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9일 목요일

역대상 13:1-14 옮겨진 하나님의 궤 이병규목사성경강해 창광교회 계약신학

옮겨진 하나님의 궤
역대상 13:1-14

1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2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5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쌔 6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 7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 9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12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 메어 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1. 다윗이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가져옴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것의 의미

본문 1-4절에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기럇여아림에서부터 다윗 성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고자 한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려고 할 때에 먼저 의논했습니다. 천부장과 백부장과 모든 장수들(군대 장관)과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옮겨오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백성들과 모든 천부장과 백부장과 군대 장관들이 하나님의 궤 옮겨오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궤를 옮겨오는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고 하나님의 뜻이면, 궤를 이곳으로 옮겨오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과 모든 천부장과 백부장과 군대 장관들이 다 좋게 여기고 또 그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고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사울 왕 때에는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일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잘 묻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실패를 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죽을 때에도 전쟁에 나가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사울 때에는 하나님의 궤를 멀리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멀리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언약궤를 가리키는데,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궤를 모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 물어보고 할 생각으로 하나님을 좀 더 잘 공경하려고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겠다는 것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모시고 살 생각,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떠나지 않고 가까이 하고 살겠다는 생각,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물어보고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 하나님을 좀 더 잘 공경하려고 하는 생각, 하나님으로 더불어 살 생각,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할 생각 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작정을 하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다윗에게 모든 복을 다 주시며 다윗과 같이 계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모든 복을 다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 때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각종 죄악을 짓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또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마지막에는 블레셋 사람과 싸우다가 길보아 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복이 떠난 것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복을 모시고 사는 것임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길 때에는 하나님께 물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대로 하려는 좋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5-6절에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 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 위에는 금으로 만든 두 그룹인 천사가 있었고 그 그룹 사이에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하나님의 궤가 있었으므로 그룹 사이에 계신 하나님의 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궤를 모셔오려는 것은 하나님을 모셔오려는 것입니다.

2. 웃사의 죽음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는 중에 웃사가 죽음

본문 7-8절에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면서 나왔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궤를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부터 가져온다고 하였는데 사무엘상 4장 11절에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하였고 사무엘상 5장 1절에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7장 1-2절에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궤가 이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궤를 전쟁 마당에 가지고 나갔다가 블레셋 나라에 빼앗겼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가져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큰 화를 만나 하나님의 궤를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려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낼 때에 바로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궤를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다 놓았습니다. 궤가 이십 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이 “온 족속이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할 것 같으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삼상 7:3).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궤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간 뒤로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회개 운동할 때까지 20년(삼상 7:2),사무엘의 통치 기간 약 40년, 사울 왕의 통치 기간 40년,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 왕으로 있었던 7년 6개월, 또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몇 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럇여아림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궤가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집에 복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윗 성으로 궤를 다시 가져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다 싣고 소로 앞에서 끌게 하고 오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에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돈의 타작 마당이라는 넓은 곳에 왔는데 거기서 소들이 뛰었습니다. 그러자 수레에 실은 하나님의 궤가 흔들흔들하고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소를 몰고 오던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큰 불상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물어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좀 더 잘 공경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겠다는 생각이므로 참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궤를 가져오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소가 뛰게 되었고 소가 뛰므로 궤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궤가 흔들리므로 궤가 떨어질까봐 웃사가 손을 내밀어 궤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웃사가 죽은 이유

웃사는 소가 뛰므로 궤가 떨어질까 봐 붙들었는데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오늘날에는 교회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궤가 흔들리고 떨어지려고 할 때에 그 궤를 붙든 것이 왜 잘못된 것입니까? 가만히 두어서 떨어지게 하는 것보다 소를 붙들어서 궤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은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왜 진노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무시하고 제가 붙들려고 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궤)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궤를 지키고 인도하실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제가 하려고 나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고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인도하시는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궤를 붙들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웃사가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신본주의로 나가야 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웃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본주의로 나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제가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가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치시므로 웃사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같이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이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뒤에다 돌려세워두고 제가 앞장서서 제가 하겠다고 하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이 때문에 웃사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고 제가 하겠다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가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교회를 제가 붙들겠다고 제 주장대로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교역자들을 이동하는 시점에 어떤 곳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목사님 떠나면 교회가 다 무너지고 없어집니다. 그래서 못 보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지, 그 목사가 하느냐, 또 그 목사가 간 지 몇 년이 되었느냐, 그 목사가 있으면 교회가 되고 그 목사가 없으면 무너진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의 교회이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믿고 나가면 잘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믿고 그저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모시고 두렵고 떨림으로 해나가야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소가 뛰면 흔들흔들 하니까 궤가 떨어질 것 같고 떨어지면 궤가 깨질 것 같고 또 깨지면 안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는데 궤를 깨어지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안 깨집니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즉 경외함으로 벌벌 떨면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버릇없이 제 손을 펴서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 웃사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고핫 자손이 메어서 옮겨야 함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궤를 왜 새 수레에다 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메어서 옮기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메어서 옮겨야 되는데, 수레에다가 싣고 간 것이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역대상 15장 13절에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수레에다가 실었기 때문에 실패했으므로 이번에는 수레에다 싣지 말고 메고 올라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는 고핫 자손이 메고 올라와야 합니다. 고핫은 레위의 아들입니다. 그 사람의 자손이 메고 올라와야 되는 것을 수레에다가 싣고 올라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깨에 메야 함

그러면 왜 궤를 수레에다 실었겠습니까? 궤를 메고 가려면 힘이 들기 때문에 운반하기 쉽게 하기 위해 실은 것입니다. 사실 궤가 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궤에 덮는 것이 많이 있으므로 메고 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수레에 싣고 가면 쉽습니다. 고핫 자손이 궤를 메고 가
는 것이 성경대로 된 것이고 원리 원칙인데, 메고 가려니 힘이 들겠으니까 새로 만든 수레에다 궤를 싣고 운반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들여서 만든 새 수레에다 하나님의 궤를 싣고 소에다 메어 끌고 갔습니다. 

‘소들이 뛰므로’라고 한 것을 보니까 소가 한 마리가 아니었습니다. 두 마리 이상의 소에다 메워서 쉽게 끌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쉽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손쉽게 해먹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수레에 싣고 뒤에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인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메어야 합니다. 어깨를 들이 대고 메어야 되는 것입니다. 몸을 바쳐서 땀을 흘리면서 메고 나가야지, “쉽게, 그저 싣고 가자. 나는 메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또 궤를 멜 때에도 여럿이서 다 같이 힘써 메야 합니다. 몇 사람만 힘을 쓰고 몇 사람은 힘을 안 쓰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다 할 테니 나는 안 해도 된다’는 썩어빠진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내가 안해도 교회가 됩니다. 또 죽어도 됩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고 교회가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기 분깃을 잃어버립니다. 자기가 그것을 메고 받듦으로 자기의 분깃과 거기에 대한 복을 받을 수가 있는데, 자기가 힘을 안 썼기 때문에 결국 분깃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는데 물론 하나님의 일은 됩니다. 한 사람이 안 해도 되고 몇 사람이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분깃이 다 없어지니 얼마나 손해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같이 메고 다 같이 힘을 써야 하나님의 일이 잘되도록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힘을 쓴 사람에게 복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 같이 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어깨를 들이 대고 메라는 것입니다. 메면 하나님의 일이 잘되어 나갑니다. 또 자기가 메야 할 분량을 감당하면 그 분깃이 자기에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잘되고 자기도 복을 받고 잘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안 해도 다른 사람이 하기 때문에 잘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 사람이 안 해도 됩니다. 또 그 사람이 죽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기가 안 해도 된다고 하며 안 하는 사람은 쓸모도 없고 죽어도 되므로 빨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할 것이 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으니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빨리 죽지 않으려면 어깨를 들이대야 합니다. 

다시 말하는데 내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만 해야 합니다.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만 해야지, 안해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죽을 생각입니다.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또 다른 사람을 못하게 하지 말고 나도 하고 다른 사람도 하고 다 같이 해야 된다고 해야 합니다. 또 “왜 나만 하느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만큼 안 하므로 다른 사람도 좀 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자기 생각에 자기만 하는 것이지 실은 다른 사람도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고 자기는 자기 일을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대로 자기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세 가지를 하는데 나는 왜 열 가지를 해야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은 쌀 한, 두 말을 지고 가는데 나는 왜 한 가마니를 지고 가라고 하느냐는 것인데, 이 사람이 또 문제입니다. “다 같이 지자. 다 같이 서 말이면 서 말씩 나누어 져
야지, 왜 다른 사람은 한, 두 말을 지고 나는 왜 한 가마니를 지느냐. 이것은 불공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말 지도록 내신 사람은 한 말을 져야 하고 세 말 지도록 내신 사람을 세 말을 져야 합니다. 한 가마니를 지도록 내신 사람은 한 가마니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마니를 지고 가는 사람이나 한 말을 지고 가는 사람이나 서 말을 지고 가는 사람이나 다 같습니다. 각자 자기의 힘을 다 써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한 가마니 지게 하느냐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적게 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은 힘이 적으므로 적은 것을 메라고 한 것뿐이지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일을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므로 그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양을 치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양을 치고, 밭을 갈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밭을 갈고, 짐을 지고 가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지고 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궤를 소에게 메우지 말라

다시 말하는데 하나님의 일은 메고 가야지 수레에 싣고 가면 안 됩니다. 소가 하나님을 압니까? 법궤를 압니까? 소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좋으면 뛰게 되어 있습니다. 소가 기돈의 넓은 타작 마당에 들어서자 좋아서인지, 어떤 일인지 후덕덕하고 뛰어서 궤가 그만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에게 궤를 메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소가 무엇을 안다고 소에게 궤를 메웁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소에게 메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소에게 메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 같은 사람을 장로로 내고 소 같은 사람을 목사로 세우고 소 같은 사람을 집사로 세워서 교회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교회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소 같은 사람에게 궤를 메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혈육에 속한 사람, 생각을 바로 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교회를 메워놓으면 교회가 밤낮으로 흔들립니다. 소 같은 장로를 낸 교회는 밤낮 흔들립니다. 소 같은 목사를 세운 교회도 밤낮 흔들립니다.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끌고 나가지 아니하고, 육신적으로 교회를 끌고 나가고 인본주의로 끌고 나가는데 어떻게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결국 교회가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교회를 메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메우면 교회가 다 어지럽게 됩니다. 목욕탕에 며칠 전에 갔는데 한 대, 여섯 사람이 물에 들어가 둘러 앉아가지고 자기들끼리 어느 목사님이 어떻고 어느 장로님이 어떻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와서 씻는 데에 앉아서도 저희끼리 둘러 앉아 장로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한참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와서 의복을 다 입은 다음에 “어느 교회에서 왔습니까?”하고 물어보니 모 교회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입니까? 라고 물어보니 목사는 아니고 장로들이라고 합니다. 전부 다 장로인데 회의를 하러 왔다고 합니다. 대, 여섯 사람으로 이루어진 그룹인데, 어디에 가서 의논을 좀 하자고 해서 목욕탕으로 온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주동자가 반드시 있는데 말을 많이 하고 설득하는 사람이 바로 주동자입니다. 거기에 주동자가 좋은 사람일 것 같으면 괜찮습니다. 주동자가 소 같은 사람이면 몽땅 다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새 노회나 총회에 모일 때에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선거 운동, 공작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감리교 교단은 감독, 총회장이 되려고 돈 30억을 썼다고 합니다. 돈으로 사람들을 다 매수해서 총회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돈 몇 십 억을 가지고 사람들을 매수해서 자기가 총회장이 된 사람이 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까? 그래서 야단이 났습니다. 한국 교회가 들썩하고 MBC 방송에도 보도되어 그 교회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소에게 수레를 메어놓았기 때문에 절단이 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의 이미지가 아주 나빠졌습니다. 교회는 아주 나쁜 것이라고 인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소에게 궤를 실어놓았으므로 한국 교회 전체가 손해를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 같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궤를 메우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를 세울 때도 소 같은 사람을 내면 안 되고 장로를 세울 때도 그런 사람을 세우면 안 됩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 소 같은 사람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 혈육으로 나가는 사람,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제 맘대로 나가는 사람,무엇이나 이성적으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 등이 다 소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교회를 메워놓으면 교회가 흔들립니다. 자기 고집만 부리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고 자기 주장만 세워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흔들리는데 흔들린다고 제가 붙잡으려고 하면 또 안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흔들릴 때 자기가 붙잡으면 될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고 자기는 자기의 믿음만 지켜 나가면 됩니다. 자기 믿음만 지켜 나가면 하나님께서 다 바로 세워놓으실 텐데 공연히 제가 하겠다고 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웃사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웃사와 같은 그런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베레스 웃사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통분해 한 것은 웃사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가 잘못한 것을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메고 올라와야 될 하나님의 궤를 왜 수레에다 싣고 올라왔을까? 그래서 궤가 흔들리다가 웃사가 죽은 것이다. 내가 왜 하나님의 궤를 소에 싣고 왔을까? 아, 내가 잘못했다”라며 자기가 잘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해서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고 칭한 것입니다. ‘베레스 웃사’라는 말은 ‘웃사를 향하여 치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웃사가 잘못했기 때문에 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소가 뛰었다. 궤를 붙들었기 때문에 웃사를 치셨다’, 다윗이 잘못한 것의 원인을 전부 자기에게 돌려 원통히 생각을 하며,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칭하여 그 지명(地名)이 오늘날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3.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둠

본문 12-13절에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 메어 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당신 앞에 잘못하면 당장 벌을 내리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고 있다가 하나님을 알고 너무 두려워 궤를 자기 곳으로 메어오지 못하고 치우쳐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가게 했습니다. 

본문 14절에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궤가 있던 석 달 동안에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신 집은 복을 받습니다. 다윗이 두려워서 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셔놓았는데, 그 집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신 집은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 다윗이 석 달 후에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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