것들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 양말도 아니고, 헌 양말 짝 같은 것들을 구하는 것, 이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정당하고도 합당한 것,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구할 때에 말씀을 주셨고 하인들이 순종함

구하는 것을 주실 때에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첫 번째로 말씀을 주시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무슨 포도주 한 통 갖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이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 돌 항아리에 부으라는 그 말씀, 하찮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변변치 않은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지금 포도주가 모자라는데, 물은 길어서 무엇을 하나, 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모자란 포도주를 어서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지금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부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하찮고, 또 시원치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또, 지금 그 돌 항아리들에는 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인들은 “물 길러 가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도 한 번 길어오고 그만 둔 것이 아니라 계속하였습니다. 어느 만큼 부었습니까? 항아리 아구에까지 짤짤 넘도록 했습니다. 두세 통 드는 그 항아리들에 물을 한가득 채운 것입니다. 

본문 6절에 항아리 하나에 두세 통 든다고 했습니다. 두세 통 드는 항아리가 모두 여섯 개입니다. 즉, 세 통씩 여섯 개면 전부 열여덟 통을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하인들은 잔치자리에서 우물가가 멀지만 가서 길어다 두고, 또 가서 길어다 두고, 또 가서 길어다 두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길어 오면 예수님께서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려는지, 하인들이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이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혹, 이 사람들은 ‘물을 길어다 두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실까’, ‘짤짤 넘치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나?’, ‘물이 흘러넘치면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물을 가져다 항아리에 부으라고 하시니 아구에까지 차도록 가득히 부은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하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 “무슨 필요가 있기에 이 일을 시키느냐”, 이러한 것들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서 물을 길어 오라고 하시니,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가득히 채운 것입니다. 그저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혼인잔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함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중요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혼인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와 우리가 하는 잔치는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혼인잔치는 어떠한 잔치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잔치는 한국 서울의 혼인잔치입니다. 부산에서는 부산의 혼인잔치, 대전에서는 대전의 혼인잔치, 미국에서는 미국의 혼인잔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혼인잔치를 다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잔치에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즉, 말씀을 주신 것이 중요하며 그 말씀을 받는 것이 또 중요합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판단하면, 물을 길어다 두라는 그 말씀,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말씀 받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 생각으로는 하찮게 보이고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말씀 제일주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 제일주의, 그래야 혼인잔치 집에서 이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벌벌 떨며, 그 말씀이 가장 귀한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66:2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십니다.

3.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

마르다는 음식을 차리느라 분주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들음

누가복음 10:41-42에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들의 오라비는 나사로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바로 그 나사로입니다. 마르다는 언니이고 마리아는 동생입니다. 여기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닙니다. 다른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 마음이 많이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그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0:39에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고 했습니다. 즉,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언니 마르다는 부엌에 가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음식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하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마도 음식을 여러 가지로 장만하고자 한 모양입니다. 이에 마르다의 마음이 많이 분주해서 예수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라고 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음식 차리는 일이 너무 분주해서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돕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반찬을 여러 가지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혼자 하겠습니까? 삶고 끓이고 지지고 볶고 닦고 부치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혼자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쪽 돌보면 저쪽이 타들어 가고, 또 저쪽 돌보면 이쪽이 타들어 갑니다. 이러니 마르다가 “예수님, 나 혼자 일하는 것은 왜 생각지 아니하십니까? 내 동생에게 명해서 나 좀 도와주라고 하소서”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야, 언니 혼자 일하는데, 나가서 도와주고 와라, 밥 먹은 다음에 같이 말씀을 들어라”라고 하실 줄 알았을 것입니다.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41-41). 즉,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중에 몇 가지만 하면 될 것인데, 왜 그렇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느냐?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다는 것은 반찬을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한 가지면 족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한 가지’는 바로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즉, 마리아는 말씀 받는 편을 택하였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잘못 된 것입니까? 마르다가 음식 차리는 것이 잘못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굶겨놓고 말씀만 들으면 됩니까? 음식은 아예 대접 안해야 합니까? 마리아와 같이, 음식 대접은 안하고 말씀만 들으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위의 물음들에 대하여 답을 하자면, 그 근본정신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음식을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고단하신 가운데 피곤해 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잘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이, 왜 잘못 되었습니까? 그것은 마르다가 말씀 받는 시간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다. 이 시간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시간인데, 그때 마르다는 나가서 음식을 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배시간에 옆 사람하고 나가서 음식 차리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다 받고 그 다음에 가서 음식을 차려야 하겠는데, 말씀 받아야 하는 시간에 슬그머니 나가서 음식을 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을 다 받은 다음 쉬는 시간에 나가서 먹을 것을 차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지금 거꾸로 하자는 것입니다. 음식을 다 차려서 먹고 난 다음에 말씀을 받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 받는 시간에 그것을 다 받고, 그리고서 나가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르다는 음식을 먼저 먹고 말씀을 받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마리아는 무엇이 먼저였습니까?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마르다는 먹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음식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요새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음식 차려서 강사들 대접하느라 분주한 경우입니다. 어제 사경회를 하러 갔는데, 예배시간에 보니 집사들 몇이 빠졌습니다. 여 집사들이 평소 말씀을 잘 받다가 갑자기 빠졌습니다. 끝나고 왜 빠졌느냐고 제가 물으니, 목사님 대접하려고 빠졌다고 합니다. 강사 목사 대접하려고 음식 차리느라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야단을 쳐놓았습니다. “내가 여기 얻어먹으려 왔느냐, 아니 말씀 가르치러 왔는데 말씀 가르치는 시간에 말씀을 안 받고 음식 차리고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서 차려놓은 음식을 안 먹으려 하다가, 또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 받는 시간에 음식 차리려고 간 것을 보면 그래도 그만한 정성을 알 수 있는데, 호통을 치고 안 먹기까지 하면 아주 뒤로 나자빠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먹기는 먹었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대접하겠다는 마르다의 생각은 좋습니다. 마르다가 수고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왜 말씀 받는 시간에 나가서 차리느냐, 그것입니다. 말씀 다 받고 차려야 합니다. 마르다는 그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말씀 제일주의, 마르다는 먹는 것 제일주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제일주의라 하십니까? 예수님은 ‘말씀이 제일’, 입니다. 보통은 먹는 것 제일주의, 물질 제일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 제일주의로 나가야 함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받는 것을 제일로 삼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말씀 받는 것이 첫째이다’라고 여겨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을 먼저 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것에 다 실패한다고 해도 말씀 받는 것에 실패하면 안 됩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말씀이 귀하고, 모든 재산보다 말씀이 귀하고, 명예나 영광보다 말씀이 귀하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보다 말씀이 귀하고, 애굽의 모든 재산보다 말씀이 귀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말씀이 귀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있는 동안 최고학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말씀이 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좋은 직장보다 말씀이 귀합니다. 말씀이 귀한 것입니다. 외동아들, 독자보다 말씀이 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때 아브라함은 어느 것이 귀한 줄로 알았습니까? 네, 아브라함은 말씀을 귀한 것으로 알아 독자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가 제일로 귀했다면, 이때 말씀을 순종하지 못 할 뻔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이 귀합니까? 말씀이 생수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영생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이 가장 귀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말씀만 따라가면 영생을 얻고 영혼이 자라나게 됩니다. 육신의 생명이 우상이 되어서 말씀을 내어 버리면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육신도 죽고 영적 생명도 죽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순종하는 것을 제일로 알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순종함으로 알게 됨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떠다가 그대로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떠서 갖다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회장은 이 좋은 포도주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은 아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이적이 나타납니다. 오늘 물이 포도주로 바뀐 이 이적은 예수님의 여러 이적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 강 물이 높이 쌓이며,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말씀을 순종함으로 사라는 구십 세에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면 사막에서 생수가 납니다. 황무지가 소생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면 이리나 사자와 같은 사람도 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이러한 큰 기적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 이적은 누구만 압니까? 순종한 사람만 압니다. 순종함으로 체험을 얻는 것입니다. 순종해 보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해 보니 물이 변했습니다. 순종해 보니 새 생명이 생겼습니다. 순종해 보니 기쁨을 얻었습니다. 심령이 변화가 되고 인격이 변화가 되고 맛이 변화가 되고 빛깔이 변화가 되고 다 변화가 되었습니다. 순종하면 이런 큰 기적적인 역사, 인간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일지라도, 천하고 무식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지라도 그 말씀을 순종해 보니 변화합니다. 지혜로워지고 존귀해집니다.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매우 큰 역사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운동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다

본문 10절에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취한 다음에 나쁜 포도주를 내는 법인데, 이 집은 어떻게 된 것이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가 나왔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 집은 다른 집들과 반대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보통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좋다’하고 먹게 만들어 취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좋은 것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신 포도주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았습니다. 나중이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세상 것은 처음에 좋다가 차차 나빠지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생명 운동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습니다. 차차차차 좋아집니다. 점점 더 좋아집니다. 세상 것은 처음에 좋다가 점점 시시해지고 나빠지고 허름해집니다. 예수님의 것은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좋아지고, 후에는 아주 존귀해지고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없애지 못합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것이 좋은 것임을 알게 되고, 조금 더 경험을 하
는 만큼 조금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미국, 뉴욕에서 교회를 하는 문영준 목사의 경우입니다. 처음에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할 때에는 그다지 좋은 것을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해 동안 목사로 봉사해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점점 깨닫게 되더랍니다. 요새는 아주 존귀한 일임을 알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지 점점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세상 일은 처음에는 좋다가 차차차차 그 좋았던 것이 없어집니다. 직장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좋다고 하더니, 세월이 가고 내내 그것만 하다보면, 못하겠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세상 것이 좋아 보이지만, 점점 나빠집니다. 차차차 나빠지다가 결국 ‘아차차’하고 그만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구원 운동은 처음에는 별로 좋은 것을 잘 모르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차차차 좋아집니다.
점점 좋아지는 것입니다. 

찾아오신 예수님, 그 말씀을 받아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함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을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하인들이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하찮은 것 같아도 주님의 명령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독자도 바치는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재산도 포기하라고 하시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포기했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씀 제일주의로 나아가는 것, 말씀 받는 것을 제일로 삼는 것, 생명을 내어 놓고 말씀을 따라가는 것, 이렇게 말씀을 따라 사는 삶에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나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차차 좋은 것을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금년 새해에 이러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껍데기로만 믿어 성전 마당에만 왔다 갔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과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 변화의 역사가 다 일어나서, 우리 자신이 변화 하고 가정이 변화하고 사회가 변화하고 국가가 변화하고 세계가 변화 해야 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변화의 역사가 전 세계에 일어나는 금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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