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베드로후서 1:1-7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베드로후서 1:1-7

1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1:3 그분의 신성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너희가 이것들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정욕으로 인하여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1:5 그러므로 너희는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여라. 


1. 보배로운 믿음

본문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를 제자라고 하지 않고 종이라고 한 것은 좀 더 겸손한 자리에 자기를 둔 것입니다. 종은 자기의 주장대로 하지 못하고, 소유권이 없으며, 종일 주인을 위해서만 사는 자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종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살고 주인의 뜻대로만 살고 전부 다 주인의 것인 줄 알고 나가야겠습니다. 종의 위치에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주인의 위치에 있으면 교만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종의 위치에서 하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무엇을 하라하면 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 예수의 명령대로 주님의 뜻대로 해야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동일하게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다섯 가지 보배

첫째, 그리스도가 보배
학개서 2:7에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국의 보배가 이른다’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 그것이 만국의 보배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보배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믿음 속에 있기 때문에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둘째, 예수의 피
베드로전서 1: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가 보배입니다.

셋째, 믿음이 보배
시편 19: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배로운 말씀입니다. 금과 정금보다도 더 귀한 보배로운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넷째, 감추인 보배인 신령한 세계
마태복음 13:44-46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또 천국은 진주와 같습니다.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그 진주 하나를 만났는데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산 것과 같습니다.
‘감추인 보화’라는 것은 신령한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화라고 한 것입니다. 진주는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요긴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요긴한 진리가 보화입니다. ‘보배로운 믿음
을 너희가 받았다’하는 것은 믿음 속에 보배인 감추인 보화와 진주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다섯째, 믿음이 담긴 질그릇
고린도후서 4: 7에 보배로운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배는 것은 복음 전파의 뿌리를 가리킵니다. 복음 전파의 뿌리인 직무와 그 직분이 보배이고, 질그릇은 우리 인격과 인생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질그릇과 같은데 거기에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있는 보배가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보배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넷째는 감추인 보화와 진주입니다. 신령한 세계와 요긴한 진리가 보배입니다. 
다섯째는 복음 전파의 뿌리가 보배입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동일하게 받았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보혈을 소유할 수 있고, 말씀을 소유할 수 있고, 신령한 세계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영적 평강이 더욱 너희에게 많기를 기원했습니다.


2.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함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신 목적

본문 3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그것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불렀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과 덕으로서 불러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우리가 믿으려고 해서 믿게 된 것이 아니고, 그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에 “믿음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주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무제한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고 또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이 되는 것을 해야 하겠습니다.

받은 것을 쓰면 신기한 능력으로 다 이루어 감

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중생한 영혼, 영적 생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으며 자라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또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 모든 은사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쓰면 됩니다. 생명이 자라나면 되고,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으니 경건한 생활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한 능력으로 그것이 다 이루어져갑니다.

본문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보배롭고 또 지극히 큰 약속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무슨 약속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까? 예수님과 같이 되는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안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는 약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보배롭습니까? 얼마나 지극히 큰 약속입니까? 우리들이 본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리와 타조와 같은 인간들이었습니다. 이사야 43:20- 21절에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이방사람들은 이리와 타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리와 타조와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리와 타조와 같은 인간들에게 무슨 약속을 주었습니까? 너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택했다,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다,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을 네게 다 주었다고 하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약속, 이리와 타조와 같은 저희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약속,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약속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다 반드시 이루어 놓으십니다. 이런 큰 약속을 지금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이런 약속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습니다. 물욕과 정욕과 사욕은 모두 세상에서 썩어질 것입니다. 이것들을 피해서 이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쓰는 것입니다. 즉, 영적 생명을 쓰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주신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순종함으로 써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한 능력으로 신의 성품에 점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일, 중생한 영혼이 자라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기도 하고, 세상의 정욕을 다 피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도 하는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순종만 하면 됩니다. 주신 것을 순종하여 쓰기만 하면 신기한 능력으로 다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것을 주셨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순종만 하면 그 신기한 능력이 나타나서 다 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서 경건생활을 하라고 하실 때, ‘예’하면서 썩어질 것을 피해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고 또 경건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면, 신기한 능력으로 다 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순종만하면 다 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주어서 사랑의 사람들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에서 썩어질 생활을 피하고, 하나님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려고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이루어져 나갑니다.
신기합니다. 이루어져 나가는 것도 신기합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대한 것이 이루어져 나가고, 또 세상 썩어질 정욕대로 살았던 것을 피해서 신의 성품에 참예 하려고 할 때,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것도 신기한 능력으로 점점 이루어집니다.


3. 구원성취의 여덟 가지 덕

본문 5-7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몇 가지입니까? 여덟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인데, 믿음에다 무엇을 더 하라고 했습니까? 덕을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지식을 더하라, 넷째는 절제를 더하라, 다섯째는 인내를 더하라, 여섯째는 경건을 더하라, 일곱째는 형제우애를 더하라, 여덟째는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릇이라고 하지않았습니까?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는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은 있는데 덕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덕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가지는 것이 믿음인데, 말씀을 받아 가지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덕이 없는 사람은 남에게 손해를 주고 또 자기도 손해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덕이 없는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덕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좋게 하는 덕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또 지식을 더하라고 했는데, 지식이라는 것은 성경에 대해 깨닫는 지식입니다. 호세아 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지식에서 자라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18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했습니다.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 대한 지식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바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바로 나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바르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는 지식, 깨닫는 지식이 자라나야 합니다. 지식이 자라나고 지혜가 자라나고 예수님의 영이 자라나고 지혜가
자란다고 했습니다. 지식이 자라나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몰라서 마귀에게 밤낮 속고, 마귀의 뜻을 따라가면서 마귀의 일만 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 진리를 바로 깨닫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지식을 몰라서 육신의 정욕과 육신의 생각을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실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절제라는 것은 할 것은 하고 안할 것은 안하는 것입니다. 쓸 때는 쓰고 안 쓸 때는 안 쓰는 것이 절제입니다. 돈도 쓸 때는 쓰고 안 쓸 때는 안 쓰는 게 절제입니다. 무조건 안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무조건 써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제를 잘 해야겠습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다가 실패합니다. 무엇인가 할 것이 있으면 한꺼번에 다 써버리고, 정작 쓸 곳에는 못 쓰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월급 타오면 며칠 내로 다 써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돈 꾸러 다닙니다. 시간도 절제해야 합니다. 시간 절제 못 하는 사람은, 기도하느라 시간 많이 보내고 해가 낮이 되도록 기도하다가 집에 돌아 옵니다. 그러면 아이들 학교 늦어지고 남편 직장 늦어지고, 야단이 납니다. “학교 늦었다, 직장 늦었다” 아우성이면 “아, 나 기도하고 왔는데 마귀새끼들이 또 떠들어 대네”하면서 마귀가 자기를 방해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마귀입니까? 바로 자기가 마귀입니다. 기도는 좀 일찍 가서 하고 들어와서 아이들 밥 해주고 또 남편 출근하도록 해줘야 하는데 절제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하고 또 살림할 시간에 살림하고, 출근할 시간에 출근하고, 아이들 학교 보낼 시간에 보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규모가 있고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절제가 안 되니까, 기도하면서 시간 다 보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것은 바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를 해서 기도할 시간은 기도하고, 또 나가서 일할 시간은 일하고, 가정 살림할 시간은 살림하고, 또 돌볼 것은 돌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시간 절제가 중요합니다. 시간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도 못합니다. 또한, 마음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좋은 것만 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싫은 일도 해야 할 때는 하는 것입니다. 절제 못하면 안 됩니다. 잠언에 보면 ‘꿀이 맛있어도 많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꿀이 맛있다고 계속 먹으면 절제 못하다가 병이 납니다. 꿀이 맛있어도 조금만 먹고 아무리 달아도 이번에 더 먹으면 안된다, 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제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방할 시간, 기도할 시간, 성경 볼 시간, 또 나가서 일할 시간, 직장에 갈 시간 등등, 전부 절제해서 맞춰 나가야 합니다. 돈도 절제해서 여기에 쓸 것, 저기에 쓸 것을 배분하고, 또 규모 있게 절제할 줄 알아야 신앙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절제 못하여 월급 타면 한꺼번에 다 써버리고, 돈이나 꾸러 다니고, 밤낮 빚더미에 올라 앉아있으면 무슨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절제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절제하여 정도껏 할 말을 하고 그만둬야 합니다. 절제 못하는 사람은 이야기 보따리 가지고 한 시간, 두 시간 이야기 해댑니다. 그러면 그 시간은 버려지고 다른 것을 하지 못합니다. 절제를 배워야겠습니다.

그 다음은 인내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인내를 이룰 때 능력이 생깁니다. 인내를 이룰 때, 참고 견딜 때 능력이 생깁니다. 힘이 생기고, 참고 견딜 때 자라납니다. 참고 견디지 못하면 가다가 실패합니다. 모든 것은 참고 견디는데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의 승리도 누가 많이 참고 견디느냐에서 옵니다. 시험이 들어올 때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그것을 이기게 만드십니다. 이기게 만들어 놓으시면 그때는 능력이 생깁니다. 참고 견뎌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참고 견디면 신기한 능력이 오고, 신기한 능력으로 이기게 되어 자라나게 됩니다. 능력이 자라납니다. 인내에서 능력이 자라납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경건입니다. 경건은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생활입니다. 경건 생활하기로 작정하고 세속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바로 하는 것인데 생활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바로 하는 것입니다. 말이나 마음이나 행동이나 전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것도 경건치 않은 노래하면 안 됩니다. 경건한 노래, 경건한 찬송을 해야 합니다. 말도 경건한 말을 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모이면 세상의 속된 말, 음담패설을 말하곤 합니다. 그것은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모든 일에 경건한 언행심사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형제우애라고 했습니다. 형제우애라는 것은 형제를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특별히 형제를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형제입니다. 갈라디아서 6:9-10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형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형제니까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을 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형제니까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우애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 이것은 아가페인데, 형제우애가 ‘필리아’ 라면, 이것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공명정대한 광대한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덟 가지를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하셨는데 더할 수 있습니까? 덕 없는 사람이 덕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더하라 말씀하실때 ‘예’ 하고 더하려고 힘을 쓰면 그때 신기한 능력으로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덕 없는 사람, 믿음 없는 사람도 더욱 굳건한 믿음 가지려고 ‘예’하고 힘을 써나가면, 신기한 능력으로 믿음이 생기고, 덕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므로 ‘예, 이제부터 덕을 세워 가겠습니다’하고 순종하면, 신기한 능력으로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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