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요한계시록 3:14-22
요한계시록 3:14-22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
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이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것을 책망했습니다. “네가 미지근해서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너를 내친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차든지 덥든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상태가 뜨뜻미지근해서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
본문 14 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멘으로 나타나셨고, 또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셨고,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멘’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했지만 ‘아멘’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 것을 알게 해주느라고 ‘아멘’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분별 못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아멘’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무식한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고 오해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벽별이라고도 했고, 감람나무라고도 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아멘’은 “성취한다, 그대로 이루신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다하고 ‘아멘’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그대로 이루어주옵소서” 하는 뜻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아멘으로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어나가시는 예수님이시다” 하는 뜻입니다. 또 “참된 증인이시요”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뜻을, 다 증거해주시는 예수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또“창조의 근본이신 이” 라고 하였는데 창조의 근본이시라는 것은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에 예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 모든 새로운 일을 예수님께서 창조해나가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적 새로운 역사, ‘이사야’서 43 장 19 절에 보면 ‘새 일’을, 예수님께서 시작하시사 이루어나가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함
본문 15-16 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 상태가 덥든지 차든지 해야지 뜨뜻미지근한 상태, 중간 상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1) 덥다는 것의 뜻
덥다는 것은 열심 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는데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것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뜨거운 것입니다. 열심 있는 것이 뜨거운 것 아닙니까?
하나님 일에 열심 내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심 내는 것, 예배시간에도 열심을 내서 예배 시간 전에 나와야 됩니다. 예배 시간 늦어지는 것은 열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더운 것이 아닙니다. 뜨뜻미지근한 것입니다. 자기 신앙이 뜨뜻미지근한지 아닌지 그것을 모르겠으면 예배 시간에 늦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늦어지는 사람은 신앙 상태가 뜨뜻미지근하기만 할 뿐 덥지 않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2) 찬 것의 뜻
찬 것이라는 것은 죄를 회개하는 면, 죄와 더불어 싸우는 면, 선은 뜨거운 것이고 죄는 찬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 “너희가 죄와 더불어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죄와 싸우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본문 19 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열심을 내라는 것은 뜨거운 것이고 회개하라는 것은 찬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죄를 회개하는 것은 찬 것이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뜨거운 것이란 말입니다.
“회개하라”, “죄와 싸우라”, 예수님꼐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은 찬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열심히 주님을 따라오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중간 상태,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토하여 내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곤고와 가련함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함
본문 17 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 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상태는 자기 스스로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고 나갑니다. 외부적인 면만 보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으니까 돈도 많은 모양이고, 또 일도 많이 하는 모양이고, 또 교회에서 직분도 집사직분 맡았다, 장로직분 맡았다, 목사다, 전도사다, 강도사다, 또 전도부인이다, 이렇게 외부적인 면만 보고 오래 믿었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괜찮다” 하며 다녔다는 것입니다. “네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비참하다는 말씀입니다. 곤고하단 말입니다. 가련하고 또 가난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단 말입니다. 눈 멀고 벌거벗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상태가 너무 가난해서 속에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속에 무엇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껍데기만 왔단 말입니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속에 무엇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껍데기만 왔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심방 같이 갈 때에 “나 오늘 기도시키지 마시라”고 부탁을 합니다. 기도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잘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집사들도 3일 저녁이나 주일날 오후에 기도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해가지고 지금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럽니다. 할 것이 없으면 주기도문이라도 나와서 다시 하십시오. 집사들이 대표기도 할 때 기도할 것이 없으면 주기도라도 하라 그 말입니다. 하여간 주기도가 제일 좋은 기도입니다. 주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 교회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목사님 잘 되게 해주시고, 교회 잘 되게 해달라고 한 다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잘 되게 해달라고야 못하겠습니까? 가난해 가지고 심령 상태가 빼빼 말랐단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지금 그렇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굉장합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고 굉장하다, 크다, 잘한다, 직분 맡았다 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영적 상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벌거벗고 다닙니다. 수치를 모르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권고
본문 18 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영적 상태가 비참하니까(뜨뜻미지근하니까) 내가 너를 권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만 둬두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 상태로 예수님 재림하면 어떡하고 예수님 앞에 갈 때 어떻게 가겠습니까? ‘내가 너를 권하는데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세가지를 사서 부요하게 하라’시는 것입니다. 또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였는데 불로 연단한 금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연단 받은 믿음, 많은 시련을 통과하는 믿음, 여러 가지 시험을 다 이긴 믿음, 환난을 이긴 믿음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5 장 3-4 절에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하였는데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연단 많이 받아 소망을 이루는 그 신앙이 진짜입니다. 시험을 많이 통과하고 승리한 신앙, 그 신앙은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연단 하나도 못 받은 신앙은 금이 못 됩니다. 숯덩이입니다. 숯 덩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많은 연단을 받고 많은 시험을 만나고 그것을 다 이겼다는 것입니다. 생명 내어놓고 다 이겼습니다. 생명과 재산과 가족 다 내놓고 모든 것 다 이겨나간 믿음 그것이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많이 통과한 신앙, 그것을 승리적으로 통과한 신앙, 연단 많이 받은 신앙이 바로 불로 연단한 금인 것입니다.
시험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없는 것이 좋겠습니까? 시험 있는 것이 좋습니다. 있어야 거저 연단 될 것 아닙니까? 불이 없으면 연단이 안 됩니다. 불고기 집에 갔는데 숯불을 피웁니다. 숯불불고기라는 것입니다. 숯불을 피워야 고기를 놓으면 익을 것 아닙니까? 숯불이 오면 “뜨겁다. 더워서 안 되겠다”며 관두라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연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도 도가니에 넣고 달궈가지고 다 녹인 다음 좋은 금을 거기서 만들어 냅니다. 24 금이 제일 좋다고 하는데 하여간 좋은 금으로 만들어져야 됩니다. 연단 받고 이기고 참고 생명 내놓고 나가고,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또 이긴 그 신앙은 좋은 믿음, 불로 연단한 신앙,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그것을 거저 먹으라고 하지 않고 사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것은 값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5 장 1 절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돈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 가져올 것도 아니고 거저는 못 먹으니 사라는 것입니다. 받는 일심정력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받는 공력이 사는 것입니다. 일심정력, 받는 공력이 들어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희생과 공력, 희생하면 값이 생기고 본전이 생기고 자기 있는 것 파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 거기다가 공력을 들이면 그것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희생하고라도 믿는 일은 성공하도록 해야 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어라. 그거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희생을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참아야 됩니다. 연단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흰 옷이라는 것은 성결, 성화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해라”, 점점 거룩해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에서 거룩, 거룩에서 거룩으로 나가야 됩니다. 자라나야 됩니다. 좀 더 거룩해져야 되고, 좀 더 거룩해져야 되고, 또 좀 더 거룩해져야 되고, 죄에서는 멀리 떠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죄에서는 점점 더 떠나야 됩니다. 점점 더, 점점 더 떠나야 됩니다. 과거에는 죄와 더불어 살았는데 죄를 떠나니까 죄가 좀 멀어집니다. 죄와 세상에서는 떠나고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져나가야만 되겠습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는데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어나가야 됩니다.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지 못하니까 늘 더러운 가운데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팔아서 사야 됩니다. 판다는 것은 희생하고 일심정력을 많이 들여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라는 말입니다.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어지는 사람은 다음부터는 늦어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뜨뜻미지근한 증거입니다. 뜨뜻미지근해가지고 아예 들어올 때 걸음 걷는 것만 봐도 벌써 뜨뜻미지근합니다. 제일 뒤에 거랑거랑 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명륜교회 이전에 산 동네 집사네 집이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 심방가면 남편은 일하러 나가고 부인은 집에서 아이들 데리고 살림살이하는데 언제나 가도 밥상이 방 안에 있고 파리가 왕왕하고 빨래감은 옆에다 쌓아놓고 심방간다고 하면 뭐 벼락이 나서 들어가가지고 좀 치우느라고 해도 다 치울 수 있습니까? 예배 시간은 늦어집니다. 또 끝나서 축도하면 벌써 나갔습니다. 나갈 때는 빨리 나가는 것입니다. 그거 참 한심합니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죽었는데 아마 4,50 살 되었을 건데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 데리고 왔는데 뭐 말끔하게 얼마나 깨끗하게 뭐 그 집에 가면 얼마나 청결한지 모릅니다. 예배 시간 전에 나옵니다. 그 여자 죽은 것이 아깝습니까? 죽어 쌉니까? 그 사람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 하여간 부지
런하고 열심하는 친 백성, 아예 예배 시간 전에 나오고 일찍부터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입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서 다른 사람이 볼 때 “아! 저 사람 거룩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이다, 잘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이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야 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라는 것은 노력하라 그 말입니다. 일심정력을 들여서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다 영안이 어두워 졌습니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눈이 밝아져야 되겠는데 심령의 눈, 영안을 떠야 신령한 세계를 밝히 바라보고 진리에 대해서 밝히 알고 자기 갈 길을 밝히 바라보고 자기 갈 길을 바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1) 자기에 대한 하나님을 뜻을 순종하는 것이 안약
안약이 무엇입니까? 안약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약입니다. 그러면 눈이 번쩍 떠집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 만났을 때에 소경에게다가 흙에다 침을 발라서 흙을 이겨서 눈에다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그랬습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실로암 못에 씻으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소경이 그대로 가서 씻으니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는 것, 그것이 안약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 만났을 때에 소경에게다가 흙에다 침을 발라서 흙을 이겨서 눈에다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그랬습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실로암 못에 씻으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소경이 그대로 가서 씻으니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는 것, 그것이 안약입니다.
38 년 된 병자도 38 년 동안 병신 노릇을 했는데 그의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병이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벌떡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까 다 나았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한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 38 년 된 병자는 낫고자 하는 마음 가지는 것, 그 다음에는 일어나라 할 때는 일어나는 것,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할 때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 이것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는 것이 안약이다. 그렇게 알면 됩니다. 그러면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고 그곳을 떠나서 감으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이 떠졌습니다. “독자를 바쳐라” 하실 때에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단을 쌓아놓고 제사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떠졌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면 다 눈이 떠집니다. 소경으로 지내지 말고 눈을 떠야 합니다.
2)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법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찾느냐 하면
첫째는 성경말씀에서 찾고
둘째는 성령의 감동으로 찾고
셋째는 신구약 성경의 원리원칙에서 찾고
넷째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고
다섯째는 신앙양심에서 찾고
마지막으로는 자기보다 믿음이 나은 사람에게 기도를 받아서 찾습니다. 찾기만 하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눈이 번쩍 떠져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고 신령한 세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라납니다. 자라나니까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것처럼 올라갑니다. 하나님 뜻을 찾아서 순종하면 올라가고 또 순종하면 또 올라가고 또 순종하면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1 , 2층, 3층…7층 신앙의 탑이 점점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올라가면서 바라보면 점점 많이 보입니다.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소경노릇 하는 자입니다. 그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 사람은 눈이 못 떠집니다. 또 몇 십 년 믿었어도 눈 못 떠졌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또 순종하지도 못하고, 또 사야 되겠는데 사려면 자기희생이 들어가야 되겠는데 희생도 안하고, 그저 가죽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수 믿게 했어야 되겠는데 자기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뜨지 못하면 안 됩니다. 밝아져야 되겠는데 영안이 열려야 되겠는데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면 그 눈이 번쩍 떠집니다. 하나님께서 다 뜨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할 때는 가서 씻으면 그저 눈 뜨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순종만 하면 됩니다. 마지막에 순종이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요긴한 것입니다. 안약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하는 것이고, 불로 연단한 금은 연단된 신앙을 가리킵니다. 믿음의 시련을 받아야 되고, 환난을 당하고 다 이기고 연단을 받아서 시련된 신앙, 거기에는 희생이 들어가야 됩니다. 사라 그랬으니까 희생 없이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흰 옷은 뭐라 그랬습니까? 거룩, 성화, 성결, 죄에서 떠나는 일, 이것도 사야 됩니다. 거저는 못 가집니다. 밤낮 세상과 짝하고 죄 가운데서 살고, 속에 있는 것은세상인 사람은 백 날 가도 흰 옷을 입지 못합니다. 더러운 옷이나 입고 다니고 벌거벗은 수치를 알지 못하고 다니는 자입니다. 이제부터는 사라는 말입니다. 흰 옷을 사야 됩니다. 희생하고 사라는 것입니다. 버릴 것 버리고 사야 합니다. 사라는 것은 공력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예수님과 겸상으로 마주 앉아 먹음
본문 19-20 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라고 하였는데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안 하면 징계할 것이다”라는 말은 ‘열심을 내어서 회개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 열심히 하라’ 그 말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 다 기울여서 적은 능력 다 기울여서 말씀 지키라’는 말입니다. 열심을 내서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하였습니다. ‘너는 그 문을 열어라. 열면 내가 들어가서 나로 더불어 먹고 마시고 한 자리에 앉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자리에 앉는다 그랬지요?
본문 21 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신 것은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문을 열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예수님께서 쑥 들어오십니다. 또 문을 열면 하나님의 말씀이 쑥 들어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간다는 말은 주여 들어오시옵소서, 그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순종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주여 오시옵소서, 한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쑥 들어오십니다. 문 열면 예수님이 들어온다는 것 잘 알아 두십시오. 마음 문을 열면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옵니다. 그 다음에 순종하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과 같이 먹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문을 연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니까 예수께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니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삭개오가 순종을 하니 예수님을 영접했고 삭개오가 예수님과 같이 먹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먹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앉고 함께 먹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예수님과 겸상해서 먹어봤습니까? 겸상이라는 것은 밥상 하나에다 차려가지고 예수님하고 마주 앉아가지고 둘이 먹는 것입니다. 혼자 먹는 것이 나을까요? 둘이 먹는 것이 나을까요? 혼자 먹으려면 좀 심심합니다. 식사할 때, 친구라도 하나 있어야 그래도 좀 좋은데, 그런데 이는 보통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먹고 한 자리에 앉았고 동거, 동락, 동식 예수님과 동거 동락 같이 먹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살고 그 다음에 같이 앉고 예수님과
같이 앉아서 사는 생활, 혼자 사는 생활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앉아서 사는 생활입니다. 혼자 먹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먹는 생활입니다. 신령한 양식, 같이 먹고 같이 먹어서 배부릅니다. 먹을 때도 즐겁고 먹은 다음에도 즐겁습니다. 예수님과 신령한 양식 같이 나눠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살고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갈 때도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 어떻다고 그랬습니까? “즐거운 일 아닌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와 같이 앉아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닙니까? 같이 먹는 것도 배부른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문을 열어라 내가 들어간다 들어가면 나와 같이 먹고 또 나와 같이 한 자리에 앉아있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사모하고 영접하십시오. 기도하고 그 다음에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다음에는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나와 한 자리에 앉고 같이 먹고 같이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지 아니하고 예수님 말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만 가지고 “암만 그래도 난 내 고집대로 한다. 난 나대로 산다. 내 계획이 다 있다”라고 합니다. 그 썩어진 계획, 그런 계획 다 내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문을 열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 없이는 나는 못 삽니다. 그리고 주의 뜻, 주님의 뜻을 이제는 순종하고자 합니다. 내게 대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자 합니다.’하며,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입니다. 나서면 ‘너는 나와 같이 내 자리에 앉아있자, 나와 같이 먹자, 나와 같이 즐거워하자’ 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처럼 나와 같이 앉아있고 나와 같이 먹고 나와 같이 즐거워하자 구원이 네 집에 이르렀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이와 같이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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