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적과 바리새인과 율법사 책망
누가복음 11:29~41
누가복음 11:29~41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기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 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 요나의 표적
본문 29-30절에,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표적을 보여 달라고 바리새인들이 구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이적을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이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적을 보여 달라고 와서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적주의’입니다. 이적이 있으면 큰 것인 줄 알고 이적이 없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았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와서도 무슨 표적 좀 보여 달라고 하며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해 답변 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답하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이외에는 다른 게 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요나가 밤낮 삼일 삼야를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났습니다. 사흘 동안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가르친다고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땅속에 장사 지내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정한 표적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칩니다.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는 것일까요? 이 악한 시대가 죄로 말미암아 다 멸망하게 되었는데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구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만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죄 사함 받기 전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으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사함 받아야 되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피 흘림이 아니면 죄 사함받을 길이 없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피가 아니면 죄 사함 받을 일이 없습니다. 또 보통사람의 피 가지고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 자기 죄 값으로 자기가 피 흘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셔야만 만대 만민의 택한 백성의 죄를 사하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만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적을 암만(아무리) 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해서 죄 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이 있었다고 해도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적으로 불이 내려왔으면 무엇 합니까? 또 죽은 사람이 살아났으면 무엇하겠습니까? 보통사람은 또 다시 죽을 것인데... 아무리 큰 이적이 있어도 그것 가지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의 피를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서만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아무리 해도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요긴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표적밖에는 다른 것은 보일 것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또 봐도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암만(아무리) 봐도 쓸데가 없습니다.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음
본문 30-31절에,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가 그러하리라”라고 했는데, 요나가 삼일 삼야를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표적이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땅속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이적이 되신 것입니다.
또 31절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라고 했는데, 스바 나라는 먼 나라입니다. 솔로몬 때 남방의 스바 여왕이 먼 남쪽에서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듣고 유대나라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그 지혜에 감복을 하고 그 지혜를 배워가지고 갔습니다. 그렇게 하고 가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으로 압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왕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모든 지혜를 배우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는데,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일어나서 그 시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하는 것 입니다. 솔로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바로하게 됐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솔로몬보다 더 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느냐?” 하고 책망을 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했습니다. 40일후에 니느웨 성이 망한다고 전도했는데, 요나가 며칠 동안 전도했다고 했습니까? 요나가 하룻길을 행하며 전도 할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죄 가운데 있던 것에서 내려앉아서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다 회개 했다고 했습니다. ‘하룻길 행할 때’에 외치니까 니느웨 성이 회개 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하룻길 전도를 했음에도 그들이 빨리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더 강퍅한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수님 당시 때 사람들을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느냐?”하고 책망할 때에 그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회개했고, 남방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고도 회개했는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해 가지고 아무리 책망을 해도 안 듣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또한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죄 받음이 크다는 것입니다.
2. 등불을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라
본문 33절에,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여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등불이 움 속에 있으면 그 빛이 움 속에만 비치지 다른 곳에는 비칠 수가 없습니다. 등불을 켜서 여러 사람에게 다 비춰져야만 모든 사람이 그 빛 가운데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겠는데, 움 속에 등불을 가둬놓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빛이 있으나 마나입니다.
또한 ‘말 아래 둔다’는 것은, 좁은 말 아래 둔다는 것인데, 등불을 켜서 말을 갖다가 씌어놓는다는 말입니다. 좁은 말 아래에 등불을 씌워놓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이 밝습니까? 집안에 등불이 있으나 마나입니다. 말로 덮어놨는데 그 안에 불빛이 있다고 한들 무엇 하냐는 말입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예수 믿는 사람
그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빛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등불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등불 위에서 세상에 빛을 비추어 내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빛을 내보내게 되어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세상에 알게 합니다.
또한 중생한 영혼이 있는 것을 알게 하고, 내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고, 영혼이 살아있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알게 한다는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안 믿는 사람은 다 알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천당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은 사람이 천당을 비쳐주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모든 일하나 하는 데에서 전부 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내세와 영생과 영혼이 있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수님의 구속하심’ 이걸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추어 내보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하며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 떠난 다음에 천당이 있다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떠나면, 다 와서 찬송 부르고, 천당 간 것을 증거하고, 또 가족들도 천당을 바라보게 되고, 기도를 받고 소망을 가집니다. 죽은 사람이 안 믿었었다면 절망 가운데 빠졌을 텐데, 믿었으니 소망을 가지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참 천당이 있다 과연 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하며 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빛입니다.
‘말’과 ‘움’에 빛을 가두지 말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그랬는데, 등불을 켜 놓고 이걸 무엇으로 덮습니까? 캄캄한 움 속에 잡아다 놓는다는 말입니다. 또 말 아래 잡아다 놓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은 무엇인가 하면, 곡식을 되는 ‘말’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물욕’ 속에 담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저 돈 밖에 모르고 먹을 것 밖에 모르고, 욕심 속에 담았습니다. ‘물욕’ 속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돈이나 욕심으로 물욕을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믿
는 사람의 등불이 가려집니다. 안 믿는 사람이 “저거 욕심쟁이다”라고 하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보이는 것부터 고쳐라”하는 말을 듣는 사람은 등불을 어디다 둔 사람입니까? 말 아래 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말’만 보이는 사람입니다. 등불이 안보여 집니다. 그 사람의 욕심만 보이는 것입니다. 돈만 알고, 자기만 알고, 그저 돈이라 하면 사족을 못 쓰고, 연보하는 데에는 벌벌 떨고, 구제하는데 벌벌떨고, 일꾼들을 학대하고, 속여 먹이려고 하는 돈 만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움’은 무엇입니까? 요새는 ‘움’을 잘 모를 것 같습니다. 움은 지하실과 비슷한 것입니다. 땅을 깊이 파서 위에 지붕 하나 덮어놓고 움을 만듭니다. 움 봤습니까? 움 어떻게 만듭니까? 땅을 파고 나무를 대고 지붕을 덮고 거기다가 흙을 덮는다고 합니다. 땅을 파고 만든 움에다가 등불을 갖다 놓았는데, 그 빛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말은 물욕이라고 볼 수 있고, 움은 캄캄한 구덩이 비슷한 것인데, 자기중심, 이기주의, 욕심, 허망한 생각, 그런 것이 움 같습니다. 공명정대하게 내놓고 뭐라고 하지 아니하고 뒤에 가서 수군수군하고, 허망한 마음을 가지고 음침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공명정대하게 내놓을 수 없는 음침한 생각, 음침한 생활,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이 다 빛을 움 아래 둔 것입니다. “군자는 대로행이라”하는 말이 있는데, 군자는 공명정대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뒷골목에서 수군수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움에 있는 것은 뒷골목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이고, 남 몰래 자기 볼 장 보는 것이고, 죄 짓는 것이고, 음침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공명정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빛을 그 움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움에다가 덮어 놓으니까 등불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있으나 마나입니다. 이기주의, 당파심이 다 움입니다. 또한 지방색, 그런 것이 다 움입니다. 우리 한국에 지방 관련한 파벌이 아주 악한 것입니다. 이런 악한 독소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지방에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악한 독소인데,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이것을 빼버려야 됩니다. 이거 안 빼버리고는 한국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파 싸움만 밤낮 하다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방색을 가집니까? 자기 지방 사람은 다 괜찮고, 자기 지방 사람끼리 당파를 지어 무엇을 하려고 하고, 악한 행동들을 합니다. 자기 고향에서 떠나 서울 온 사람도 자기 고향사람들과 당파를 지어서 무얼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울 왔으면 서울사람이 돼야지 고향당파를 왜 맺느냐 말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자기 지방 사람은 그 행실이 잘못됐어도 옳다고 생각을 하고, 당파싸움에 눈들이 어둡습니다. 당파싸움에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 지방 사람은 행실을 잘못했어도 잘못 된 것을 모릅니다.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지방사람 아닌 사람은 옳아도 무조건 옳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눈이 어두워져서 그런 것입니다. 당파싸움 하느라고 움 속에 다 엎드러져가지고 어두워졌습니다. 당파싸움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지방 움 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지 않으면 결국은 다 망치고, 관둘 것입니다. 어떤 지방의 당파를 모으면 다른 지방은 그 지방과 반대로 당파를 모으는 것이 또 생길 것 아닙니까? 그러니 밤낮 싸움으로 다 망할 것 아닙니까? 뭣 때문에 그러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빛을 움 속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말 아래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먹자주의, 자기 일을 따라가는 주의, 세상 것으로 하나님을 삼는 주의, 이것을 다 버려야 되고, 움 속 생활을 다 버려야 됩니다. 움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뒤에서 우물우물하지 말고 공명정대하지 못한 것에서는 아예 나오라는 것입니다. 딴 데 가서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딴 데 가서 남을 비방 하는 것은 움 속 생활입니다. ‘등불을 켜서 움 속에 두지 않는다’는 생각을 언제나 늘 마음에 가지고 움 속에 두지 마십시오. 다 회개하고 나와야 합니다.
등불을 등경위에 두어 빛을 비추라
말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둔다고 했는데 등경이 무엇입니까? 등불을 그냥 놓는 것이 아니고 등경을 하나 놓고 그것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등불을 올려놔야 여러 곳에 비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희생하고 진리만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희생하고 진리만 높이는 게 등경위에 두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어서는 진리를 높일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낮아지는 자세,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만 되겠다’는 정신, 진리만 높이겠다는 정신을 가져야 등불이 멀리까지 비취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등경이 되어 엎드려서 나아가야 합니다. 등경이라는 것은 등불 아래 엎드러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등경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위에다 진리를 올려 놓으니까 진리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만 높아지고 진리만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멀리까지 등불이 비추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본문 34절에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고 했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심령의 눈입니다. 심령의 눈이 등불입니다. 영이 밝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나쁘면 온몸이 다 어둡게 됩니다. 자기 심령의 눈이 어두워지면 모든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판단이 바로 안 됩니다.
어두운 데서는 판단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눈이 밝아져야 판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본문 35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36절에,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에 있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등불의 광선, 그 빛이 온전히 비춰지는 것처럼, 이렇게 등불을 밝히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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