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고린도후서 5:1-10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으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으라
고린도후서 5:1-10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9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5:1 만일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5:2 우리는 이 장막 안에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5:3 우리가 그것을 덧입음으로 벗은 자들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5:4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으려는 것이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이다. 

5:5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안다.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5:8 우리가 담대하여 더욱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5:9 그러므로 우리는 머물러 있든지 떠나있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5:10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자가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일에 따라 보응을 받을 것이다. 

1.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

본문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라는 것은 육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 위에 있는 장막집입니다. 육신의 장막 집은 반드시 무너질 날이 오는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 가고, 장막 집은 무너져서 장례하고, 장례해서 땅에 들어가서 썩어지든지 화장해서 연기가 되든지 물에 빠져서 물이 되든지 하여간 다 무너져서 없어집니다. 그랬다가 마지막 날,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다 부활합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집을 지어놓고 우리가 그리로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는 날 우리의 영은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곳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입니다. 문은 진주 문이고, 생명수가 강같이 흘러내려가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나라입니다(계 21:21, 22:1). 하나님의 나라에는 예수님이 계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직접 바라보면서 그 앞에서 찬송을 부르고, 경배를 합니다. 

우리의 중생한 영이 육신의 장막 집을 쓰고 살다가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집으로 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늘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으로 결국은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이면 육신의 장막 집은 무너질 것이고, 이제 하늘에 있는 집이 우리의 살 집이고, 참 본향입니다.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막 집 쓰고 사는 기간은 하늘나라에 갈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2. 육신의 장막 집에 사는 동안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어 갈 것

본문 2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장막에 있는 동안에 탄식을 하는데 무엇 때문에 탄식을 한다고 하였습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어 가려고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땅 위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막 집에 있는 동안에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세상 떠나기 전에 할 것이 있는데, 그 할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많이 덧입어 가지고 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장막 집에 거하는 동안에 할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공로로 거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도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많이 덧입고 가는 사람과 덧입지 못하고 가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하늘나라에는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많이 덧입고 가는 사람은 큰 자이고, 덧입지 못하고 가는 사람은 작은 자입니다.

영이 많이 자라나기를 힘쓰라

마태복음 5:19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행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됩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 같은 게 아닙니다. 같다고 하면 그것은 불공평입니다. 즉 일생동안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다 지키고 간 바울과, 일생동안 죄만 짓다가 죽을 때에 회개하고 죽은 사람과 같다고 하면 불공평입니다. 영이 많이 자라나서 간 사람과 영이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아이 상태로 간 사람과 어떻게 같겠습니까? 자라났으면 자라난대로 가고, 못자라 났으면 못 자라난 대로 갑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도 자라나지 못한 어린아이의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또 히브리서 5:13-14에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젖을 먹는 자는 어린아이니”라고 하였는데,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장성한 자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장성한 자가 있고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젖으로 먹이는 것은 모든 성경을 초보적인 신앙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즉 초보적인 입장에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젖이고, 단단한 식물은 좀 깊은 진리입니다.
어린아이는 단단한 식물을 잘 못 먹습니다. 젖만 먹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젖만 먹으면 안 되고 단단한 식물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 게 젖으로 해석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좁은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젖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로 해석을 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라고 초보단계로 해놓고,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죄를 지으면서 술 마시며 음란 방탕하고, 또 싸우고 다투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입니다.

이전으로 말하면 신사참배하면서 예수를 믿은 사람, 요새로 말하면 제사하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또 주일에 결혼식장에 가고, 음식 사먹는 것 등 성경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주일을 잘 지킵니다. 주일에 무엇을 사지 않습니다. 또 술을 마시지 않고, 방탕하지 않고, 경건하게 삽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키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것이고, 말씀을 안 지키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단단한 식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좁은 길로 가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요새 교회들이 단단한 식물을 먹여 주지 않고 젖을 먹여 주기 때문에 교인들이 넓은 길로 가는 가운데 있습니다. 별짓 다하고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마지막에는 가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쫄딱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오고, 하늘나라 갈 때에는 불붙는 집에서 벌거벗고 나온 것과 같은 그런 구원을 얻게 됩니다. 

노아 방주의 해석에 있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노아의 방주에 탄 것이다, 안 믿는 사람은 노아의 방주에 안 탄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젖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즉 초보적인 계단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로 해석을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방주를 준비해야 된다,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만들어야 된다, 즉 자기 실력을 만들어야 된다,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방주를 짓는 것처럼 신령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받아
서 자기의 영적 실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홍수와 같은 대환난이 올 때에 승리적으로 환난을 발로 밟고 통과하는 것이다”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즉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입니다. 젖으로 먹이면 힘이 안 납니다. 방주를 다 탔으니까 이제는 뭐 할게 없지 않는가? 또 좁은 길로 가니까 할 게 뭐있는가? 합니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을 먹으면 할 게 많습니다. 말씀대로 자기를 잘 만들어야 방주를 예비하는 것이고, 또 앞으로 올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달음박질을 잘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힘이 나고 또 할 것이 많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 입으라
 
본문 3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라는 것은 의와 진리와 거룩입니다. ‘하나님을 따라’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의와 진리와 거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즉 새사람, 하나님의 신적인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기 위해서 탄식을 하면서 간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탄식을 한다고 했습니까? 짐 진 것처럼 탄식을 합니다. 벗어 놓으면 안 됩니다. 지고 나가야 합니다. 책임을 지고 어떻게 하든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려고 하는 그것을 짐 진 것처럼 탄식을 하며 나가야 합니다.

1) 의를 이루라 

의는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의를 위해서 하려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의를 잘못 택해서 나갈 때가 있지만 의를 위하려는 마음은 다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대동아전쟁을 일으켜놓고 중국을 침략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불의를 친다’는 표어를 내세웠습니다. 공산당들도 옳지 않은 것을 고친다고 표어를 내걸고 공산당 운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지만, 자기네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의를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제가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물으니,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를 위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죽기까지 복종해서 의를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의는 천하보다 귀하고, 하늘나라 가서도 의가 상당히 가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에 보면,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의’ 하나가 그만큼 귀하다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팔복에도 넷째가 ‘의’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옳은 것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옳은 것이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양심을 써야 의가 이루어집니다. 또 성경말씀을 순종해야 의가 이루어집니다. 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이고, 또 진리를 받아가지는 것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서 자기 생명으로 삼고, 그대로 실행을 해서 진리대로 자기 생활을 하고 자기 인격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2) 거룩하게 구별되라 

그 다음은 거룩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한다는 뜻이 있는데, 속된 것, 더러운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거룩, 거룩, 거룩, (계시록4:8) 지극히 거룩하시므로 세 번 ‘거룩’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거룩은 죄에서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서 멀리 떠나계십니다. 거룩을 이뤄나가려면 우리도 죄에서 멀리 떠나야 합니다. 죄가 근처도 못 오게 해야 됩니다. 불의에서 멀리 떠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을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거룩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

3) 부활의 능력과 지식을 받으라 

그 다음에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려고 바울이 상당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점점 받아서 자기가 모든 지식을 바로 갖는 것입니다.
지식을 바로 가지지 못하면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말하면 다섯 가지입니다. 의, 진리, 거룩, 능력, 지식, 이 다섯 가지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입으려고 상당히 애를 썼습니다. 입으려고 애를 쓴 이유가 3절에 나오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로마서 13:14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즉 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라 하는 뜻입니다.

5) 새 사람을 입으라 

또 에베소서 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쫒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가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가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인 “의, 진리, 거룩, 지식, 지혜, 능력, 사랑, 선”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또 독립성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만 의뢰하고 독립적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독립성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무한성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성도의 영이 무한이 자라나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성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변성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영이 자라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이 자라나는 것만큼 완전해 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아서 가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면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갑니다. 

6) 거룩한 세마포를 입으라 

요한계시록 19:8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마포를 입고 하나님 앞에 가는데 세마포는 성도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의를 많이 입어서 가야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입어서 가야 합니다. 즉 달란트 장사를 잘해서 배나 달란트를 남겨서 가야 됩니다. 이것을 잘하고 가면 처소
를 많이 덧입어서 가는 것이고, 이것을 잘못하고 가는 것은 처소를 덧입지 못하고 가는 것이며 벌거벗고 나온 것과 같은 구원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공력이 다 불타도 구원은 받습니다. 그것은 터가 바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사람과 다 불타 없어진 사람은 영광이 다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많이 입는 사람은 금, 은, 보석으로 짓는 사람입니다. 입지 못한 사람은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짓는 사람입니다. 다 벌거벗고 자다가 “불이야” 할 때 나와서 죽지는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벌거벗은 모양으로 나온 사람이 가슴 쑥 내놓고 대로를 다닐 수 있겠습니까? 한쪽 구석으로 가서 쭈그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천당은 천당입니다. 다 불타고 벌거벗은 모양으로 나온 것도 구원 받았으니 천당입니다. 그러나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사람은 불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아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이렇게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세마포를 입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옷을 많이 입고 가는 사람, 예수님을 많이 닮아서 가는 사람은 세마포를 입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좀더 입어 가려고 애를 써야겠습니다. 좀더 거룩과 진실과 사랑을 입어서 가야 되겠습니다. 즉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능력의 사람이 되어서, 무한이 자라나는 사람이 되어서 가야 됩니다. 다른 것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는 독립적인 사람을 만들어서 가야 됩니다.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면서도 덧입고자 힘쓰라

본문 4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면서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하여 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짐 지고 가면 탄식합니까? 짐 지고 멀리 가 보았습니까? 나는 벼 한 가마니 지고 한 4킬로 이상 가보았습니다. 왜정말단에 일본 사람들이 벼를 도시로 날라야 되겠는데 소구루마, 말 구루마 이런 것 등을 가지고 해도 얼마 못 나르니까 사람들을 전부 동원시켜서 한 가마씩 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한 십리 길입니다. 나도 한 가마니 지고 십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한 시간 이상 걸어가야 합니다. 한 60킬로그램 되는 것을 지고 십리 길을 가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반시간 가니까 무거워지는데, 뒤에서 무엇이 매달린 것 같이 점점 더 무거워 집니다. 갈수록 무거워서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가운데서 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다 지고 갔다는 표를 받아야 됩니다. 겨우 다 갔습니다. 짐 지고 가보니까 점점 더 무거워 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안북도에서 서울 가려면 눈썹이 짐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썹도 무겁다는 겁니다. 처음에 눈썹이 뭐가 무겁겠습니까? 그래도 평안북도에서 서울 가려면 거의 천리의 거리로 거기에 가려면 눈썹도 무겁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짐 지고 가는 것처럼 탄식합니다.
즉 점점 더 책임을 무겁게 느끼면서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무슨 책임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입으려고 하는 책임을 점점 더 무겁게 느끼면서 간다는 것입니다. 처음보다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빚진 것도 그렇습니다. 빚진 것도 처음에는 그다지 무거운 짐이 안 되는데, 일년이 지나가도 못 갚고, 이년이 지나가도 못 갚고, 삼년이 지나가도 못 갚으면 짐이 아주 무거워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입는 일에 점점 더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이것을 입으려고 탄식을 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4킬로 간다고 하면 3킬로를 갔으므로 1킬로 밖에 안 남았지만, 3킬로 가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책임을 무겁게 느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라는 말은 죽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덧입고자 애를 애쓰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고자 함입니다.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죽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줄 압니까?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죽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더 꼬이고 안 되니까 콱 죽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자살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살인죄입니다. 자기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도는 덧입고자 애를 써야 하며, 오늘도 덧입어 가야 합니다. 날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으려고 애를 쓰고, 사모하면서 짐 진 것처럼 점점 더 책임을 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서 덧입고 가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어 가는 것과 사명을 다해서 달란트 장사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우는 생활을 하라

본문 4절 하반 절에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워져서 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죽을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대로 사는 것이 다 죽을 겁니다.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는 것은 영적 생활에 다 이용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육신대로 살면 다 죽을 것이고 다 썩어질 것인데, 영적 생활에 이용당하면 전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워지는 것입니다. 썩을 것이 영에게 많이 삼키워져서 하나님께 가야 됩니다. 

로마서 8:13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다 썩어질 것입니다. 육신대로 사는 생활은 다 사망 생활이고, 하나님 앞에 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중생한 영이 성령을 쫒아 행하는 생활을 하면 그것은 사는 생활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생활이 영의 생활에 삼키운 바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대로 사는 것을 영적 생명의 역사가 모두 삼켜 먹고 하나님 앞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즉 영의 생활에 육신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욕신의 소욕, 육신의 쾌락, 안목의 즐거움, 모두 그대로 나가면 다 죽습니다.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좋아하는 대로 나가는 것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한 영이 성령에 힘입어서 그것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 나가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다 죽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에 힘입어서 중생한 영이 죽을 것을 삼키면 그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삽니다.
제일 많이 삼켜 먹는 게 순교입니다. 예수를 위해 순교 당할 때는 이 육신 전체를 다 삼켜 먹어서 배가 부른 것입니다. 많이 자라나서 가는 것입니다. 영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희생하면서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순교당하는 것이 완전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한꺼번에 다 삼키우는 것입니다. 생명에게 점점 삼키워 나가므로 육신대로 사는 것이 점점 없어지고, 영으로 사는 생활이 점점 더 많아지다가 마지막에는 육신까지 삼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의 생활이 육신까지 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가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갑니다. 

순교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제일 큰 복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순교자의 반열이 따로 있고, 순교자는 아주 영광스런 자리에 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예 주님을 위해서 죽을 것을 결사각오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할까? 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죽으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워지는 것입니다. 더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십년이 잠깐이고 이십년이 잠깐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서 가면 그것은 영원이 남아 있습니다. 육신대로 더 사는 생활은 썩어진 생활이고, 사망의 생활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40세에 순교 당했다고 해 봅시다. 만일 스데반이 순교 당하지 않고 살았다면 얼마나 더 살았겠습니까? 한 40~50년 더 살겠습니까? 그래서 90세까지 살았다고 하면 50년은 더 살았을 것입니다. 50년 더 살고 죽은 것이 더 낫겠습니까? 순교당하지 않고 더 살았으면 뭐 합니까? 그러므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신앙생활을 하여야겠습니다.

곡식도 썩은 것을 많이 삼킨 곡식이 많이 자라납니다. 나무도 그렇습니다. 썩은 것이 많이 있는 곳에 있는 나무가 잘 자라납니다. 지나간 주간에 우이동에 천막치고 기도했는데 거기 나뭇잎이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 상당히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 땅을 보면 땅이 시커멓습니다. 몇 십년동안 나뭇잎이 떨어져서 썩고, 또 나뭇잎이 떨어져서 썩어 상당히 두껍게 쌓여 있습니다. 나뭇잎들이 수 년 동안 썩어진 것이 층층이 나무 밑에 계속 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라나겠습니까? 썩어진 게 많아야 잘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썩어진 것이 많이 있는데 있는 생명체가 그것을 다 삼키워 먹기만 하면 잘 자라납니다. 썩어진 것이 많이 있는데 있는 곡식은 삼켜 먹기만 하면 수가 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삼켜 먹으면 그만 같이 썩어지고 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썩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아, 나의 사는 환경은 썩어진게 많다”고 탄식하지 말고, “삼켜 먹기만 하면 수가 난다, 좋은 때가 왔다”하며 잘 삼켜 먹어야 합니다. 삼켜 먹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이기고 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가 사는 환경이 마귀의 역사가 많고, 시험이 많고, 전부 다 썩어진 것만 있다고 할지라도 “야! 이것 삼켜 먹기만 하면 수가 난다”하며 삼켜 먹기만 하면 쑥쑥 자라납니다. 잘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못 살겠다”고 하지 말고, 잘 삼켜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썩어진 게 많아도 그것을 잘 삼켜 먹기만 하면 쑥쑥 자라납니다. “삼켜 먹자!”하며 바짝 힘을 써서 말씀대로 힘 있게 나가면 점점 그것이 전부 다 자기 영양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풍랑에 의해서 더 빨리 가는 것입니다. 더 많은 썩을 것으로 인해서 더욱 더 힘 있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삼켜 먹고 가는 생활, 이것을 많이 해가지고 가야 합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겠다는 소망을 가지라

“살 것과 죽을 것” 두 사이에 끼였는데, 바울은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까?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빌 1:23-24). 이것이 진짜입니다. “한 쪽에는 살길, 한 쪽에는 죽을 길” 양통입니다. 이리로 가도 좋고, 저리로 가도 좋은 것입니다. 즉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은 것인데,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게 더 좋다고 하였습니까? 그것은 주와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신랑과 같이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신부가 친정집에 있는 것도 좋고 또 결혼해서 신랑 집에 가는 것도 좋다면 어떻게 하는 게 더 좋겠습니까? 떠나서 신랑한테 가서 사는 것이 더 좋단 말입니다. 나이 어린 신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친정집을 안 떠나겠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신부는 “아, 내가 떠나서 신랑 집에 가서 살아야 되겠다”하고, 신랑 집에 갈 생각을 하며 짐을 다 싸놓습니다.

우리도 지금 신랑 집에 가려고 하는데, 떠나서 가는 게 좋지 안가는게 무엇이 좋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소원을 늘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안 떠나가려고 하는 것은 미숙한 겁니다. 떠나기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너무 유치하고, 너무 철부지인 것입니다. 뭐가 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욕망을 더욱 더 간절히 가지고 나갔습니다. 우리도 그런 신앙에 서야겠습니다.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대로 심판 받을 것을 알라

또 하나님 앞에 가면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면 공심판은 안받습니다. 공심판은 죄가 있으면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공심판입니다. 하나님의 공법에 의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공법에 의할 때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은 안받습니다. 그러나 사심판은 받아야 됩니다. 즉 상을 받고 못 받는 것으로, 믿는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갈 때에 벌거벗은 것과 같이 자기 정체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납니다. 자기가 행한 것이 낱낱이 하나도 숨김없이 벌거벗은 것과 같이 나타납니다. 그 때에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듯이 우리의 행한 것이 낱낱이 나타날 것인데, 그 때에 행한대로 상을 받습니다. 행한대로 다 나타나기 때문에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3.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할 수 있음

본문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령의 감동,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서, 그것을 이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자기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죽을 것을 다 생명이 삼켜 먹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4. 믿음으로 육신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함

그 다음 7절에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세상 것으로, 세상 이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이루어 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중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것을 취하려 하느냐고 물어보면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을 가질 것이냐고 물으면, “사는 것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떠나면 주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살면 주님을 아직 못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 예수님하고 따로 사는 것입니다.

신부에게 “너 시집가서 살겠느냐, 친정에 살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면, “시집가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친정집을 떠나기 싫다고 하는 것은 아직 자격이 안 된 것입니다. 아직도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시집갈 자격이 없습니다. 바울의 신앙은 신부가 친정집을 떠나서 신랑 집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날까봐 벌벌 떨고, 떠나지 않기를 원하지만,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다 같이 바울처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라고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자 되기를 힘쓰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욕망을 가졌으니까 그런즉 이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가 기뻐하실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 순종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기뻐합시다.

5. 무엇을 입었는지 심판대 앞에 드러남

본문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납니다. 한 번 죽고 심판 받는 것은 정한 일입니다. 공심판은 성도가 안 받습니다. 공심판은 지옥가고 천국가는 심판인데, 성도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공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천당을 받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서는 성경대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를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습니다. 성경대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성경대로 만들어졌느냐, 못 만들어졌느냐?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 이것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심판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는 의, 진리, 거룩, 능력, 지식, 다섯 가지인데, 그대로 다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 심판받아야 됩니다.

다 심판받게 됩니다. 선악 간에 각각 몸으로 행한 것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받으려 한다고 했는데, 이 ‘의’가 큰 것 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심판대 앞에 갈 때에 얼마나 했는지, 성경말씀에서 행하지 못한 게 얼마인지 드러납니다. 알고도 행하지 못한 것은 매를 더 맞는다고 했습니다. 성경대로 선악 간에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했습니다. 

육신으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인데, 육신의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야 합니다. “죽을 것이 얼마나 생명에게 삼키어져서 왔느냐?”하고 선악 간에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얼마나 덧입었느냐?”라고 선악 간에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 갈 때에 각 사람에게 다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 심판대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다 심판대 앞에 드러나서 행한 것을 따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회개하고, 더러운 것은 벗어버리고, 육신대로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서 죽을 것이 생명에게 많이 삼키워져서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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