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1일 토요일

마태복음 27:55-66 예수님의 장사 (葬事)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수님의 장사 (葬事)
마태복음 27:55-66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63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66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본 여자들

본문 55-56절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본문 56절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눅 8:2).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한 다음에도 제일 처음으로 갔습니다(막 16:9). 또 누가 있었습니까?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40에,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라고 했는데, 살로메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입니다.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기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멀리서 십자가까지 바라봤습니다. 제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제자들은 다 달아났고, 사도 요한 한 사람만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2. 한몫 쓸 때 나섰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본문 57-60절에,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했는데, 저물었을 때에 누가 왔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다음에 또 누가 왔습니까? 니고데모가 왔습니다. 요한복음 19:39-40에,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라고 했는데, 니고데모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하기 위해서 니고데모가 나와서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쯤 가지고 왔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려고 몰약, 백 근쯤 되는 많은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붓고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는 들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는 아닌데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관원이라는 것은 요새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같습니다. 국회의원과 같은 70인 공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고 학자인데, 전에 밤에 와서 예수님에게 중생의 도리를 한 번 들은 적이 있고, 그 다음엔 예수님을 위해 변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할 때에 니고데모가 나와서 변명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한복음 7:50-5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죽이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나와서 ‘우리 율법에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일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그 사람 말을 듣고 그 행한 일을 알아본 다음에야 판결해야지 본인의 말도 안 들어보고 또 행하는 것을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이렇게 판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하고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제 예수님을 장사할 때에 니고데모가 나타났습니다. 열 두제자는 예수님 장사할 때에 다 도망쳤는데 니고데모가 그때 나서서 예수님을 장사하려고 몰약, 침향 섞은 것, 향품, 세마포를 가지고 나와서 싸서 장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가 유대인의 관원이므로 나와서 장사하는 것을 그대로 가만 내버려 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서 장사하려고 했으면 아마 허락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나와서 하니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가만 둬 둔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의 직분을 이때에 한번 쓸 때가 된 것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변명할 때도 한 번 썼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몫 쓸 때 한몫 쓰는 것입니다. 자기 지위나 권세나, 또 자기의 힘이나 물질이나 봉사나, 자기가 마땅히 한몫 쓸 때가 있는데 그때 한몫 쓰면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고, 자기 구원도 되고, 하나님도 잘 되어 나가고, 다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한몫 쓸 때에 쓰지 않으면 그건 다 썩어지고 맙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서 한몫 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는 그 학(學)도 한몫 쓸 때가 있고,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그 지위를 한몫 쓸 때가 있고, 또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하는 것으로 한몫 쓸 수 있고, 또 관리 법관에 가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도 한몫 쓸 수 있습니다. 그때 가서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 달라고 그랬지요?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부자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또 어디 있나 보십시오. 누가복음 23:50-51에,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라고 했는데, 이 사람도 공회의원입니다. 이 사람 니고데모도 국회의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국회의원이란 말씀입니다. 또 부자입니다. 그 부자도 한몫 썼습니다.

여기서 한몫 쓸 때에 나서야 됩니다. 니고데모하고 아리마대 요셉하고 안 나섰다면 예수님 장사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장사하겠습니까. 그 때에는 장사하러 가도 허락도 안할 것입니다. 공회의원이 갔으니깐 허락을 해 준 것이고 다른 사람이 가면 허락을 안 할 것입니다,
또 만나 주지도 안습니다. 또 장사 하겠다 해도 그 말이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 뒀다가 그 다음엔 그 강도들 죽은 다음에 한꺼번에 치우도록 어디 시체를 가져다가 치울 것입니다. 장사를 별도로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에 공회의원으로서 나섰다는 말씀입니다. 말하니까 허락을 했던 것입니다. 나설 수 있을 때에 나서야 합니다. 나설 수 있을 때에, 자기가 나서서 한 몫 쓰임 받을 때에 나서야만 됩니다. 안 나서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니고데모
나 아리마대 요셉이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서지 않았으면 예수님 장사는 잘 못 되었을 것이고, 강도와 같이 어디 한 곳에 갔다가 치워 놨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때 안 나섰다면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관둡니다. 하나님이 그때를 위해서 한 몫 쓰려고 공회의원도 되게 하고 재산도 줘서 부자가 되게 했는데, 이때 만약 안 나서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 앞에 저주 받습니다.

에스더 4:4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했는데, 이것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거는 이때 한몫 쓸려고 하나님이 왕후가 되게 만들어 놨다는 말씀입니다. 이때에 왕후밖에는 왕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왕 앞에 들어가 말해야 되겠는데, 너 밖에 들어갈 사람이 없는데, 네가 만일 이때에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네 아비 집은 어떻게 되겠느냐?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때 한몫 쓸려고 왕후가 되게 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한다’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와 네 집은 멸망 한다” 는 것입니다. 반드시 망합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나섰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한 몫 쓰임 받아 나서야 할 때에 나서지 않으면 ‘너와 네 집은 멸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하게 하십니다.

니고데모가 나서고 아리마대 요셉이 나서고, 이것은 생명 내놓고 나서는 겁니다. 이때 나서서 예수님 장사하게 되면 그들을 ‘예수파’ 로 몰아서 앞으로 공회의원 떨어질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설령 공회의원에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예수파 공회의원 말을 사람들이 듣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주목해서 큰 핍박이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서 이때 안 나설 수 없었습니다. 공회의원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때 나서서 한몫 자기 몫을 감당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쓰려고 파놓은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려고, 빌라도에게 나가서 시체를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본문 58-61절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고 했습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나아가서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내어주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공회원이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직접 나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보통사람이 빌라도에게 나가겠다고 하면 총독이 만나주겠습니까? 공회원이 오니까 만나준 것 같습니다. 그 총독이 유대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데, 요새로 말하면 보통사람이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하면 만나 주겠습니까? 그러나 국회의원이 무슨 특별한 일이 있다고 만나러 가면 보통은 만나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자기 유대인의 공회원의 지위를 한몫 썼다는 말씀입니다. 가서 빌라도를 만났습니다. 시신을 내달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다 죽었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알아보고 그 다음에 내 주라고 그랬습니다.

3.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께 바친 아리마대 요셉

본문 59-60절에,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를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라고 했는데, 자기 새 무덤을 바위 속에 팠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니까 아마 바위를 쪼아내서 무덤을 만든 모양입니다. 상당히 돈이 많이 먹었을 것 같습니다. 바위를 쪼아내서 무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장사하고 바위를 굴려다가 거기다 막을, 그렇게 할 무덤이었습니다.

요새도 바위 속에 판 무덤 있습니까? 무덤자리가 어떤 것이 좋은 무덤자리입니까? 모래 섞은 것 비슷한 그 바위 섞은 그런 흙 석벽도 있고, 하여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흙이, 그런데 어떤 흙이 좋은가? 다 마찬가지로 봅니다. 무엇이든지 썩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까짓 것 뭐, 아무데나 썩어지면 어떻습니까? 돌 쪼아내서 무덤 만든다는데 돌 쪼아내서 무덤 만들면 뭐합니까? 요새 석관을 만든다는데, 석관은 돌 관입니다. 돌을 톱으로 켜가지고 그 돌로 관을 짜서 거기다 넣는 것입니다. 상당히 비쌀 것 같습니다. 몇 백 만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석관에 장사하면 또 뭐합니까? 거기 넣어도 썩어질 것인데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관을 짤 때, 보통 한 치(한 치는 3.33 cm) 두께로 하는데 화장할 거면 오 푼 반(약 1.83cm, 한 푼은 한 치
의 1/10) 두께로 하고, 어떤 사람은 칠 푼 반(약 2.5cm) 두께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보다 더 두껍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치(6.66cm)짜리도 있답니다. 두 치 하면 얼마나 두껍습니까? 두 치면 아주 두꺼운 건데 그런 판자로 관을 짤게 무엇입니까? 이것도 썩어질 것인데, 괜히 관 두개 만들 것을 하나 밖에 못 만들고, 남의 관도 못 만들게 만들고, 그 사람만 다 해가지고 가면 되겠습니까? 통나무 쪼아내 가지고 속을 파가지고 만든 통과무 관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천당 가는 것이 중요하지, 영혼이 천당 가는 것이 중요하지, 시체 썩어질 것 아무데에서나 썩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다 무슨 돈을 많이 들입니까. 많이 들일 필요 없습니다. 
우리 수원에 신학교 땅자리에 있는 무덤을 파는데 약 두 치 두께의 관쯤 될 것 같은데, 두꺼운 판자로 관을 짜 넣은 관 여러 개 있었는데 파보면 다 썩어지고 없었습니다. 뼈다귀 조금 있는 것, 머리뼈 조금 있는 것, 다 없어진 것 등, 하나도 없고 두 치 관에 들어가도 다 썩어지고 없어진 것입니다. 관도 다 썩어지고 마찬가지입니다.또 무슨 지관(地官)이라고 와 가지고 나침반을 놓고 방향 보느라고 와서 그럽니다. 방향 보면 무엇 합니까? 아무 방향이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괜히 쓸데없는 일들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돈 좀 벌어먹느라고 지관들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거 지관하기 쉽습니다. 책 한 권 사다놓고 조그만 책하나 사다보고 그것을 한 달쯤 공부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괜히 그런 사람 데려다가 돈 줄 필요 없습니다. 천당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고 무덤은 아무데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바위 속에 판 자기 무덤, 돈을 상당히 많이 들인 것 같습니다. 바위를 정으로 쪼아내 가지고 무덤을 시체 들어갈 만치만 해가지고 이다음에 자기가 장사하려고 그랬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몇 천만 원 들였을 것입니다. 
6천만 원, 어떤 사람은 6억을 들여서 자기 무덤 해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말입니다. 6억을 들여서 잘 해 놓고 관은 무슨 관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무덤 환경을 잘 해 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빨리 죽어야 되겠어요. 아니, 6억 가지고 나라건설을 위해서 쓰고 하나님 위해서 써야지, 하나님 모르는 사람 같으면 나라 국가를 위해서 썼으면 나라가 얼마나 잘 되겠냐는 말씀입니다. 나라가 잘 되어야 자기 자신도 잘 되지, 나라 망하면 자기도 그 무덤도 그것으로 되겠습니까?

무덤자리는 어떤 무덤자리가 좋으냐 하면 이 다음에 개간할 수 없는 데가 좋습니다. 이전에 어떤 목사가 좋은 곳에 무덤을 했다고 해서 가보니까 좋지 않았습니다. 평평한데 조그만 어느 산 위에다 묘를 썼는데, 그런 곳은 이 다음에 반드시 개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 말 해주려다가 좀 파기 전에 했어야 되겠는데 가니까 다 파 놓았습니다. 언제 뭐 옮길 수 있겠습니까? 이 다음에 개간하게 되면 파낼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무덤자리는 이 다음에 거기다 밭을 해먹던지 집을 짓던지 무엇을 하지 못할 데, 경사가 좀 급한 데가 좋습니다. 아예 그런데는 해 먹을 수 없잖습니까? 그런데 갖다 해야 됩니다. 그래야 어디 개간하게 되면 몇 백 년 후에 개간하게 되어 뼈다귀 나오게 되면 ‘여기 뼈다구 하나 있다’ 하면서, 개 뼈다귀 내버리듯 구덩이에다 내다 버릴 것입니다. 이제 개간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옛날 미아리 공동묘지 있었는데. 제가 장례하러 미아리 여러 번 갔습니다. 명륜 교인들 장례하러 여러 번 갔는데 요새 가 보면 전부 동네가 되었습니다. 집이 가득합니다. 무덤 다 어디 갔습니까. 무덤 수백 개, 수천 개 있었는데 다 어디 갔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집 지으려고 파면 뼈가 더러 나온다고 합니다. 나오면 집어 내 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넣고 하는 것입니다. 미아리 공동묘지 좋았었습니다. 자리가 편평하고 또 산이 조금 있고 좋았습니다. 그러한 곳
은 집짓기 좋은 데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곳에 장사 지내도 이 다음에 개간하여 집 다 짓게 되면, 뼈다귀 다 집어 내버릴 날이 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들어가려고 돌을 쪼아서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니, 상당히 정성을 들였고 돈도 많이 들였고 또 애착심도 많았을 것입니다. 자기 살았을 때 있는 곳과 같이 거기 죽어서 간다고 애착심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돈을 들였을 것인데, 그것을 아낌없이 주를 위해서 바치는 일, 이것은 귀한 것입니다. 아마 집 한 채 값이나 들여야 그 무덤 준비했는지 모릅니다. 이다음에 자기 들어가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자기 들어가려고 이렇게 돈을 많이 들이고 좋은 자리에다 애착심을 들여서 잘해 놨는데 이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바치는 것, 사실 이것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 상당히 귀한 일입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이다음에 자기가 사용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집과 같습니다. 자기 집, 자기 사용할 것. 자기를 위해서 많은 돈 들이고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을 테고, 아마 자리도 좋은데 잡았을 것 같습니다. 그땐 뭐 좋은 자리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좋은 자리 잡았겠지 안 잡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주를 위해서 필요할 때에는 아낌없이 바쳤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필요하실 때는 아낌없이 바치는 것, 이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그 무덤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이 다음에 죽으면 무덤 또 생기겠지 안 생기겠습니까? 

주께 필요할 때에는 아낌없이 바치는 생활, 무덤이 자기 집과 같은데, 집도 아낌없이 주가 필요할 때는 바치는 생활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자기 집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 많습니다. 나귀 바친 사람 있죠? 예수님 예루살렘에 타고 올라가실 때에 나귀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그거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나귀도 하나님께 상달된 거고 이 무덤도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겁니다. 하늘나라 가면 이것에 대해 복 받습니다. 상급이 될 겁니다. 하늘에 쌓
아 둔 것입니다. 자기가 들어갔다면 다 썩어지고 말건데 예수님에게 사용됐기 때문에 하늘나라에까지 상달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에 놓고 갔습니다.

4.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함 

본문 61절에,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고 했는데,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서 앉았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신앙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하고 그러니까 십자가 못 박힐 때에도 멀리서 바라보고, 장사한 다음에도 무덤을 향해서 앉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62-64절에,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라고 했는데,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못 박혀서, 토요일 안식일(동시에 유월절), 그리고 다음날 주일날 부활하십니다. 따라서 금요일 날은 예비일이고 그 예비일 이튿날은 토요일 안식일 날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수비대를 보내서 왜 지키라고 했습니까?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고 살아났다고 할까봐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속에는 무슨 생각이 좀 더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이 도적질 할까봐 지키라고 그랬는데 속에 또 다른 생각이 좀 더 있었을까요? 이것이 전부일까요? 다른 생각이 좀 더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이겠습니까? ‘진짜 살아나면 어떻하겠나?’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살아나시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빌라도에게 할 수는 없고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난다’ 그랬으니까, 수비대를 보내서 지키게 해달라고 그랬던 것입니다. 하여튼 겁나는 것이 있어요. 살아날까봐 겁나는 것이 좀 있습니다.

본문 65-66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고 했습니다.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고, 파수꾼이 그 무덤 밖에서 지켰습니다. 그 파수꾼이 무덤을 지키는 일, 예수님 부활하면 안 되겠으니까 부활 못하게 하려고, 만일 살아나면 다시 죽이라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돌에다가도 인봉을 했습니다. 인지를 갖다가 붙였습니다. 돌을 떼기만 해도 알도록 한 것입니다. 처벌한다는 것입니다. 인봉 떼면 처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되었겠습니까? 부활하는데 지장이 되었겠습니까? 파수꾼이 지키고 있는 일, 또 부활하면 다시 죽이려는 세력, 로마 정권의 힘을 가지고 인봉한 일, 그거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지장이 되었습니까? 지장이 못 되었습니다. 도리어 유익이 되었습니다. 왜 유익이 됐느냐? 그 파수꾼들이 예수님 부활할 때 뒤로 나가 자빠지지 않았습니까? 없던 것 보다 낫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서 무엇이라고 증거 했을 것 같습니까? “아! 진짜 살아났다고, 우리가 다 봤다고, 우리가 다 죽을 뻔 하였다”고 증거 했을 것입니다. 그 인봉한 것, 로마 정권의 권세를 가지고 인봉한 것, 그 인봉 다 떼 치우고 돌을 다 굴려 놨으니까, 인봉한 것이 오히려 돌을 굴려 낸 확실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막는 일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오히려 이용당해서 하나님의 일을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막는 일, 사람이 방해하는 일이 있을 때, 믿음으로 나가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 하나님의 일에 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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