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기도하면 주심
누가복음 11:1-13
누가복음 11:1-13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 주기도를 가르쳐주심
주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예수님께 청원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절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나옵니다. 본문 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것을 전부 열 마디로 가르쳐주셨는데 그 중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물과 우리 인간을 세상에 낸 목적이고 본래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성도도 존귀해지고 하나님의 복, 아버지의 혜택을 다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룩히 여겨야만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거룩히 여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로 거룩하시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을 거룩히 여기게 되면 그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그 다음에 둘째 마디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모든 성도의 심령 속에 먼저 임하고 나아가서 점점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와 주장이 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다음 셋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인데 이것은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빠졌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셋째 마디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나님 앞에 복을 받게 됩니다. 마귀의 뜻과 인간의 뜻과 같은 것이 다 제거되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져나가는 이 사회와 우리 자신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넷째로 본문 3절에,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 양식이 육적 양식보다 먼저이고, 영적 양식을 날마다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 양식이 먼저이기 때문에, 영적 양식을 받으면 육신의 양식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것은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마지막에 보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라(마 6:31)’라고 말씀하셨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구하라고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영적 양식, 곧 날마다 먹고 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양식은 덤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본문 4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를 지칭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우리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서, 우리 죄 지은 자, 모든 사람을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본문 4절 하반 절에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신 이것은,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먼저 다 용서해주신 것처럼 우리끼리도 서로 용서해서 막힌 것이 하나도 없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말씀 하셨는데,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것은 시험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시험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시험이 있어도 그 시험에 들게 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에 들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물이 있어야만 배가 나가는데, 그러나 배 속에 물이 들어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끝 날까지 언제나 시험이 있는데, 이 말씀은 즉 시험에 들지만 말고 시험을 이기면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기만 하면 큰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이 없는 것보다 더 큰 복입니다. 시험이 있어야만 자신의 부족한 것이 발견되고 또한 부패성도 발견되어서 그것을 다 제거하고 회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없는 사람은 사실은 연단을 못 받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이 좁은 것, 잘못 생각하는 것, 모난 것 등은 시험이 있어야 다 드러납니다. 시험을 이기고 나면 그것들이 다 깨져나가게 되어서 원만한 사람이 됩니다.
시험이 있어도 거기 들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피하려고 하거나 시험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 시험을 이기기만 하면 큰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시험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 사람보다 시험을 하는 사람이 더 괴롭습니다. 욕을 먹는 사람과 욕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욕을 하는 사람이 더 힘든 것입니다. 욕을 하려면 속에 분을 일으키고, 눈을 도끼눈으로 하고, 그 다음에는 눈과 입, 얼굴을 찌그러뜨려가지고 한참 퍼 부으려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욕을 먹는 사람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통과하면 되는 것입니다.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
고, 없으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공의로운 하나님이 다 심판해 주실 것이므로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자고 하는 사람과 가만히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힘이 들까요. 싸움을 하자는 사람이 더 힘이 듭니다. 또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 중에서도 때리는 사람이 더 힘이 듭니다. 속담에도 맞은 사람은 다리를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다리를 오그리고 잔다고 합니다. 맞은 사람은 맞았으니까 다리 쭉 펴고 마음 편안하게 자는데, 때린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고 그것을 승리하며 통과하면 자기가 만들어지며 큰 유익이 됩니다. 시험 없이 다른데 가서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온 그 시험은 자기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돈 주고도 못 사고, 세계 어디에 가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온 시험은 자기를 만들어 나가라고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것으로 주신 것입니다. 원수를 무엇으로 이기라고 했습니까? 선으로, 즉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악을 선으로 이기게 되면 선이 커지고, 마음이 넓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에 들지만 않고 그것을 다 믿음으로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쑥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오는 시험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자라나게 하려고 오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시험을 피해가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팔자를 믿는데, 팔자에게서 도망치면 팔자가 자기보다 앞서 간다고 합니다. 팔자가 사납다고 “이놈의 팔자, 이젠 도망쳐야 되겠다”하고 팔자 도망치려고 한참 도망치다보니까, 무엇이 앞에 어릿어릿 하고 지나가더랍니다. “너 누구냐?”하니까, “난 네 팔자다”라고 하더랍니다. 팔자가 어떻게든 사람보다 앞서가는 겁니다. 그 사람 앞서 기다리다가 “아! 너 이제 오느냐? 같이 살자”라고 팔자가 말했답니다. 자신의 팔자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하면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일 상팔자, 좋은 팔자를 주신 줄 아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팔자 도망치려고 하지 말고 자기에게 있는 팔자가 제일 상팔자로 알고,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걸로 골라주신 줄로 알고, 그것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잘 이겨나가면 그것은 금 주고도 못사는 귀한 것을 그를 통해서 만듭니다. 정금과 같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절을 보면, 주기도 중에 ‘대개’가 빠졌습니다. ‘대개’하고서 몇 마디 더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어떤 사본에는 없고, 어떤 사본에는 있습니다. 여기에는 빠진 것인데, 사본 상 차이입니다. 이 부분이 논쟁점입니다. ‘대개’라는 것은 ‘왜 그런가 하면’이라는 뜻인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 즉 영원한 나라, 영원한 권세, 영원한 영광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떡 세 덩이를 빌려 친구에게 줌
본문 5-6절에,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있는데 밤에 친구가 그 사람의 집에 가서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좀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여행 중에 밤에 자신의 집에 왔는데, 그 친구에게 “먹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의 친구가 떡 세 덩이를 좀 빌리려고 하는데, “일어나 줄 수 없노라”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겠느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친구가 와서 밤에 떡 세 덩이 좀 달라는데 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의 친구가 떡 세 덩이를 좀 빌리려고 하는데, “일어나 줄 수 없노라”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겠느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친구가 와서 밤에 떡 세 덩이 좀 달라는데 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주었을 것입니다.
굳이 벗됨을 인하여서 주지 않더라도, 본문 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하시며, ‘강청’ 아주 강하게 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소용’이라고 되어있는데, 몇 개 정도가 ‘소용’에 맞습니까? ‘떡 세 덩이’를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떡 다섯 덩이를 빌리려고 하지 않고 세 덩이를 빌리려고 했겠습니까? 또 왜 물고기는 빌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오천 명 모였을 때에 음식 몇 개가 지고 먹이셨습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다 세 덩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벗이 왔는데 밤에 떡 세 덩이 좀 빌리려고 했고, 이 사람이 밤에 찾아온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 덩이로 끼니가 되겠습니까? 점심 한 끼니인 오병이어, 한 끼를 먹으려고 해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필요한데, 세 덩이 가지고 됩니까? 여기서 말하는 떡은 아주 작습니다. 성경에 보면, 결혼식하려고 떡을 가져온 것들이 조그맣고 계란 반 알 만씩 했던 것같습니다. 그 계란 반 알 만큼 하는 것은, 열 개나 먹어도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북의 떡은 상당히 커서 그 크기가 손 크기만큼 됩니다. 그만큼 크게 해서 한 두 개 정도만 먹으면 끼니로 괜찮습니다. 굴도 이북 굴은 손바닥만큼 큽니다. 그 떡 세 덩이를 달라고 했는데, 그 떡이 특별히 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 먹인 일화를 볼 때에, 다 그 지방 풍속으로 떡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점심으로 먹으려고 자기 도시락 싸온 것이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인데, 적어도 떡 다섯개는 가지고 있어야만 시장을 면할 수가 있었겠습니다. 그런데, 왜 세덩이를 달라고 그랬겠습니까?
떡을 빌리려는 사람이 그 떡 세 덩이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밤에 찾아온 친구를 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친구가 찾아왔는데 먹을 것을 주려고 해도 줄 것이 없었습니다. 밤에 와서 시장하다고 그러는데 뭐 줄게 없어서, “가만 잠깐 기다리라고 내가 좀 얻어다 준다”고 다른 집에 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려고 했습니다. 떡 세 덩이를 주면 되기에 세 덩이를 달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만약에 더 많이 있어야 될 것 같으면 더 많이 달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세 덩이만 있으면 충분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세 덩이만 달라고 한 것입니다. 떡 세 덩이를 가져다가 친구에게 주려고 했는데 얻어 갔습니까? 예. 얻어가서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떡 세 덩이를 주니까 그 사람이 그걸 잘 먹고 만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떡 세 덩이가 무엇인지 이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빌리려는 사람이 누구에게 주려고 그랬습니까? 자기가 먹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고, 여행 온 친구에게 주려고 빌린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 9절에 나온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세 마디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떡 세 덩이의 신령한 의미
본문 9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떡 세 덩이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받고, 찾고, 열리는 것, 이 세 개가 아니겠는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것만 있으면 그 친구에게 하나님께 받은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열린 것을 보여줄 수 있고, 두드려서 찾은 것을 친구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을 친구에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찾은 것’을 친구에게 줄 수도 있고, 문이 ‘열린 것’을 친구에게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떡 세 덩이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세개가 ‘信, 望, 愛’, “믿음 주시옵소서, 소망 주시옵소서, 사랑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아니겠는가 합니다.
그 친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어야겠는데, 이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께 가서 구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여, 믿음 주시옵소서. 소망 주시옵소서. 또 사랑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를 친구 되시는 예수님께 구해서 받아가지고 찾아온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친구가 밤중에 시장해져서 왔습니다. 흑암 속, 밤중에 돌아다니다가 친구라고 찾아왔는데 무엇을 좀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흑암 속에서 돌아다니던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무엇을 주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좀 있어야 주겠는데, 믿음은 빼빼 말라서 죽은 믿음이고, 사랑도 빼빼 말랐고, 소망은 희미한데 무엇을 친구에게 줄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 가서 “이거 친구에게 좀 나눠주어야 되겠는데 주시옵소서”하며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떡 세 덩이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떡 세 덩이 주시면 가져다가 친구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친구네 집에 갈 때에도, 떡 세 덩이인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가야 됩니다. 친구가 찾아오면, “커피 한잔 드릴까요? 냉면 사드릴까요?, 설렁탕 사드릴까요?” 이렇게 말하지 말고 이 세 덩이를 주어야 됩니다.
우리교회 찾아온 손님은 뭘 제일 많이 대접할 것 같습니까? 이 앞에서 파는 설렁탕입니다. 설렁탕집이 교회 대문간에 박혀있기 때문에 “설렁탕 집에 가자”고 하게 되고, 아예 창광교회 찾아오면 설렁탕 얻어먹을 줄 알고 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설렁탕만 주면 그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찾아온 손님 뭘 주어야 됩니까? ‘떡 세 덩이’인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을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누어주면 그 사람이 만족하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됩니다.
또한 어디에 찾아갈 때에도, 친구네 집에 갈 때에도, 떡 세 덩어리를 가져가서 나누어주십시오. 무슨 떡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의 떡, 소망의 떡, 사랑의 떡을 갖다가 나누어주고 오라는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친구 집에 찾아가서 입도 못 벌리고 성경말씀 한마디 안 해주고, 세상 소리만 하다오고, 쓸데없는 소리만 하다오면 안됩니다. 그것은 다 썩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말고 믿음에 대한 말, 소망에 대한 말, 하늘나라, 내세, 영생에 대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흑암 속에 찾아온 친구에게 이 떡 세 덩어리를 주고, 또 우리가 어디에 갈 때에도 떡 세 덩이를 싸가지고 가서 주라는 말씀입니다. 직장에 가서도 이 세 덩어리를 싸가지고 가서 나누어주면 다 배불리 먹고, 만족하고, 참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런데 그것이 있어야 주겠는데 없습니다. 빼빼 말랐습니다. 없으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가서 예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세 덩이를 주시옵소서”라고 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가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가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할 것은 신령한 것, 즉 하나님을 구하고, 신령한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찾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 하나님의 뜻인데,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걸까?” 그것을 찾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건가? 저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걸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을 찾아야 됩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것은 성경 본문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 명문에 없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걸까?” 하고 찾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걸까? 저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 그걸 찾아야 됩니다. 찾으려 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하는 건 거기 도달하기를 계속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을 찾은 다음에는 거기에 도달해야 되므로 거기에 도달하기를 계속 힘써야 합니다. 안되면 두드리고, 또 해보고, 계속 하는 것이 바로 두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려고 또 두드려 보고, 안되면 또 두드려보고, 안되면 또 두드려보고, 이렇게 계속 두드리면 열릴 날이 옵니다. 안될 것 같아도 되고 문을 열어주셔서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지 않으면 이 반대로 “구하지 않은 자는 못 받을 것이요 찾지 않는 자는 못 찾을 것이요 두드리지 않는 것은 열리지 않을 것이니라”일 것입니다. 같이 한번 합시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반대로 해 봅시다. “구하지 않은 이는 못 받을 것이요 찾지 않는 이는 못 찾을 것이요 두드리지 않는 이에게 열리지 않을 것이니라”. 자신이 어느 편에 섰는지, 열릴 사람인가 열리지 않을 사람인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하고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써야 찾을 수 있습니다. 거저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두드려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서 보배를 발견했는데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구하는 이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저께 우리교회 나오던 할머니 한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순덕할머니라고 75세인데 이전에 절간에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절간에 열심히 다니다가 교회 나온 지는 한 4년인가 되었는데, 삼양동 남 동생네 집에 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서 있다가 세상 떠났습니다. 그 할머니 남동생의 딸 경숙이는 오래전부터 교회에 잘 나왔습니다. 그 남 동생네가 아마 몇 십 년 전부터 나왔을 텐데, 이 할머니는 4년 밖에 안되었는데도 믿음은 그 가족 안에서 제일 나았다고 합니다. 몇십 년 된 그 남동생의 부인이나 그 딸보다 이 할머니의 믿음이 쑥 앞서나간 것입니다. 그 할머니가 새벽에 일찍 나와서 세수하고 기도했었는데, 예전에 절간에서 하던 습관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해 매일 새벽에 일찍 나와서 세수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75세인데도 지나간 주일까지 여기에 나왔다고 합니다. 아주 정성이 있었던 할머니입니다. 그래서 몇 십 년 전부터 다니던 사람도 그 할머니한테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가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바람에 그 가족이 조금 덕을 입었다고 합니다.
왜 몇 십 년 전부터 나오던 사람의 믿음이 4년 정도 나오는 할머니에게 떨어졌습니까? 구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는 매일 아침 일찍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기도했는데 이전부터 나오던 사람이라도 기도를 잘 안 하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만 도달하겠는데 이것을 하지 않으니까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할머니 4년만 믿었지만 이제 하늘나라 가보면 몇 십 년 믿은 사람보다 상급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어제 소천했다고 하는데 자기가 난 자녀도 없고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자녀 많은 집 할머니보다 더 믿는 일 잘해가지고 갔습니다.
자녀 많다고 자랑하지 말고, 하늘나라 가면 그렇게 믿은 할머니가 더 잘 되는 것인 줄 알아야 됩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는다”라고 하셨는데, 누가 깨어서 기도를 많이 하고, 누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 달음박질 하려고 바른 진리를 찾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거기에 도달하려고 문을 두드리느냐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바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본문 11절에,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나 생선이 먹고 싶습니다. 생선 고기 좀 주십시오”하면, “옛다 이 뱀이나 먹어라”하면서 꾸불꾸불한 뱀을 주어서 아들이 뱀에게 물리게 만들 그런 아버지가 있습니까? 아들이 생선 달라고 자꾸 그럴 때, 뱀을 잡아다가 “이거나 먹어라”하는 그런 아버지는 없습니다. 또 본문 12절에, “알을 달라고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전갈이 동그랗게 생긴 모양입니다. 전갈을 잡으면 쏘여서 상당한 고통을 당한다는데, 자녀에게 “이거나 먹어라”하며 알 대신에 전갈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서는 떡을 달라하면 무엇을 주지 않는다고 그랬습니까? “돌을 주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야 이거나 갖다 먹어라”하면서 찰떡같은 하얀 차돌을 주어서 그거 먹다가 이 다 부러뜨리게 만드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라는 말씀은 사람은 다 악하다는 것입니다. 다 이기주의가 되어서, 피난 나갈 때 아이 업고 나가다가 아이가 우니까 자기가 다 잡히게 생기니까 내려놓고 가는 사람도있고, 또 삼팔선 넘어갈 때 배 타고 넘어가다가 아이가 우니까 발각되면 다 죽겠다 싶어서 물에다가 아이를 빠뜨리고 가는 일도 있습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인간의 이기주의는 그만큼 악합니다.
그렇게 악함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준다’는 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그것에 도달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망애(信望愛), 성령으로 ‘신망애’가 커지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망애’의 은사를 더 많아지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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