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8일 수요일

로마서 7:6-15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로마서 7:6-15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6 지금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의식법 문자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않는다. 

7:7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나는 죄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니, 율법이 "탐내지 마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7:8 그러나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일으켰으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다. 

7:9 전에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계명이 이르자 죄는 살아나고 

7:10 나는 죽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7:11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 

7:12 이렇게 보면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7:13 그러면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죄가 그 선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게 사망을 가져왔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더욱 죄 되게 하려는 것이다. 

7:14 우리는 율법이 영적인 줄 알지만 나는 죄 아래 팔려 육신에 속해 있다. 

7:15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알지못하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1. 의문과 제도에서 벗어나라

우리 교회는 전체가 다 찬양대입니다. 찬양대원들이 몇 십 명 보다 몇 백 명이 나을 것이고, 몇 백 명 보다 교인 전체가 찬양대가 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육신의 음성 좋은 것으로 노래 부르는 것보다 신령한 새 노래로 부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음성이 좋다고 하여 믿음이 없는 사람을 찬양대에 세워 놓으면 도리어 남에게 손해만 줍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새 노래를 기뻐하시지, 믿음 없이 목청이나 좋다고 해서 부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할머니들이 찬송을 부를 때에 곡조가 틀려도 믿음으로, 신령한 노래로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청 좋은 사람일지라도 믿음 없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영으로 부르지 못하는 찬송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못 됩니다. 영으로 부르는 찬송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노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의문과 제도, 의식 등에 치우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강대상은 제단이 아닙니다. 강대상은 책을 놓고 보는 곳입니다. 그런데 강대상을 제단화 시켜 벌벌 떨면서 감히 올라오지도 못합니다. 강대상에 올라가 앉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책을 놓고 보는 곳인데 왜 못 올라갑니까? 강대상은 신성불가침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 제단을 쌓을 때에 돌을 갖다가 쌓은 후, 거기에다 제물을 갖다 올려놓고 제사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의문이라는 말입니다. 요새 제단이라고 하면 강대상이 제단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모여서 찬송 부르고, 예배드리는 것이 제단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 영적 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의문과 제도를 폐하여야 합니다. 거기에 얽매여서는 신앙이 바로 되지 못합니다. 또 요새 교회에서 각종 의문(儀文)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지나간 주일은 어머니 주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어머니 주일이 있습니까?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 주일은 다 집어치워야 됩니다. 또 꽃 주일, 어린이 주일 등도 다 집어치워야 합니다. 주일은 예수님 주일입니다. 예수님 주일이 일년에 쉰 두 번이 있는데, 어머니 주일, 꽃 주일, 어린이 주일 등이 다 빼앗아 갔습니다. 주일은 언제나 예수님의 날이지, 사람의 날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은 늘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날만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문과 제도에서 다 벗어나야 됩니다. 또 가운을 입고 예배시간에 나와 설교하여야 은혜가 됩니까? 가운을 입고 예배를 거창하게 드린다고 해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헛된 것입니다. 가운을 입지 않았어도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것, 의식적인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그저 의복이라는 것은 어떻게 입어야 되나? 다른 사람에게 실례가 안 되도록, 즉 예의가 되도록 보통으로 중쑬쑬하게 입어야 됩니다. 너무 두드러지게 입지 말고, 그렇다고 또 너무 뒤로 쳐지지도 말고, 파묻혀야 됩니다. 의복은 모든 사람에게 묻히어서 거기에 대해서 시선이 안 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그저 너무 실례가 되지 않도록 예의나 어느 정도 차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운을 입어야만 강단에 선다는 것은합당치 않습니다. 물론, 세상 학교 같은 곳은 제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학교 졸업식에서 무슨 학위를 줄 때에라든지,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입을 수 있습니다.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

본문 6절에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옛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죽었고,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에게로 갑니다.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영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의 역사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임

영적인 역사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또 영적인 역사가 없는 신자는 죽은 신자이며,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가 되느냐? 영적인 예배가 되지 못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산 제사는 영적인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힘을 써야 됩니다. 기도할 때에도 처음에는 말로 기도하다가 그 다음에는 영적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즉 한 고개 넘어가야 됩니다. 영의 세계에서 영적인 주님과 교통하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다른 곳에 가면 기도 할 때에 떠들썩하면서 기도하는데 그것은 영적인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떠들어 대다가 한 고개 더 넘어가서, 주님과 영적인 교통하는 세계에 들어가야만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에 졸음이 자꾸 오고 기도가 잘 안되면, 자기 귀에 들리게 만큼 조그마하게 음성을 내서 기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크게 소리를 내야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 귀에 들릴 만큼 조그마하게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좀 더 깊은 기도에 들어가려면 음성을 안내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예배드릴 때에 영적인 역사가 있어야 하고, 영이 살아나야 되고, 영이 새 힘을 얻어야 됩니다.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하였는데, 영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입니다. 
또 영의 세계는 진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우리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새 힘을 얻어 자라나고, 점점 강해져야 합니다. 즉 영이 자라나야 됩니다. 우리의 영은 말씀을 날마다 먹어야 살아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은 육신의 양식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밥만 먹으면 삽니까? 영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영이 먹고, 살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또 날마다 말씀 속에 자기 영이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서 영이 새 힘을 얻어야 되고, 새 생명을 얻어야 됩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찾기 위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모하여야 하고,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 우리의 영이 날마다 가난한 심령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를 시키고, 또 모자라서 또 말씀을 사모하고, 또 모자라서 말씀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영이 자라나야 됩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올 때에 무엇이 하나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즉 주일에 예배드리고 올 때에 가슴에 뭉클한 영적인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영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예배드리러 갈 때에나, 예배드리고 올 때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들을 때는 “잘한다, 참 그럴 듯하다”고 하지만 예배당 문을 나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 예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영적 예배는 말씀을 받을 때에 세밀하게는 모르지만 속에 무엇이 하나 생겼단 말입니다. 그러면 영에 배가 부르고, 든든하고 만족합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고, “이것이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되고, 영의 세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역자가 기도를 많이 하고, 영의 세계를 찾아서 거기서 양식을 먹고, 그 양식을 자기가 소화를 시켜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 교인들도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영의 양식을 영으로 받아 영의 힘을 얻어서 돌아가야 됩니다. 또 돌아가서는 새김질을 잘 해야 됩니다. 말씀 받은 것을 새김질하여 영이 힘을 얻고, 영이 자라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영의 생활을 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영의 새 것으로 하고, 의문의 묵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영의 역사가 없으면 예배당에 와서 예배에 참여하고 돌아간다고 하여도 영이 살지 못합니다. 즉 영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영이 날마다 살아 나가고, 영이 날마다 말씀의 양식을 받아먹어야 하고, 영이 자라나야 하고, 날마다 영의 새세계를 발견하여 들어가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껍데기 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즉 껍데기 신앙이며, 껍데기 생활이며, 예배는 껍데기 예배이며, 그 예배는 죽은 제사와 같습니다.
이사야 1:11에 영적인 것이 없이 양의 피만 가지고 나왔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안 받으셨습니다. 또 창세기에 아벨이 양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에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양의 피가 없이 곡식으로만 제사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피를 가지고 나오라고 했으므로 아벨은 말씀대로 양의 피를 가지고 나와 제사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당시 때의 사람들도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의 시대 때에나 이사야 시대의 때에나 양의 피를 가지고 나온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사야 당시 때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양의 피를
가져왔으나 껍데기만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면이 없이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66:3절에 영적인 면이 없이 나와서 제사하는 것에 대하여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면과 영적인 면이 언제나 합하여야 합니다. 시간을 많이 들여서 기도를 해야 영적인 세계가 발견이 됩니다. 시간을 안 들이면 안 됩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영이 자라남

그리고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이 말씀을 순종하여 나갈 때에 영이 자라납니다. 영이 자라나면 영적인 실력이 생기고, 새 힘을 얻어 나갑니다. 즉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했는데, 기름은 성령과 진리로 말미암아 영이 자라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이 성령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나서 영적 실력을 준비하여 나가는 것이 기름 준비입니다. 영적인 실력이 없는 사람은 기름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이 자라나서 영적인 실력을 길러나간 사람은 기름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말세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남은 때가 얼마 없습니다. 어디를 보든지 말세가 다 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기름 준비 하지 않고 외부적인 면, 즉 빈 등만 가지고 왔다, 갔다하면 안됩니다. 속에 내적인 영적인 생명의 역사가 있어 영이 자라나서 영의 실력을 길러 나가야만 기름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밤중에 오신다는 것은 환란 가운데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밤중에 등불을 켜고 나오라는 것은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면서 나오라는 말입니다. 등불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이 있어야 등을 밝힐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실력이 없으면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영적 실력을 잘 길러나가야만 환난이 닥쳤을 때에 그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쁨으로 나가서 영접할 수 있습니다. 

3. 율법과 범죄

본문 7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탐내지 말라”고 율법이 하지 않았으면 속에 탐심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속에 탐심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음

본문 8절에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계명은 말하지 않고 특별히 탐심을 말했는데, 탐심은 모든 범죄의 동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범죄의 근본 동기가 탐심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탐심 한 가지만 말해도 십계명 전체가 다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탐심을 알지 못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탐심을 품고도 죄인 줄 알지 못했다는 뜻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사람 속에 있는 탐심이 계명이 오기 전에는 나오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오므로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즉 탐심이 더 나왔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두었으면 탐심이 속에만 있고 나오지 않았을 것인데,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왔기 때문에 속에서 탐심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에 있는 탐심을 가만히 두지 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주어 탐심을 나오게 하였는가? 탐심이 나오지 않고 속에 가만히 있어도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이 죄인 줄을 깨닫게 만들어 회개시켜서 속에 있는 탐심을 빼어 내버리도록 하시려고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나온다는 말은 계명을 주어서 “하지 말라”고 한, 그 기회를 타서, 죄가 더 많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이 안 해야 되겠는데, 도리어 반항심이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더 해보자, 더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 그만 탐심을 더 많이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속에 전적 부패한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한 계명이 오니까 더 바짝 할 마음이 생겨서 더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아이들에게 “콧구멍에 콩알
넣지 말라” 하고 나갔는데 갔다 오니까 다 넣고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도리어 죄를 더 많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는가? 그것은 죄가 속에 있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므로 속에 있는 죄를 나오게 만들어야 죄인 줄 알고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목을 주어서 “너 이것 하지 말아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계명은 율법에 요긴한 것으로 십계명입니다. 이런 계명을 주어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속에서 죄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는 것은 죄가 맥을 못 춘다는 말로 “아무 힘을 못 쓴다, 활동을 못 한다, 기운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법이 있어야만 죄가 기운을 쓰고, 세력을 써서 나를 사로잡아 끌고가 괴롭게 하고 죽입니다. 계명이 없을 때에는 죄가 나를 괴롭게 하지 못합니다. 즉 죄가 죽었으므로 세력을 못 씁니다. 그러나 계명이 오므로 죄가 나를 괴롭
게 하고, 내게 세력을 쓰고, 나를 내리 누르고,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죄 때문에 고민하지만, 바로 살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편안합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남을 사기 해먹고 운이 좋다고 하며 죄 짓는 것을 당연한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나갑니다. 죄에 가책이 없이 평안히 잘 삽니다. 그것은 죄가 죽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죄가 나를 괴롭게 합니다. 죄의 가책을 받고, 죄가 세력을 쓰므로 나를 내리 누르고, 자꾸 찔러대고, 나를 죽을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그것은 죄가 세력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만큼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즉 바로 살려고 하는 만큼 죄는 살아서 힘을 쓴다는 말입니다. 

또 되는대로 살려고 하는 만큼, 죄는 세력을 쓰지 못하고 죽습니다. 죄가 죽으면 좋겠습니까? 죄가 살아서 역사하여 나를 괴롭게 하고, 책망하고, 나를 내리 누르고, 찌르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느 것이 좋습니까? 현재는 죄가 죽어서, 아무 짓을 해도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지요. 별의 별 죄를 지어도 속이 편안하고 아무 가책이 없이 그저 뻔뻔하게 나가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죄가 아주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심판대 앞에 가서 서면 죄가 다 살아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대 앞에 갈 때에는 죽었던 죄가 낱낱이 나와서 세력을 씁니다. 그 때에 가서는 내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죄가 세력을 써서 내가 죄 앞에 꼼짝 못하고, 죄의 찔림을 받아 거꾸러져서 회개하고 죄를 버리면, 이 다음에 심판대 앞에 가서는 그 죄가 나를 괴롭게 하지 못합니다. 즉 심판대 앞에 가서 그 죄가 죽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면 현재에는 죄가 죽지만 이 다음에 심판대 앞에 가서는 그 죄가 살아 나와서 나를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조그마한 죄 하나를 짓고도 그 죄가 살아서 나를 자꾸 괴롭게 만들고, 찌르고, 고통을 주고, 내리 누르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만 하면 죄는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죄는 죽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가서도 힘을 못 씁니다. 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음

본문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계명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누가 살았습니까? 죄는 죽고, 내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계명이 이르므로 무엇이 살아났습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반대입니다. 전에 계명이 없을 때에는 즉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습니다. 내가 살았다는 말은 죄를 짓고도 기운을 쓰고 정정당당하게 나갔다는 것입니다.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거침없이 이렇게 나갔다는 말입니다.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그저 못할 것이 없이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즉 계명을 받으므로 죄가 내게 세력을 쓰고, 책망을 하고, 나를 괴롭게 하므로 나는 이제 맥을 못 춥니다. 그것이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감히 “나”라고 와서 말할 수 없고, 내놓을 수 없고, 떳떳하게 머리를 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에 좀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만 두었냐?고 하면 교회에 안 나가면 “교회에 왜 안 나왔냐? 교회에 나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안 나가면 이런 말, 저런 말 안 듣고 편한데 예배당에 나가니까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죽고 자기가 살아나려고 하니까 그만 예배당에 나가는 것을 그만 두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여 놓고 죄가 살아나야 하는데 그만 거꾸로 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죄는 살아나고 자기는 죽어져야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자이고, 사람 앞에서도 머리를 들 수 없는 자이고, 자기는 아무 힘이 없는 자이고, 무엇을 마음대로도 할 수도 없는 자인 줄 알아야 그 때가 살아나는 때이고, 복 받는 때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방탕하고, 거짓말하고, 사기횡령하며, 거침없이 나가는 자는 죄는 죽고 자기는 산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제 못된 짓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다,
괴로워서 못하겠다,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하며 죄를 끊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면 살 것인데 그만 그것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우리 자신은 죽어지고, 죄는 살아나야 됩니다. 죄는 날마다 살아나서 그 죄를 날마다 회개하고 버려야 됩니다. 죄가 살아서 하나 나오면 또 버리고, 또 살아서 죄가 하나 나오면 또 내쫓아야 됩니다. 죄가 우리 속에 가득한데 죄가 나오질 않습니다. 나오게 만들어야 됩니다. 나오게 만드는 것은 계명이 이르러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여야 죄가 나오고 발견됩니다. 죄가 발견이 되면 전부 다 내쫓아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살
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계명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이제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나? 그것은 계명이 온 후로 자꾸 죄가 나오므로 나는 죽을 지경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죽을 지경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본문 11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란 “하지 말라”고 한 기회를 타서 즉 계명을 준 기회를 타서 죄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계명대로 살려고 하니 도리어 죄가 더 많아져서 자기가 죽을 지경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함

본문 12절에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전체가 613가지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요긴한 부분으로, 그것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말입니다.

본문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선한데, 도리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가 죄로 드러난다”는 것은 속에 있는 죄가 선한 율법과 계명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깨닫지 못했는데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았고, 율법에 대한 반발심으로 속에 있는 죄가 외부로 드러나게 되었고, 그 죄로 인해 죽을 지경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것은 깨닫지 못했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압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내가 육신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은 영에 속하지 아니하고 육신에 속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의 주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신자의 내적투쟁
 
본문 15절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만 행한다고 하였습니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고, 죄만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
 
7:22-23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중생한 영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겉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대적함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깨닫지도 못하고, 싫어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영혼은 죽은 영혼이므로, 죽은 영혼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법을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 죽은 영혼은 죄만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내적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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