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야고보서 2:1-13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야고보서 2:1-13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8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누
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을 받았으므로

본문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주를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취하여야 되겠는가? 영광의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서 거룩하게 만든 사람들이므로 거룩한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일에 쓰시는 종으로 알고 대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 종입니다. 다 하나님의 사람이고 종입니다. 믿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저 사람만 보지 말고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사람으로 봐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믿는 사람은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서 거룩하게 만든 사람이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가운데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3:16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거룩합니다. 피로 값 주고 샀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쓰는 심부름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들로 성도를 대해야 됩니다. 성도를 대할 때 외모를 보고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자다, 가난한 사람이다. 인물이 잘 생겼다, 못생겼다. 젊은 사람이다, 노인이다’ 이렇게 구별하면 안 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샀고, 거룩해져서 거룩한 자이고,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인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노인이나 젊은 사람이나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화장 잘하고 온 사람이나 안 하고 온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냄새나는 사람도 있는데, 냄새나는 사람도 냄새만 맡고 더럽다 하지말고, 그 사람도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사람이다. 거룩해진 자이다. 성전이다”라고 대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이다”그렇게 알고 취급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냄새나지 않도록 하고 다녀야 합니다. 좀 자주 세탁을 하고, 목욕도 자주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근처에 오면 냄새 안 나게 하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향수 뿌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향수 뿌리고 다닌다고 뭐 더 알아주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에 무슨 향수 다 갖다 뿌리고 다녀도 아름다운 향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서 거룩해진 것과 하나님의 성전인 것, 하나님이 쓰는 종, 그것이 아름다운 향기지 무슨 세상 향수 좀 뿌리고 다닌다고 해서 그게 무슨 아름다운 향수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됩니다. 예수님 믿는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만 진짜 향기입니다.

본문 2-4절에,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교회에 어떤 사람이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더러운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를 돌아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하고 좋은 자리로 인도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저희들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저희 끼리 외모를 보고 구별하여, 속은 못 보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것도 못 보고, 거룩해진 것도 못 보고, 하나님의 성전도 못 보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것도 못 보고,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된 것도 못 보고 그저 외모로만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속사람을 봐야지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그것은 죄입니다. 악한 생각을 가지고 저희끼리 구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택해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본문 5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택해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너는 어찌하여 가난한 자를 멸시하느냐는 말입니다. 약속하신 나라를 가난한 사람에게 유업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부자에게도 물론 복음을 전파하지만 그들은 잘 받지를 않습니다. 속에 부귀영화가 가득해서 복음이 안 들어가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런 게 없기 때문에 천국복음을 전하면 대개 단 마음으로 받고 그대로 믿게 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데(마 19:23-24), 하나님의 복음은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고 부자는 알아주는데,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고 했듯이 부자가 믿음이 없고 핍박을 합니다.

본문 7절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부자는 믿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혹시 예수 믿고서 부자 되는 사람이 있으나 부자로써 믿는 사람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모로 사람을 알아주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믿음은 안보고, 속사람은 안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것은 안보고, 외모로만 알아주고 높여주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부자 하나가 들어오면 장로감이 들어왔다고들 합니다. 그러다가 한 육 개월 있으면 세례주고, 그 다음에 집사 세우고, 한 몇 년 있으면 장로로 세웁니다. 하여간 유명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몇 년간 있으면 대개 다 장로로 세웁니다. 돈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헌금을 많이 하기 때문에 예배당은 크게 지을 수 있지만, 돈 많은 것만 본다면 나중에 교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헌금 많이 내서 예배당 짓는 것을 생각지 말고, 참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참 교회를 세우려면 장로를 세울 때에도 돈 많고 아름다운 옷 입은 권세 많은 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우면 안 됩니다. 권세가 있든지 없든지,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그저 믿음하나만 보고 세워야 합니다. 신앙중심, 예수중심인 사람의 즉, 하나님께 대한 희생 봉사하는 것을 봐서 직분을 세워야 교회가 바로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부자를 표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을 표준으로 하는 교회가 되면 교회를 망치고 맙니다. 그 다음은 사탄의 회가 됩니다. 또 율법주의다 뭐다 해서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을 훼방하고 핍박을 하게 됩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라 하셨으므로

본문 8-9절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최고의 법입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가 최고의 법인데, 이것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할 때에, 먼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 몸과 생명과 재산과 마음을 전부 바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됩니다. 그저 이웃사랑하면 안됩니다. 이웃사랑하기 전에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 몸과 마음과 생명을 바치고 그 다음에 이웃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
해야 됩니다. 이렇게 안하면 인본주의의 사랑이 되기 때문에 그만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다가 죄짓고, 사랑하다가 믿음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할 때에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고, 또 자기 몸과 마음과 생명과 재산과 일생을 바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법입니다. 이렇게 해야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그건 죄를 짓는 것이라서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하나가 됩니다. 사랑하는 말이나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상대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게 만들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줄 알게 인사도 친절히 하고, 부부간에도 서로 소가 닭 쳐다보듯 하지 말고 서로 말 한마디라도 사랑함으로 잘해주어야 합니다. 속에 있는 사랑을 나타내는데,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오래된 신자나 초 신자나 다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말고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 주신 것을 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에 사람이 들어오면 어떤 사람은 대접을 잘하지만 어떤 사람은 대접을 안 해주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가 최고의 법이라고 하셨는데(막 12:31), 모든 사람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처음 오는 사람을 본체만체 하지 말고 잘 대접해줘야겠습니다. 
창광교회에 처음 나온 노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 교회 처음 나올 때에 상당히 기뻐했습니다. 감사해서 눈물을 다 흘리곤 하였습니다. 한 5-6개월을 나온 것 같은데 그러다가 안 나옵니다. 이유를 물으니 몇 달을 교회에 나와도 자기에게 친하게 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랍니다.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잘 찾아서 인사도 하고 대화도 했었다면 그런 사람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을텐데, 우리가 서로 친하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인사하고 어울리니까 처음 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차별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나온 사람만 사랑해주는 것도 안 됩니다. 그러면 원래 있던 사람들이 시험들 수 있습니다. 다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2. 율법에서 하나를 범해도 다 범한 것임

본문 10-11절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계명이 모두 몇 개입니까? 열 개입니다. 그중에 한 가지를 범하면 다 법한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등, 열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자가 됩니다.

고리 열 개를 꿰어가지고 둥그렇게 만들어 놨다고 합시다. 그것을 못에 걸어놨는데 어느 고리든지 하나만 끊어지면 못에서 떨어집니다. 첫째가 끊어져도 떨어지고, 둘째가 끊어져도 떨어지고, 다섯째가 끊어져도 떨어지고, 일곱째가 끊어져도 떨어지고, 여덟째가 끊어져도 떨어지고, 이렇게 하나만 끊어지면 다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십계명 지키다가 하나 범하면 다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자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계명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계명을 못 지키면 지옥에 간다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율법을 폐한다고 했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구원받으려고 율법을 지키는데, 믿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영의 법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두려워서 지옥 갈까봐 억지로 지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율법을 지키지만, 감사함으로 자유의 법으로 지키기 때문에 즐거움으로 자유스럽게 지킵니다. 억지로 쫓겨날까봐, 매 맞을까봐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율법을 범하면 죄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나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이고 또 순종하다가 부족한 것이 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죄 지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노하시고 징계하시고, 죄 지으면 쫄딱 망합니다.

골로새서 3장 5-6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죄를 짓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에베소서5:6절에,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에,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음행죄가 들어왔는데, ‘음행하는 자는 사탄에게 내어 주었으니 육신은 쫄딱 망하고 영혼만 주의 날에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었으니까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쫄딱 망하고 영혼만 겨우 구원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3:15절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되 불붙는 집에서 벌거벗고 후다닥 뛰어 나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 받아 놓았으니 절대 지옥 가지 않고 살긴 살았는데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한쪽 구석에서 벗은 채로 있습니다. 벌거벗은 그런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구원은 구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은 받긴 받았는데, 예수 믿어도 믿음을 지키지 않고 죄만 짓고 나가고 전부 자기를 위해서만 했습니다. 연보도 자기를 위해서하고, 또 자기를 위해서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위해서 한 것은 전부 불타 버렸습니다. 하늘나라에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만 딱 남습니다. 아버지께서 심은 것, 아버지를 위해서 한 것만 남습니다. 자기 위해서 한 것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합니다. 합격이 못 됩니다. 일생동안 했어도 자기 위해서 예수 믿고, 자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하고, 교회에서도 자기 위해서 일 한 것은 전부 불에 타서 없어집니다.

빌립보서 2:21-22절에,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다 자기를 위해서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였는데, 다만 디모데만은 그렇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를 위해서 일합니다. 자기 명예 영광을 위해서, 또는 먹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목사들이 자기를 위해서 하는지 주를 위해서 하는지 뭘 보고 알 수 있습니까? 희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들에게 좋은 데 가라고 하면 누구든지 좋아합니다. 그런데어려운 곳으로 가라고 하면 다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자 하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을 보면 압니다.

3. 자유의 율법으로 계명을 지키게 됨

본문 12절에,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습니다. 자유의 율법은 ‘영이 자유하는 율법’으로서 최고의 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의 자유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법대로 너희가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영의 자유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영이 자유하는 법입니다. 영의 역사를 따라가는 법이고 영이 원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이 편안한 법, 영적 생명에 맞는 법이 자유의 율법입니다. 영적 생명에 맞지 않으면 영의 법이 아닙니다. 영적생명에 맞으면 영의 법입니다. 자유의 법대로, 영의 자유하는 법대로, 영적 생명에 맞는 법대로 살아야 됩니다. 영의 자유가 없는 법은 영의 법이 아닙니다. 영의 자유의 법이 아닙니다. 영이 자유해야만 영의 자유의 법입니다. 이제는 계명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자유의 법 때문에 못합니다. 계명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자유의 법 때문에 합니다. 계명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자유의 법대로 하다보니까 계명이 다 지켜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영의 자유입니다. 또한 말씀 지키는 것이 영의 자유입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다보니까 말씀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다보니까 하나님을 잘 공경합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다보니까 우상을 안 섬깁니다. 주일날을 잘 지킵니다. 주일 범하는 것은 영의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 지키는 것이 영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다보니까 부모를 잘 공경합니다. 간음하니까 영의 자유가 없고 영이 구속받습니다. 그러나 영의 자유대로 하다보니까 간음하지 않습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니까 살인하지 않습니다. 도적질 하지 않습니다. 거짓증거 하고 보니까 영의 자유가 없습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니까 거짓증거 하지 않습니다. 탐내면 영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자유대로 하니까 탐내지 않습니다. 믿기 전에는 “법으로 해라. 율법이다. 이렇게 하라”고 했지만, 이제 예수 믿은 다음부터는 무슨 법으로 합니까? 영의 자유의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영의 자유의 법대로 살다 보니까 계명이 다 지켜졌습니다. 영의 자유의 법대로 하면 계명을 다 지켜집니다.

영의 세계에 살지 못하는 사람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영의 세계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여야 이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다 보니까 기도하러 갔습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다보니까 십일조 했습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려니까 우상의 제물을 안 먹었습니다. 순종 안하니까 영의 자유가 없습니다. 영의 자유대로 하려다보니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의 자유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의 자유의 법대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편안합니다. 영의 자유의 법대로 살면 편안하고 참 좋습니다. 기쁘고 즐거움이 충만하고, 생명의 역사가 있고 하늘 문이 열리고, 영의 법대로 사니까 형통하게 되고, 언제나 영의 자유의 법대로 심판 받을 것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합니다.

자유의 법은 긍휼의 법입니다. 법에는 세상법, 도덕법, 율법, 자유의 법이 있는데 우리는 자유의 법 곧 긍휼의 법에 따라 판단 받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도덕법대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있는데, 우리가 그 율법에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에 의해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뛰어 넘어 긍휼의 법, 자유의 법에 의해 판단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의 법과 자유의 법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4.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옴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살아야 함

본문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 있어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받으며 하나님의 심판도 받지 않게 됩니다.

사람에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이 임하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설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하는 것인데, 그 앞에서 심판받지 아니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풉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사랑의 세계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 공의의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디모데전서 1:9-10절에,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1:5-7절에,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긍휼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긍휼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벌써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공의의 심판은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공의의 심판은 안 받습니다. 그럼 무슨 심판을 받습니까? 행한 대로 갚아주는 심판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행한 대로 상 받는 심판을 받지만, 공의의 심판은 안 받습니다. 공의의 심판을 받으면 지옥 갑니다. 한 사람도 그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남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그릇이 자라남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행해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살아야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자랑합니다. 마태복음 7:1-2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받을 비판은 하나님의 비판입니다. 하나님께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비판하면 안 됩니다. 긍휼의 하나님께 헤아림을 받지 않으려면 남을 헤아리면 안 됩니다. 남을 저울질한 그대로 자기도 저울질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잰 그 자로 우리가 잼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사람에게 베푼 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이 긍휼의 법인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겼으면 하나님도 우리는 긍휼히 여겨주실 것이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 그 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살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사는 증거입니다. 베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눠주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옵니다. 나눠주면 더 많이 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눠주면 그릇이 커집니다. 긍휼의 그릇이 커지면 거기에다 하나님이 더 많이 주십니다. 또 그 많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면 또 그릇이 커지고, 더 큰 그릇에 하나님의 긍휼이 더 많이 오고 더 많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면 그릇이 보다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긍휼의 그릇이 점점 커나가는 것인데 그것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이 커가는 것이 영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안 나눠주면 하나님의 긍휼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긍휼의 그릇이 커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누가 손해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안 나눠주면 다른 사람이 긍휼을 못 받는 것보다 자기가 하나님의 긍휼을 못 받는 것이 더 손해입니다. 또한 자라나지 못했으니까 손해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좀 베풀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나눠줄까? 도와줄까?’하며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베풀어 줌으로서 많아지는 나라입니다. 주면서 많아지고, 주면서 커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눠줘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점점 더 그리스도의 사랑이 많이 오고 자기도 그만큼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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