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베드로후서 2:19-22 도를 알고 저버리는 자.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도를 알고 저버리는 자
베드로후서 2:19-22

19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20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지만, 자신들이 바로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다. 

2:20 우리의 주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이것들에 얽매이고 패배당하면, 그들의 마지막이 처음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2:21 의의 길을 알면서도 자신들에게 전해진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알지 못했던 것이 그들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2:22 참된 속담에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돼지는 씻었다가 도로 진창 속에서 뒹군다." 라는 말이 그들에게 이루어졌다.


1. 영의 자유대로 살라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된다

본문 19절에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라고 하였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으며 육체의 자유대로 살아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됩니다(롬 6:16). 베드로전서 2:16에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5:13에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또 베드로후서 2:18에는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라고 하였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하였다고 하면서 육체의 정욕대로 음란으로써 진리를 떠나면 그것은 마귀에게 진 것입니다.

또 예배시간에도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나와서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찬양하고 싶으면 나와서 찬양하고, 의복도 자유롭게 아무거나 입어 경건치 못한 것은 결국은 마귀에게 진 것입니다. 신문에 어느 교회에서 율동하는 여자의 사진이 나왔는데, 가슴 한쪽은 다 내어 놓고, 아랫도리는 입긴 입었는데 넓적다리가 다 비추는 의복을 입었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또 교회에서 젊은 남녀들이 노라리 하는 자유가 점점 늘어납니다. 의정부에 천막치고 기도하려고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 “딱따구리”라고 하는 수양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몇 년 전 만해도 사람들이 기도하러 많이 왔었는데 요새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 어디로 가느냐면 바닷가로 갑니다. 산골로 가면 재미가 없으니까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재미로 바닷가로 갑니다. 이성과 교제하는 것에 자유가 있어야 많이 모인다고 하여 자유를 주지만 결국은 점점 타락된 길로 가는데 이것이 마귀에게 지는 것입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자유를 준다고 하며 거침없이 죄를 짓고 나가는 것은 결국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영의 자유이어야 합니다.
죄를 이기고 영의 자유를 누리자 자유가 둘입니다. 영의 자유와 육신의 자유입니다. 영의 자유는 진리 안에서 있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영의 자유는 경건한 자유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교회가 타락이 되어 영의 자유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육신의 자유로 기울어집니다. 목사들이 수양관에 가는데, 장기판 40개를 싣고 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노라리 하러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육신의 자유와 영의 자유 둘 다 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생각은 육신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은 서로 대적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5:16-17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
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자유를 누리려면 영의 자유가 없습니다. 또 영의 자유를 누리려면 육신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가운데서 영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진리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육신의 자유와 반대입니다. 육신의 자유로 나가면 그것은 마귀에게 지는 것이고, 결국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자유로 나가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자유이냐, 육의 자유이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할 때에 보디말의 아내와 동침하면 대접을 잘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의 자유이므로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육의 자유를 쓰지 않고 영의 자유를 써서 이겼습니다.

영의 자유, 즉 하나님의 자유를 쓰면 육신의 자유는 거절됩니다. 그러나 육신의 자유, 즉 죄짓는 자유를 쓰면 마귀의 종이 되고 마지막에는 멸망합니다. 육신의 자유로 나가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집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영의 자유이냐, 육의 자유이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유이고, 성령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또한 얼마든지 올라가는 자유이고, 향상하고 전진하는 자유이고, 하늘에까지 도달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자유는 당장 좋은 것 같지만 마귀에게 지는 자유이고, 마귀의 종이 되는 자유이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는 자유입니다. 무슨 자유이냐? 그것을 잘 분별해서 영의 자유대로 나가야겠습니다. 육신의 자유대로 나가면 자유를 준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귀의 종이 되는 자유이고, 결국은 멸망하는 자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도를 알고 저버리는 자가 되지 말라

도를 저버리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함

본문 20절에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세상 더러운 것에서, 즉 죄에서 나왔다가 다시 죄 가운데 빠지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2:43-45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 속에 마귀가 들어가면 안 믿는 사람보다 7배나 더 악해집니다. 예수를 잘 믿고 말씀대로 나갈 때에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믿음에서 떠나서 마귀의 종이 되면 7배나 더 악해집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지면 안 됩니다.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마귀를 못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실 때에 세 번 다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마귀가 돌로 떡이 되게 해서 먹으라고 할 때에 무슨 말씀으로 이겼습니까? 신명기 8장에 있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또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절하면 다 주겠다고 할 때에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신명기 6장의 말씀으로 또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말씀이 아니면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보다 알고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이 더 큼

본문 21-22절에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은 후에 그것을 내어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의 도를 안 후에 그 받은 거룩한 도를 저버리는 것은 그 죄가 더 큽니다. 알지 못하고 매 맞을 일을 행한 자보다 알고 맞을 일을 행한 자가 더 많이 맞는다고 했습니다. 즉, 모르고 지은 것도 죄이고, 알고 지은 것도 죄인데,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보다 알고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이 더 큽니다.

누가복음 12:47-48에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나 또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즉 100% 순종해야 하는데 99% 순종했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모르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어도 죄이고, 알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어도 죄입니다. 그러면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과 알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 중에 누가 더 매를 맞겠습니까? 죄인 줄 알고 맞을 일을 행한 사람이 더 매를 많이 맞습니다.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도 매를 맞긴 맞는데 그 사람은 적게 맞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의의 도를 일단 알았으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버리면 형벌이 큽니다. 히브리서 2:1-3에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습니까?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다는 것은 회개했다가 다시 죄가운데 빠지는 것입니다. 즉 토했다는 것은 술, 담배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은 술, 담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가 다시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다시는 무엇을 사지 않겠다고 토해 놓았는데, 다시 주일에 사는 것은 토했던 것을 먹는 것입니다. 세상의 오락과 방탕, 방종하는 생활을 다 끊어 버렸는데, 다시 또 살살 들어와 방탕, 방종하는 생활에 빠집니다. 슬롯머신, 카지노를 다 끊어 버렸는데 다시 또 살살 한 번씩 합니다. 화투하는 것도 다 끊어버렸는데, 다시 살살 한 번씩 합니다. 그것이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 은혜를 받아서 결심하고 나갈 때에는 다 뚝뚝 끊어 버렸습니다. 즉 다 토했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안가서 슬슬 타락이 되어 조금씩 다시 합니다. 그것이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사람으로, 이런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버렸던 것을 다시 하면 안 됩니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했는데, 우리가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죄악된 것을 버린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돼지가 잘 씻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러나 얼마쯤 나가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눕습니다. 죄를 회개하여 다 씻고 새 출발했는데, 다시 구렁텅이에 눕습니다. 즉 인본주의, 세상주의가 잘못된 줄 알면서 거기에 다시 들어갑니다.

성경에 다른 것을 섞으면 더러운 곳으로 돌아가는 것

성경만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성경이외의 것은 안하다가 다시 또 다른 것이 살살 들어옵니다. 성경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섞는 것은, 즉 인본주의로 나가는 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눕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말씀 외에는 절대 다른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가르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쳤다고 했습니다(고후 2:17).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던 것을 다 버렸는데, 살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이 들어 옵니다. 순수한 성경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져다 섞었습니다. 그것이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가 우리 신학교에서 성경을 배워서 성경대로만 교회를 인도해 나갔습니다. 그 교회 교인수가 약 150-200명 쯤 되었는데, 그 교회가 강남으로 이사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파트 교인들을 잡으려고 성경대로 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섞어서 했습니다. 즉 인본주의를 썼습니다. 교회가 잘될 것 같습니까? 교회가 안 되었습니다. 인본주의를 하려면 아주 인본주의를 하든지, 신비주의를 하려면 아주 신비주의를 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舊)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이 변질되었다”하고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나갔고, 결국 교회가 잘 안되었습니다. 그 목사가 교회가 안 되니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민가야 누가 교회를 맡겨 줍니까? 가서 설교가 너무하고 싶어서 “어디에 가서 주일 설교나 한 번 해볼까”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으면 영적 면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일단 잘못된 줄 알고 내버렸으면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본주의와 신비주의를 끌어들이지 말고 다 끊어버려야 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인본주의를 쓰는 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변질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교회를 세워나가
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섞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섞으면 몇 사람은 모이겠지만 참된 교인은 다 압니다.

누웠던 자리를 집어 치워 다시 눕지 말라

그러므로 토했던 것을 다시 먹지 말고, 또 씻었다가 다시 구덩이에 눕지 말아야 합니다. 씻었다가 왜 다시 구렁텅이에 가서 눕습니까? 돼지가 씻었으면 깨끗하게 살아야지 왜 도로 구덩이로 가서 눕습니까?
거기에 가서 눕는 게 좋아서 눕는 것입니다. 돼지가 밥 먹을 때도 “더더덕”하며 먹는데, 입에 칠하지 않고 살살 먹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므로 과거에 돼지 노릇하던 자리가 좋아서 다시 가서 눕는 것입니다. 돼지 자리가 좋다고 다시 가서 누우면 일이 다 틀어집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병신 노릇하던 자리를 그냥두면 다시 가서 누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웠던 자리를 다 집어 치우라는 것입니다. 다시 누울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씻었다가 다시 구덩이에 누울 수 없도록 아예 구덩이를 없애 치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지 않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구덩이에 눕지 않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성도가 믿고 회개하여 더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다가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은 씻었다가 다시 구덩이에 들어가고,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미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기는 자가 되라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입니다. 이겨야 됩니다. 이기선 목사님이 “하나님은 이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다 이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 가축이 이기는 것을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 주인도 자기 개가 다른 집의 개와 싸워서 지면 이기라고 소고기를 사다 준다고 합니다. 또 닭도 다른 집의 닭하고 싸워서 이겨야 된다고 상당히 좋은 것을 사다 먹여 이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가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이기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승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단 한번 토해 놓았던 것은 다시 먹지 말아야 합니다. 끊어 버렸던 것을 왜 다시 합니까? 주일에 왜 삽니까? 과거에 전심전력으로 주님만 따라갈 때에는 다 끊어 버리고 나갔는데, 왜 다시 옛날대로 합니까? 다시 계속 달음박질 하여야 합니다. 죄 된 길로 다시 돌아서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십일조 드리던 것을 왜 안 드립니까? 그것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이고, 씻었다가 다시 구렁텅이에 눕는 것입니다. 제사음식 안 먹다가 왜 다시 제사 음식을 먹습니까? 과거에 잘못된 줄 알고 다 하나씩 정리하고 끊어 버렸던 것인데, 다시 더러운 구렁텅이에 빠질 수 없습니다. 다시 구렁텅이에 눕는 것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진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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