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죄악과 멸망에 대한 예레미야의 탄식
예레미야 8:10-22
10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1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3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14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찌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15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거민을 삼켰도다 17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18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19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20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1. 여호와께 범죄하면 독한 물을 마시게 됨
선지자와 제사장이 거짓을 행하고 백성의 상처를 고쳐주지 못함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전부 탐심이 가득하고 선지자부터 제사장까지 거짓을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탐심’과 ‘거짓’, 이것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우리가 진실하며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서약한 것을 지켜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양심을 똑바로 써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파선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9). 믿음이 깨진 것입니다. 착한 양심을 써야 그 믿음이 바로 되어 나갑니다.
본문 11절에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상처를 고쳐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다 하나님의 백성의 상처를 고쳐주는 것이 요긴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아니하고 탐심과 거짓으로 이렇게 꾸며나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쳐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슬슬 고치는 척 하고 나가지만 실제로는 안 고쳐주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죄를 책망하지 아니하고 밤낮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는 소리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소리, 복 받는다는 소리, 잘된다는 말 등 귀에 즐거운 소리만 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가고, 고난을 참고, 환난이 들어오며, 대환난이 온다는 말, 이것은 안 하는 것입니다. 오직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는 것만 말하고, 죄를 책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 벌 받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모든 심령의 병을 고치고, 죽은 심령이 살아나 바로 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에서 못 한다고 하면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됩니다. 그 교회는 치료해주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에서 못 한다고 하면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됩니다. 그 교회는 치료해주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 -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의미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또 교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는 소경을 보게 만들어야 되고, 앉은뱅이가 걸어야 되고, 문둥이가 깨끗해져야 되고, 귀머거리가 들어야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야 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예수님께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가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물어봤습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이십니까? 다른 사람을 기다리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서 요한에게 말하기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다,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된 증거를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입니까? 병만 나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귀도 병을 고칠 수 있고, 이 종교에서도 병을 많이 고칩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친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 것은 아닙니다. 적 그리스도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하고 다른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님께서는 심령의 병을 고쳐 주시고, 그 표적으로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에, 심령의 눈을 뜨게 만들어주시고 그것을 알게 해주시느라 육신의 눈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또 영혼이 죽은 사람을 살려놓으시고 그 죽은 영혼 살리신 것을 알게 해주시려고 그 표적으로 육신의 죽은 사람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앉은뱅이도 육신의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영혼의 앉은뱅이, 심령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놓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표적으로 앉은뱅이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고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심령의 것은 하지 못하고 그저 껍데기로만 앉은뱅이를 고치고 소경은 보게 하며 귀머거리는 듣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모든 생명, 강건함, 병 고침을 주시고, 그것을 알게 해주시려고 표적으로 이러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사람 속에 것은 못하고 외부의 껍데기만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같지만 속이 다릅니다. 빈 병입니다. 칠성 사이다를 넣고 칠성 사이다 상표를 붙이고 코카콜라를 넣고 코카콜라 상표를 붙인 것하고, 빈 병에다 코카콜라, 칠성 사이다 상표만 붙인 것하고는 다릅니다. 다른 이 종교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빈 깡통들입니다. 껍데기만 있지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상표를 붙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속에 진짜를 만들어놓으시고 진짜를 모르니까 광고를 해서 알게 해주시느라 여러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행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짜 이적은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행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데에 행해놓으신 것입니다. 심령의 병이 나았으니 육신에 병도 낫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심령의 병이 낫지 못하고 육신의 병이 나으면 그것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또 영혼이 죽은 사람이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고 육신만 살아나면, 그 사람은 며칠 못 가서 또 죽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또 죽지 않았습니까? 육신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큰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영혼이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 큰 것입니다. 살아나는 일, 고쳐내는 일, 심령의 병이 낫는 일, 이것이 큰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심령의 병과 육신의 병을 치유 받는 법
요새도 심령의 병이 나으면 육신의 병도 낫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심령의 앉은뱅이라고 하는 자가 힘을 써서 벌떡 일어섬으로 영적 앉은뱅이가 나으면, 육신의 앉은뱅이도 낫는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강건해지고 힘을 얻고 일어서면, 육신의 병도 여러 가지가 많이 나을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나음을 얻습니까? 교회에 나와야 나음을 얻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주시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
아가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하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주님을 힘입고 주님을 영접하며 온유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께서 감동시키는 감동을 전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전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대로 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어서라’고 하시면 ‘예’하고 힘써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섭니다. 38년 된 병자도 일어서고, 죽었던 나사로도 예수님께서 “나오너라”고 하실 때에 “예, 나옵니다”라고 하면 죽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나오너라”고 하실 때에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새 다리로 올라오너라”고 하시면 “예”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벌떡 올라가집니다. 다 낫습니다. 그러다가 힘이 모자라면 천사가 와서 붙들어주고 뒤에서 밀어줘서 쉽게 올라가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작정하고 순종을 하며 달라붙어야 합니다. 이제는 전적으로 믿으려고 작정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씀대로 따라가십시오. 순종을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고치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살리러 오신 예수님이시고,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앉은뱅이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어서고자 합니다. 일으켜주십시오. 내 손 좀 잡아주십시오’라고 하면 잡아주십니다. 그러면 다 일어섭니다. 그러면 육신의 병도 낫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심령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심령의 병을 무엇으로 고칩니까? 무슨 약으로 고칩니까? 신약과 구약으로 고칩니다. 말씀의 약입니다. 졸음 오는 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치는 약입니다. 어떤 목사님한테 어느 교인이 와서 “요새 잠이 안 와서 큰 걱정인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성경을 보면 잠이 잘 온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인이 집에 가서 목사님이 시킨 대로 성경을 봤는데 채 석 장을 보기 전에 잠을 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인이 생각하기를 ‘야, 이거 참 진짜 약은 약이로구나’했답니다. 신약, 구약이 잠자는 약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는 목사가 성경을 잠자는 약으로 쓰니, 교인도 성경을 잠자는 약으로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구약은 잠자는 약이 아니고, 심령의 병을 고치는 약, 살리는 약, 깨우는 약, 일깨워주는 약입니다. 이 약을 쓰면 다 살아나고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렁텅이에서 올라올 수 있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약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이 약을 잘 지어다가 교인들에게 나눠주어야 되겠습니다.
교역자는 약을 잘 지어야 합니다. 약방에 가면 약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필요한 약을 싹싹 골라내어 적당하게 지어서 환자에게 먹여주어야 합니다. 무조건 무슨 약이 좋다고 해서 콱 쏟아 부으면제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손해를 봅니다. 꼭 처방해야 할 약들로만 지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것을 하나 꺼내고, 저기서는 저것을 하나 꺼내서 조제를 잘하여 먹여야 합니다. 조제를 잘하면 먹기도 좋고 맛도 있고, 또 먹으면 병이 썩 잘 났습니다. 그러나 조제를 잘못해놓으면 먹기에 쓰고 텁텁하며, 먹어놔도 속이 시원치 않습니다. 써도 배에서부터 써야지, 입에서부터 쓰면 안 됩니다. 쓴 게 약이긴 약인데, 입에서는 달고 배에 들어가서 써야 합니다. 약을 잘못 만들면 거꾸로 만들어놓습니다. 입에서는 쓰고 배에서는 답니다. 그것은 못씁니다. 잘 짓는 약은 입에서는 달고 배에 들어가서 씁니다. 즉, 들을 때에는 꿀보다 단데, 그 다음에 나가서 하려고 하면 쓰다는 것입니다. 회개해야겠고, 죄를 다 꺼내야겠고, 미워하는 사람과 다 풀어야겠고, 물어주어야 되는 등 여러 고난이 옵니다. 하여간 배에서 써야지, 입에서부터 쓰면 누가 먹겠습니까? 입에서는 달아야 합니다. 시편119편 103절과 잠언 16장 24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달고 선
한 말은 꿀송이보다 달다’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보면 ‘천사가 요한에게 작은 책을 갖다 먹으라고 하여 먹으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먹을 때는 답니다. 그러나 배에서는 씁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지어다가 먹여야 되겠습니다. 잠자는 약으로 먹이지 말고, 살리는 약으로 먹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리는 약으로 먹일 수 있습니까? 첫째, 교역자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배워야 합니다. 배우는 것이 큽니다. 자기 혼자 일생 동안 연구하는 것보다 한 시간 배우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일생 동안 연구해도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배울 데 가서 배울 수 있는 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기도를 많이 하고, 잘 뽑고, 연구를 많이 해가지고 바로 해석해서 잘 먹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가 해석하기 참 힘든 성경입니다. 예레미야서를 공부시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또 잘 보는 성경도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첫째, 너무 깁니다. 한 장이 얼마나 긴지 보십시오. 또 장수도 52장이나 되고, 내용은 슬픈 이야기만 나옵니다. 좋다는 이야기는 별로 안 나오고, 전부 망한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밤낮 그것입니다. 자, 복 받는다고 해야 좋겠는데 매 장마다 망한다고 하는데, 누가 망하는 것을 좋아합니까? 또 그 다음에 다른 것이 나와야 재미가 있겠는데, 비슷한 말이 계속 나옵니다. 다른 데는 이 사건이 나왔다가 또 다른 사건이 나왔다가 합니다. 계속 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바다로 걸어가셨다가 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축복해주지 않으십니까?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내용의 사건이 나와서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내 같은 것입니다. 매 장마다 죽는다, 또 망한다는 것입니다. 밤낮 그러니 재미가 없습니다.
매 장마다 사건이 내내 비슷합니다. 매 장 망한다는 것이고, 매 장 죽는다는 것으로 다 비슷합니다. 조금 가면 다른 것이 나오지만 처음부터 29장까지만 나가면 대개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 아주 힘이 듭니다. 욥기서는 그래도 이것보다 재미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서가 제일 재미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요리를 해서 교인들에게 양식으로 잘 공급해야 할 것인지, 그것이 참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금 공력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대지를 아까 고치지 않았습니까? 지난 주일날 고천 기도원에서 작성한 대지를 어제 저녁 여기에 와서 또 고쳤습니다. 그리고 끝나면 또 봉원동 기도실에 갑니다. 거기 가서 내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먹일 수 있겠나 하며 약 조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고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가지고 새벽 기도 끝나고
아침에 ‘이것은 이렇게 해야 잘 외우는구나’하고 또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다고 노력은 하지만 그래도 변변히 못합니다. 하여간 살려내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그럼에도 교역자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또 많이 기도하는 가운데 먼저 그 세계에 들어가야 하고, 자기가 먼저 책망을 받아 회개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신령한 이 말씀을 갖다가 맛있게 만들어 교인들로 하여금 잘 먹도록 해야 합니다. 또 먹을 때 달고 맛있고, 먹은 다음에는 배에서 써야 합니다. 먹어놓으면 그 다음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고 이기려니까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보통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께 붙들
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려내시는 것이지, 사람이 살려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려서 그리스도께 이용당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교역자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자기라는 것이 없어지고, 전적으로 주께 붙들려서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역사가 있는 것이 참 귀한 것인데, 그것이 아주 힘이 듭니다. 또 교인들은 말씀을 사모해야 하고, 그 말씀대로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말씀을 영접해서 그대로 일어서야 합니다. 말씀대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서려고 하면 그때에 하나님의 만능이 역사하여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가지고 걸어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때에 새 힘을 얻습니다. 그것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상처가 다 낫고, 그 다음에 모든 병이 다 낫습니다. 상처 받은 것이 다 싸매지고, 평안함을 얻으며, 그 다음에 심령의 안식을 얻고, 새 힘을 얻어서 일어서고, 걸어가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고, 이기지 못하는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
니다. 이제는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고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소리만 밤낮으로 하면 안 됩니다. 듣기 좋은 소리, 복 받는다는 소리, 그저 잘된다는 소리, 요새 이것이 유행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미국의 목사 로버트 슐러의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국내의 여러 목사들이 그 사상을 이어 받았습니다. 첫째는 잘된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말고, 그저 잘 되고 복 받는다는 좋은 소리만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벌써 틀렸습니다. 성경에서는 책망을 하였는데, 왜 책망하지 않고 잘된다는 소리만 합니까? 책망해야 될 것 아닙니까? 망한다고 하였는데, 왜 망한다는 소리를 못합니까? 또 환난이 온다고 하였는데, 왜 환난이 온다는 소리를 못합니까? 이것이 ‘평안하다, 평안하다’입니다. 로버트 슐러의 사상 둘째는 무엇이나 크게 소망을 가지고 하려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야 되겠는데, 무조건 그저 큰 이상만 가지고 이상을 그려놓고 그대로 되려고 맨날 힘을 쓰면 꼭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망한 사람이 저기 한 명 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나가다가 큰 일을 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그대로 힘을 쓰면 된다는 말을 듣고서, 좋은 직장을 사면하고 집 있는 것을 다 팔아가지고 꼭 된다고 한 것을 믿고 큰 사업을 차려놨습니다. 그런데 되기는 무엇이 됩니까? 집 다 날아가고 직장 다 날아가고, 다시 취직할 수도 없고 그만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쫄딱 망하고도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복음교회에 속아서 망했다고 지금 거기 안 나갑니다. 이것이 전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의 병을 고치는 것이 중요한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일심전력을 기울여서 힘을 쓰고, 바로 서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하며 밤낮 평안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평안이 없습니다. 심령의 병이 나아야 평안이 있고, 바로 서야 평안이 있고, 말씀에 서야 평안이 있겠는데, 바로 서지 않고 평안하다고 하면 어떻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평안이 없습니다.
본문 12절에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지도 아니하고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고 아주 뻔뻔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고 하였는데, 다 거꾸러지고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책을 받고 부끄러워하여야겠는데, 뻔뻔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창녀의 이마와 같이 뻔뻔하게 나갑니다. 뭐 하나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때에 거꾸러지고 반드시 엎드러진 자와 같이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암 물을 마시라
본문 13-14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찌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다 없어지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다 없어지며 다 진멸 당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살겠습니까? 거기 가서 다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범죄하면 독한 물이 옵니다. 독한 물을 먹으면 얼마나 손해를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다른 물을 먹으려고 나가면 독한 물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먹으려고 나가다가 다 독한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8장 5-8절
에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을 먹지 않았다는 것인데,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물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평안하고 잔잔하며 영적 생명이 소생하는 물을 먹지 아니하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고 다른 것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그러자 창일하고 흉용하고 독한 물밖에는 남은 물이 없었습니다. 실로암 물이 제일 좋은 물입니다. ‘목 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라고 하였는데,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마시십시오. 좋은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은 생명 샘이요, 안식을 주는 물이요, 만병통치의 물입니다. 병이 다 낫는 물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먹어야지, 그렇지 않고 ‘아, 이거 먹기 싫다. 다른 것을 좀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나가서 세상 물을 마시고, 또 무슨 물을 먹고 돌아가야 그 물은 창일하고 흉용해서 빠뜨려 죽이는 물일뿐입니다. 결국은 독한 물밖에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먹어야 합니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 생명을 살려주는 물이 얼마나 좋은 물입니까? 평안하고 안식을 주는 물, 심령이 소생하는 물, 모든 병을 고쳐주는 물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도 지금 이 물을 마시지 않고 세상 물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다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에라, 그 물보다 세상 물을 좀 먹어야겠다’라고 하면서 고향 물, 친정 물, 동창생 물, 망년회 물, 그 다음에 노라리 물, 구경 물, 온천물, 목욕탕 물 등 무슨 물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못 먹습니다. 노라리하는 물, 방탕 물, 향락주의 물 등은 무슨 물입니까? 흉용하고 창일하여 사람을 빠뜨려 죽이는 물입니다. 그 물을 먹으려고 돌아다니면 정신이 빠져서 죽습니다. 좀 더 나가면 그것은 무슨 물입니까? 독한 물이 되어서 사람의 심령에 손해를 막심하게 줍니다. 우리가 잘못하다가는 쓴 물
을 먹습니다. 그런데 쓴 물을 먹는데 속으로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독사가 마주 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 독사가 옴
본문 15-17절에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거민을 삼켰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제 뱀과 독사가 옵니다. 사람의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가 와서 너희를 문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딴 데로 나가 딴 것을 먹으면, 독한 물을 마시게 되고 쓴 물을 마시게 됩니다.
술 한 잔 먹고 “캬”라고 하는 것이 왜 그런 줄 압니까? 속이 써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텐드 바나 카바레에서 춤추고 나올 때에 속이 씁니다. 속이 시원할 줄 압니까? 춤추고 먹자주의할 때는 “하하하”하고 좋다고 하지만 나올 때에는 속에 쓴 바구니가 들어가 앉아서 속이 시원치 않습니다. 비틀거린답니다. 속이 그저 쓴 바구니 물을 먹은 것 같습니다. 쓰고 찝찝하며,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콱 꼬부라져서 잘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쓴 물을 먹은 것 아닙니까? 껍데기는 기분이 좋지만 속에는 쓴 바구니가 생긴 것입니다.
속에는 쓴 물이 있습니다. 또 깬 다음에 쓴 물이 생깁니다. 돈만 다 없애고 후회가 막심합니다. 세상 낙이라는 것은 누린 것만큼 속에 쓴 것이 있습니다. 정비례해서 있습니다. 세상 낙을 열 근짜리를 누렸으면 쓴 고통도 열 근짜리가 따라오고, 백 근짜리를 누렸으면 백 근짜리가 따라옵니다. 젊어서 방탕한 사람에게는 늙은 다음에 고통이 많이 들어옵니다. 또 사업은 사업대로 밑천이 다 떨어지지를 않나, 회사에 나가도 쓴 바구니, 가정에 들어와도 쓴 것, 속에도 쓴 것, 이렇게 세상 방탕은 쓴 것입니다. 그리고 쓴 것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독사가 잡아먹겠다고 물기 위해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래 사람이 독사가 되어서 물려고 들어오고, 공장에 직공들이 독사가 되어서 물으려고 하고, 또 자기 친구가 독사가 되어서 물려고 하고, 동업자가 독사가 되어서 물려고 합니다. 또 가장 가까운 친척이 독사가 되어서 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실로암 물을 떠나서 무엇을 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쓴 물이 들어오고, 독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독사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잘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큰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의 모든 방법을 써도 치료와 구원을 받지 못함
우상을 겸하여 섬기므로 부르짖어도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함
본문 18-20절에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들이 슬퍼 부르짖지만 구원이 없습니다. 무엇이라고 부르짖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하며 부르짖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또 왕은 시온에 있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겼는데, 조상 때부터 왜 이렇게 되었겠는가?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늘 했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는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있었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는가?”라고 하면서 탄식하며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라고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우상을 섬기다가 그렇게 되었으므로 이제 부르짖어봤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상을 섬겼느냐는 것입니다.
‘추수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백성들이 ‘추수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가왔는데도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구원 받아야 되겠는데, 구원 받을 때가 다 되고 다 지나갔는데, 구원 받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면서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탄식해야 쓸데없습니다. 추수 때는 추수를 해야 하고 여름이 지나가면 곡식이 익어야겠는데, 여름이 다 지나도 곡식이 익지 않고 추수할 때가 되어도 추수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시기가 다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권고가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호와를 격노케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를 시온에 가서 늘 했지만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는가?’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우상을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무리 열심히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헛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고 세 번씩 말하고, 또 “여호와의 집에서 구원 얻었다, 구원 얻었다”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7장 4-10절에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사랑하라
로마서 9장 1-3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탄식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자기가 끊어지기까지를 원하면서 탄식한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는데, 바울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애통인데,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애통입니다. 교회가 자기 몸입니다. 교회가 당하는 것은 자기가 당하는 것이고, 교회가 안 되는 것은 자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애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하고, 자기 집보다 교회를 더 위해야 하며, 자기 집을 짓기 전에 교회당부터 지어야 합니다. 하여간 교회부터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복 받는 길입니다. 교회가 안 되면 자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안 되는데 자기 일만 뻔뻔스럽게 해나가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자기 몸이고 그리스도의 지체인데, 그것이 안 되면 자기가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애통과 교회를 위한 근심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잘되면 자기가 잘되는 것입니다. 자기 집은 없어도 살지만, 교회가 없으면 못 삽니다. 교회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가 생명의 근원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생각하며 애통하는 마음, 근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자기 집에 있는 것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교회에 가져다가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도 제일 좋은 것을 교회에 갖다 주고, 교회에 비가 새면 자기 집 슬레이트를 벗겨서 쓰라고 가져가는 것입니다. 자기 집이 새면 옆에서 좀 자면 될 것 아닙니까? 방도 하나밖에 없겠습니까? 비닐을 쳐도 됩니다. 교회에는 슬레이트를 치고, 자기 집은 비닐로 치면 되는 것입니다. 요새 비닐로 말아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복이 비닐로 지붕을 인 그 사람에게 돌아갑
니다. 하나님의 복이 내려와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비닐 친 집으로 쏙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자손에게까지 복이 쑥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손이 다 잘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니다. 하나님의 복이 내려와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비닐 친 집으로 쏙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자손에게까지 복이 쑥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손이 다 잘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를 위한 애통과 근심, 교회를 자기 몸과 같이 귀중히 여기고, 자기 집보다도 중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사람은 큰 복을 받습니다. 예배당을 지을 때에 자기 집을 팔아다가 교회에 바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집이 없을 것 같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집을 다 팔아다가 교회에 바쳤는데 하나님께서 그것보다 좋은 것을 십 배나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애통해 한 것,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위하여 근심하며 애통해 한 것을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겠습니다. 바울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진 데까지 원한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 저주 받는 것은 제가 저주를 받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이스라엘과 한 몸된 그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끊어지는 것이 내가 끊어지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
라’고 한 것입니다. 또 출애굽기 32장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안타깝게 여기며 애통해 하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합의하시면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심정과 같은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32장 3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하는 사람만 지워버리시겠다고 하였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바로 서야 함
본문 21-22절에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낙망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이 더 깊어졌습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라고 하였는데, ‘유향’은 약 재료로 쓰이는 것입니다. 즉, 길르앗에 좋은 약이 있고 훌륭한 의사들도 있지만 그 약이나 의사들이 유다 백성들이 받은 상처를 치료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사람의 방법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치료 받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죄를 원통히 여겨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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