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3일 화요일

창세기 22:1-24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자 이병규목사성경강해 계약신학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자
창세기 22:1-24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
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20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무엘과 22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람과 브두엘이라 23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22:1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시니,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너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말해 주는 한 산 위,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하시니, 

22:3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함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갔다. 

22:4 셋째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고 

22:5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하고, 

22:6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들어 아들 이삭에게 지워 주고, 그는 불과 칼을 손에 들었고 그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갔다. 

22: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하니,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이삭이 말하기를 "보십시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를 위한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니, 

22:8 아브라함이 "내 아들아, 번제를 위한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그들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갔다. 

22:9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22:10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할 때, 

22:11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니,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였다. 

22:12 천사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으니,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셨다. 

22:13 아브라함이 그의 눈을 들어 살펴보니, 보아라,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뒤에 있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잡아 그의 아들을 대신하여 그것을 번제로 드렸다. 

22:14 아브라함이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으니, 오늘날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22:15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22:16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내 스스로 맹세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외아들을 아끼지 않으니, 

22:17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어서, 네 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매우 번성하게 하겠고 네 씨가 그의 원수들의 문을 차지할 것이며 

22:18 또 네 씨를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내 말을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라고하셨다. 

22:19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되돌아왔고, 그들은 일어나 함께 브엘세바로 갔으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 

22:20 이 일 후에, 아브라함이 '보시오, 밀가도 또한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아들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22:21 나홀의 맏아들은 우스이고,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니, 

22:23 이들 여덟 사람은 밀가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에게 낳은 아들들이며 브두엘은 리브가의 아버지이다. 

22:24 나홀의 첩의 이름이 르우마였는데, 그 여자는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다.


본문 1-2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시험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심중에있는 신앙을 드러내어 만대에 신앙의 모본을 삼고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좋은 시험이요 복된 시험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좀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 인격을 갖춘 자로 만들어 귀하게 쓰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백 세나 되어 낳은 독자 이삭을 사랑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신앙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모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만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으
면, 참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고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

창세기 12: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
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도 하실 때,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즉시로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갔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즉시로 순종을 했습니다. 순종이 아브라함의 신앙 가운데 제일 첫째입니다. 순종하지 않았으면 아브라함의 신앙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순종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창세기 15:5-6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서 나시고, 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이신데, 지금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또 우리와 같이 하여 주시고, 이제 말세에는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3.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신앙

로마서 4:17-20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이고 사라는 팔십구 세 때인데도, “기한이 이를 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네게 아들을 준다. 그 아들을 통하여서 네 자손이 번성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라고 약속을 하셨는데, 인간의 생식방법으로는 잉태하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라의 태가 다 죽은 것 같고 아브라함의 몸도 죽은 것 같기 때문에,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말씀을 반드시 그대로 이루실 것을 믿고 또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견고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백세가 되어서 이삭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신앙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아도, 아무리 마른 나무와 같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마른 나무에서 꽃이 필 수 있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능이십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마른 나무
였지만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신앙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4. 독자라도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어서 낳은 독자, 곧 바칠 수 없는 가장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실 때, “예” 하고 단 마음으로 바치기로 작정을 하고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진 모든 것 가운데에 제일 중요한 것이 그의 독자가 아니겠습니까? 백세나 되어서 낳은 독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아들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제물을 나눠서 불로 태워 드리라는 것입니다. 장작에 불을 피우고 다 타서 재가
되도록 해서 재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백세가 되어서 낳은 아들 이삭을 양 잡는 것처럼 잡아서 나무 위에다 놓고 불을 피워 다 태워서 재가 되게 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기 힘든 일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예’ 하고 순종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다 은혜고 또 복을 주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한 마디라도 복이 안 되는 것이 없고, 은혜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능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만능으로 역사해서 복을 주실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5.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

그런데 번제로 드리는 데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과 마음까지 다 바쳐놓고 사는 신앙이니까 아들을 바치라 할 때에도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고 하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문제입니다. 이삭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는데, 이삭이 아직 결혼도 하기전에 그를 죽여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전에 하신 그 약속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에 하신 약속대로 되려면 이삭이 죽지 않아야 이삭의 자손이 번성하여 많아지겠다고 하신 약속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것은 전에 하신 말씀과 상충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면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고,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오늘 하신 말씀을 또 그대로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둘 다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번제 드리라고 하시는 말씀도 믿어 단 마음으로 드리려 하고, 또 전에 약속하신 이삭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믿었는가 하면, 죽어서 재가 된 이삭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서 전에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오늘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만능의 능력으로 이삭을 다시 살려서, 전에 말씀하신 이삭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겠다는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불가능할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만능으로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독자 바칠때 아낌없이 단 마음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받아주시겠다고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것이 전부 다 은혜요 복이요, 다시 사는 것입니다’라면서 바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받아 주시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또 죽지만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주실 것이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니까, 그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6. 정성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본문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장작을 싣고 두 사
환과 이삭을 데리고 떠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시하신 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여기서 또 배워야 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떠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정성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일찍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나무가 사방에 많이 있었지만 집에서 쪼개서 갔다는 것은 미리 예비해 놓았던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쓰려고 늘 예비해둔 나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이나 소를 잡아서 제사할 때 쓰는 나무를 예비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미리 쪼개서 정성껏 제사를 드리려고 가지고 갔습니다.

7.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변치 않는 신앙

본문 4절에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고 하였습니다. 삼일 길을 가서 도착했습니다. 나귀에다 장작을 싣고 두 사환으로 하여금 나귀를 끌게 하고 자신은 이삭을 데리고 걸어서 삼일 길을 갔습니다. 또 갈 때 불과 칼을 가지고 갔다고 하였는데, 그 때는 성냥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가지고 가서 거기서 불을 폈던 때이기 때문에 불을 담아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일 동안, 곧 아들을 제사 드리려고 데리고 가는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정으로 기울어지지 않았
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를 잡아서 제사 드린다는 생각에 그 모습이 눈 앞에 알랑알랑하기도 하고, 또 가다가 얘기를 하자고 했을 텐데, 아브라함이 인정으로 돌아섰다고 하면 거기서 제사를 못 드립니다. ‘아, 이 아이를 어떻게 바쳐서 제사 드리겠는가’ 하다가 그만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삼일 동안을 걸아 가면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 교통하는 생활을 하며 갔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갔고, 마음이 하나님께만 다 가 있었고, 그 마음이 육신으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잠언 4: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을 하나님께만 기울이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만 바치고 하나님의 인도만 받고 하나님과만 교통하고 다른데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과 벗 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고 간음하는 여자와 같다고 하였는데, 마음이 세상으로 나가면 그 사람은 간음하는 여자와 같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께만 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만 기울어야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상심이 되고 방심부주의 하면, 그때 그만 마귀가 들어옵니다. 마귀는 사람을 육신의 정욕으로 기울어지게 하고, 안목의 정욕으로 기울어지게 하고, 이생의 자랑으로 기울어지게 합니다. 방심부주의하고 믿음을 안 쓸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쓰는 때’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쓸 때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생활을 할 때이므로, 마음이 세상으로 안 기울어집니다. 정욕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안목의 정욕으로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육체의 정욕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을 잘 지켰는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동안이나 아들을 데리고 가면서, 아들과 같이 말을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께 나아가 있는 것입니다. 눈은 아들을 보면서 가지만, 또 아들과 말도 하지만,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께 다 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가 있어야 됩니다. 또 그저 하나님만 생각하고 마음에 하나님만 있으니까 아들을 봐도 안 보는 것과 같이 하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봐도 그저 안 보는 것과 같이 하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하지 않
는 믿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마음이 변치 않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 변치 않는 믿음,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께만 가 있는 믿음, 하나님과 교통하는 믿음이 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오고, 아무리 독자가 오고, 또 아무리 좋은 것이 온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귀한 것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귀하지 다른 것은 다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즐거워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거워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 길을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에다 관심을 많이 둡니다.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로 마음이 기울고, 또 무엇이 있으면 거기로 마음이 쏠립니다. 또 안목의 정욕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이 온다고 하면 거기로 많이 몰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에 “보암직
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따 먹은 것입니다.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가 있었다고 하면, 하와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면, 선악과를 볼 때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이고, 보암직한 것은 하늘나라가 보암직한 것이고,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세상에서 무엇이 과연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일만한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와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서 방심부주의하고 나가니까 마귀가 들어와서 다른 곳으로 마음이 가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중요합니다. 자기 마음을 잘 붙잡아서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에녹과 같이 마음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지만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 동행하시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는 사람만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것을 알아서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8. 지혜를 써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본문 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삼일 길을 가서 이제 산을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산 밑에까지 갔습니다. 올라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겠
는데, 나귀와 사환은 그 산 아래 머물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산 아래에 이른 후에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취하여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환들에게 장작을 지워가지고 가면 편리 하겠는데 그 아이에게 지워가지고 갑니다. 아이 하나를 태울 만한 나무를 이삭에게 지라고 했는데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 장작을 가지고 가서 불을 피워서 아이를 태울 것인데, 그 아들에게 지웠다는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나무를 지라니까 ‘예’ 하고 순종을 하고 지었습니다. 사환에게 끝까지 올라가자고 하면 되겠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아니했겠습니까? 이것은 벌써 아브라함이 제사하는 데 마음이 다 가있기 때문입니다.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그 단 위에 올려놓고 죽여서 불을 놓으려고 할 때, 만일 그 사환들이 있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칼을 들어서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에는 사환들이 와서 손을 꽉 붙잡고 왜 이러냐고 이것은 안된다고 결사적으로 막을 것 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와서 말리며 손을 붙잡으면 백십 몇 세 난 할아버지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제사 드리지 못합니다. 사환들이 독자를 죽이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또 나귀도 그렇습니다. 만약 나귀를 데리고 올라가면 나귀가 악악하며 소리를 내서 방해를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5절에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것입니다. 사환에게 나귀와 함께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미리 제사 드리는 것에 대해 세밀하게 준비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밀하게 준비한 것입니다.
제사 드릴 때에 어떻게 해야 실패하는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되겠는가를 미리 많이 연구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흠이 없는, 실패 없는 제사를 드리려고 예비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한 것입니다.

9. 끝까지 믿음을 쓰는 신앙

본문 7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이삭이 말을 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아브라함이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아비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을 잡아 제사를 드린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올라가면서 보니까 양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보고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어봤습니다.
그 때에 만약 육신의 생각이 들어왔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해서 주저 앉았을 것입니다. 이때에도 아브라함이 또 믿음을 썼습니다. 계속 믿음 쓰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두사람이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본문 9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나무를 다 하여 단을 쌓아 놓고서 이삭을 결박하여서 나
무 위에 놓고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때 결박을 해야 합니다. 이삭을 단 마음으로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렇지만 결박을 안 하면 안 됩니다.
단을 다 쌓아놓은 다음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고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이삭이 “아, 하나님께서 저를 받아 주겠다고 하셨습니까? 참 감사 합니다. 저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벌써 아브라함이나 그 아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것은 다 큰 은혜요, 다 큰 복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명령대로 순종하면 하나도 손해가 없고, 전부가 생명이요 전부가 복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므로 단 마음으로 순종을 하면서 허락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박했다는 것입니다. 결박한 것은 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찔러서 죽일 때에 이삭이 자기 정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칼을 붙들고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흠 있는 제사가 됩니다. 칼을 붙들고 뒹굴고 허우적거리고 또 어떻게 하든지 안 죽으려고 하는 것처럼 되면, 하나님께서 달게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박을 해 놓으면 죽일 때에 설사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려도 하나님 앞에 흠 없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결박을 하자고 하니까 이삭이 결박을 했습니다. 또 단에 올려놓았습니다

본문 10절에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급하셨습니다.


10. 하나님께 인정받은 신앙

인정받은 자들

본문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로마서 1:3-4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으셔야 할 때 내놓으심으로 인정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를 바치라 하실 때 독자를 바쳐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생명 내놓아야 할 때는 생명 내놓아야 인정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습니다. 인정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도 인정을 받아야 하고 사람 앞에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다음에 사람 앞에도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뵈뵈 같은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았다고 헀습니다. 로마서16:1-2절에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6:10절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뵈뵈도 인정받고, 아벨레도 인정받았습니다. 뵈뵈는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에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15절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는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인정을 받는 데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고, 사람 앞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참으로 인정받으면 사람 앞에도 점점 인정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인정 못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정 받게 됩니다. 독자를 바쳤다 하면 인정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새도 독자를 바쳤다 하면 그 사람을 다 인정해 줍니다. 물론 하
나님께서 먼저 인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 중에는 ‘독자 바쳤다’고 하면 ‘미쳤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믿는다는 사람 중에서도 이스마엘 교인들은 ‘독자를 바쳤다’고 하면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바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은 ‘독자를 바치는 신앙’이 참이고 진짜 믿음이라고 인정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손양원 목사님을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는 손양원 목사님은 큰 목사이고 진짜 목사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인정받았습니까? 독자를 바칠 때 인정을 받았습니다. 독자를 바치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하고 낙제합니다. 독자를 바치면 인정받고, 인정받은 만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 사람의 인격대로 사용하시고 그릇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인정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그릇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인정되어서 귀히 쓰였습니다. 또 다니엘도 인정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도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귀히 사용하셨습니다.

인정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에 합격이 되어야 됩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하나님이 인정을 하시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만큼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예와 영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인정받은 만큼 강해지고 인정받은 것만큼
하나님께서 귀히 쓰십니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 만큼 약해지고 약한 것만큼 귀히 쓰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또 인정받은 만큼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정받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인정받은 만큼 그 사람을 쓰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정받는 자가 받는 복

본문 16-17절에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인정받은 것만큼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되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만큼 번성이 되어 자손이 많아집니다.

본문 17절의 하늘의 별과 같다는 것은 택한 백성을 말하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는 것은 불택자도 포함한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 가운데도 택한 백성도 많이 나오고 불택자도 많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도 이스마엘 족속은 불택자입니다. 그리고 야곱과 에서 중에도 에서는 불택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바치고 희생을 하고 낮아졌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인격이 커졌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칠 만큼 믿음을 썼습니다. 믿음을 쓰니 믿음이 자라나고 자라난 것만큼 하나님이 귀히 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난 믿음만큼 복
을 받고 창성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독자 바치는 신앙의 자리에 올라가니까 그만큼 창성하고 번성하고 큰 세력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또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만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왕도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해 줍니다. 모르드개를 보십시오. 에스더 6:9-10절에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문에 앉은 유다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행하라”고 했습니다. 모르드개를 왕이 인정을 하니까 왕복을 입혀서 말을 태워 성중 거리를 다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인정한 것만큼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또 인정받은 것 만큼 복을 받게 되고 또 대적의 문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나가서 승리하여 만백성을 정복하게 됩니다. 인정받은 것만큼 대적을 이기고 땅을 정복하는 축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인정받은 것만큼 하늘에서 면류관이 큽니다.
약 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정받으면 면류관이 쑥쑥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면류관이 없습니다. “인정받으면 뭐하고 안 받으면 뭐하나,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믿으면 됐지 독자 바치긴 뭘 바쳐, 남들 다 안 바치는데 나만 바칠 게 뭐 있나, 인정받으면 뭐 하나 천당 가면 됐지”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자기가 자라나고,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존귀해집니다. 만민을 정복하여 원수에게서 승리하며 하늘나라에서도 면류관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경홀히 여기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량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정받는 것이 귀한 줄 알아야 됩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면류관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의 상급이 다릅니다. 군대로 말하면 별을 단 사람과 졸병과 차이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장이나 연대장이 나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참모총장 등은 별 단 사람들이고, 이등
병, 일등병, 상병, 병장 등은 별 안 단 사람들입니다. 별 단 사람끼리도 차이가 있고 별 안 단 사람끼리도 차이가 있습니다. 별 단 사람은 누구나 다 존경하고 인정합니다. 사단장, 그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우리도 사단장과 같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모르고 “독자 바치긴 뭘 바쳐요. 인정받긴 뭘 받아요. 예수 믿고 천당 가면 됐지. 남 다 안 하는데 나만 바칠게 뭐 있어요. 예수를 좀 쉽게 믿어야지 그렇게 힘들게 믿어서 어떻게 믿겠나. 또 사람이 아들도 있어야지 하나님께 다 바치면 뭘 보고 살겠나. 또 돈도 있어야지 다 바치면 뭘 먹고 살겠나. 또 집도 있어야지 늙어서 어디서 살겠나. 다 바치면. 남들 다 안 하는데 따라할 것이 뭐 있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만 낙제가 되고 모든 것이 중단이 됩니다. 그러면 현상유지도 못하고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사안수 받는 사람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목사의 자격이 된다고 인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치므로 이제야 인정을 받았습니다. 전에도 인정을 받았지만 그것은 아래 계단에 있는 것 입니다. 전에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 떠날 때도 말씀 따라 간 것도 인정받은 것입니다. 또 그돌라오멜 4대 연합국을 종 318 명으로 쳐서 이김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인정을 받아 쌓아 올라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차차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인정받아야 됩니다. 또 하나님 명령은 점점 높은 계단을 오르도록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차츰 높은 계단으로 인정을 받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자를 바쳐라’고 하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또 인정받아야 됩니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다 순종을 해서 인정을 받았지만 독자 바치라는 것에서 인정 못 받으면 일 다 틀어지고 거기서 중단됩니다. 그냥 졸업장 받고 나가야 됩니다. 막히고 중단이 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진보가 없게 됩니다.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 암만 해도 아래입니다. 그 위로 못 올라갑니다. 이제 독자 바쳐야 올라갑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 아래 계단에서만 머물길 원하면 안 바쳐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중단 되도 좋다 언제나 아래 계단에서 있으면 된다. 하늘나라 가서도 아래계단, 면류관 없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독자 안 바쳐도 괜찮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는 이 모양으로 살지만 하늘나라 가면은 그래도 면류관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들어가야겠다.” 하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독자를 바칠 것입니다. 그러면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올라가고 진보가 되고 존귀해 질뿐만 아니라 복이 뚝뚝 떨어져 마침내 복덩어리가 됩니다. 그로 하여금 대적을 이기게 하고 만민을 정복하게 해서 이긴 만큼 귀하게 사용 하십니다. 또 하늘나라 가면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이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면 이기고 지게 해 주시면 진다” 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면하나님께서 “지게 해 주셔서 졌사오니 감사합니다” 하고, “이기면 이기게 해주셔 감사합니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낙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부인하게 했으니까 부인하였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부인한 것을 원통히 여기고 회개 했습니다. 예수님 부인한 다음에는 통곡을 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이렇게 진 다음에는 통곡을 하면서 회개를 해야지 ’하나님께서 지게 하셔서 졌사오니 감사합니다‘가 무엇 입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평생 못 올라가고 맙니다. 계속해서 올라가는 가는 것이 신앙인데 못 올라간다고 그만두면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독자를 바치라고 하실 때 안 바치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데려다가 연단시키고 그 사람이 합격이 되면 그 사람에게 다 주십니다.

비록 낙제했어도 베드로와 같이 회개하고 달라붙으면 됩니다. “내게 독자 바치라고 하셨는데 못 바쳤사옵나이다 이런 죄가 어디 있사옵나이까? 하나님 명령을 거역 하였사옵나이다” 하고 순종하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독자를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독자 바치는 과정을 통과해야 올라갑니다. 통과 못하면 언제나 그 아래입니다. 별 하나 못 달아 보고 죽습니다. 바쳐야 별을 달게 됩니다. 순종해야 할 수준이 차차 높아지다가 나중엔 독자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독자 바치는 것은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 여러 시험을 통과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독자를 바쳐야 끝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 바치는 것이 최고 계단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바친 다음에 사라가 죽습니다. 우리도 이 최고계단까지 올
라가야 합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계단마다 합격이 되었는데 이제는 독자를 바치는 마지막 계단에 온 것입니다.독자를 바치는 것은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됩니다. 사실은 자기가 죽고 독자를 살리라고 하면 자기 목숨과 바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생명보다 독자를 더 귀히 여깁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아들하고 바꿔 죽으라면 죽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을 살려 두고 자기가 죽겠다는 사람은 자기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 바치는 것은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계단인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까지 하나님께 바칠 각오를 하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독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안 바쳐도 괜찮지만 그 사람은 낙제이며 그 아래 계단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안 바쳐도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니까, 배짱이 센 사람은 안 바칩니다. 바치라 그래도 안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독자를 안 바치면 인정이
안 됩니다. 바쳐야 인정이 되고 인정되면 오는 복이 한량없습니다. 이 세상 땅덩어리 전체보다 더 큰 것입니다. 세상 재산 전체보다 더 큽니다. 독자를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그만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또 복의 근원이 되고, 존귀해지고, 만민을 정복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천하에 있는 재산보다 더 큰 복입니다. 돈에다 비할 것이 아닙니다. 순교 당하는 것도 독자를 바치는 신앙입니다. 순교 당하면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면류관이 큽니다. 순교 당하는 사람과 독자 바치는 사람은 인정받는 신앙입니다. 독자를 다 바치고 자기 생명을 다 바치는데 세상에 못 바칠 것이 무엇이 또 있겠습니까?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내놓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11. 나홀의 자녀들

본문 20-24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무
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람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고 하였는데 이들은 나홀의 자녀들을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둘째 동생 하란은 롯을 낳은 후에 일찍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여기에는 첫째 동생 나홀의 자녀들의 계보를 기록했습니다.
나홀은 그의 처 밀가에게서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그 여덟째 아들의 이름이 브두엘이었습니다.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리브가는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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