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일 금요일

사도행전 1: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사도행전 1:1-4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모든 것들에 관하여 기록하였는데, 
1:2 곧 그분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명령하신 후에 들어 올림을 받으신 날까지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1:3 그분께서 고난을 받으신 후에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 계심을 확실하고 많은 증거들로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다. 
1:4 그분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기록한 때는 주후 62년경이며 기록한 장소는 로마 옥중입니다. 누가가 기록했다는 말은 없지만,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는 의학적 술어가 많고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누가복음 1:3에 “데오빌로”라는 말이 있고, 사도행전 1:1에 “데오빌로”에게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또 누가복음 24:49에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1:4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한 것을 보아 같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 확실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누가가 기록했다고 봅니다. 누가복음도 누가가 기록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전통이 누가가 기록했다는 전통이 있습니다. 또 바울을 가까이 내내 섬기며 따라 다니며, 의학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은 누가 밖에 없습니다. 누가가 바울을 따라 다녔고(빌 1:24, 딤후 4:11), 사랑받는 의원 누가라고 하였습니다(골 4:14).

본문 1-2절에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데오빌로에게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데오빌로 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하”라는 것을 보면 데오빌로가 어떤 개인의 이름이며, 총독 이상으로 높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누가복음을 먼저 써 보냈고, 두번째로 사도행전을 써 보냈습니다. 먼저 쓴 글이라는 것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를 말합니다.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란 부활을 말합니다. 많은 증거로 부활하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셨고,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본문 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였다는 것은 감람산에 모였다는 것입니다(12절).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5:26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 나를 증거하실 것이란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6:7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떠나가면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는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보혜사를 보내주시기로 약속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기도를 해야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 때에는 아직도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기 전입니다.

지금은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즉 오순절에 강림한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내내 같이 계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그 때에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에도 물론 성령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할 때에도 성령으로 한 것입니다. 또 마리아에게 성령이 충만했고, 세례 요한, 엘리사벳, 시몬 등 그들도 다 성령으로 모든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은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는 2장에서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아직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기 전이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여야 보혜사 성령이 임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기도하면 보혜사 성령이 임할 수 없습니다. 즉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여야만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되어서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기 때문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 47-49에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에 머물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 운동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족속, 즉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게끔 하나님의 섭리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하여야 간절한 기도를 하겠기 때문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해야만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 곳이며,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거기에 다 있고, 또 다 잡아 죽이려고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아니 할래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안하면 죽겠으므로 간절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기도하러 데리고 가면 졸기만 하였던 것인데, 제자들이 어디 간절한 기도를 한 번이라도 해 보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죽을 통에 갔다가 빠뜨려 놓고, 이제 거기서 떠나지 말고 “네가 사느냐? 죽느냐?는 결판을 거기서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넌 거기서 죽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너는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 빠뜨려 놓아야만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지 않고 농땡이만 부리는 자일지라도 이러한 환경에 빠뜨려 놓으면 결사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안할 수가 없습니다.
6. 25 사변 전에 물론 기도를 하긴 했지만은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많이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제일 간절한 기도를 했는가? 하면 UN군이 들어왔다가 후퇴할 때입니다. UN군이 들어온다고 해서 나왔는데 공산군 패잔병들이 UN군들보다 먼저 들어왔습니다. 숨어 있다가 나왔으면 괜찮을 것인데, UN군이 들어온다고 하는 바람에 다 나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들어온다는 유엔군은 들어오지 않고, 인민군 패잔병들만 몇 백명이 들어왔습니다. 인민군들이 “숨었던 놈들 다 잡아라”하며 돌아다닐 때에 할 수가 없어서 조수근 장로님이 김칫독을 집어 넣으려고 파 놓은 구덩이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짚으로 덮었습니다. 그래도 인민군들이 와보면 구덩이 위에 짚단을 척척 올려놓은 것을 보면 다 알게 되어있단 말입니다.

조 장로님 부인은 인민군이 들어오나 안 오나 망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 집이 들판에 있는데 이젠 총 가지고 내려와서 불과 몇 분 아니면 와서 짚으로 가려 놓은 것을 들추어 보면 다 들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자, 기도해서 이젠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하며 그 때에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때에 간절히 피 땀 흘리는 기도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
를 들어주셨습니다. 인민군들이 대문간까지 왔는데 UN군 제트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민군들이 대문간까지 왔다가 다 달아났습니다. 제트기가 한 십 분만 늦게 왔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찰라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기도 안 하던 사람도 간절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안 하던 사람도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새벽기도 안나갔던 사람들도 그 때에는 열심히 기도 합니다. 기도 하는 것 밖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만이 참된 기도를 하겠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되겠으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생명을 바쳐놓고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임

주님의 증인이 되는 생활은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놓고 헌신, 봉사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게 하고 기도를 시켜야만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고, 또 몸을 하나님께 바쳐서 봉사하는 생활을 일생동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3. 당시의 예루살렘 상황

그 다음에는 그 당시 예루살렘의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그 당시에 예루살렘의 상황은,

교회 박멸운동이 있는 곳
그 때에 예루살렘은 마귀의 권세가 득세하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1 :9-10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다니면 실족하고,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 지금은 열두시이지만, 조금 있으면 밤이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53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서 잡히실 때부터 어두움의 권세가 시작이 되어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 또 부활 승천한 다음에도 계속 어두움의 때라는 것입니다. 다니엘 9장에는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 9:27에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곳
당시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아 죽인 곳입니다.

예수님 믿는 자를 죽이려고 하는 곳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인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곳입니다.

제자들이 숨어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곳
제자들이 숨어서 다 문을 닫고,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의 상황인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니고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목적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목적은, 생명을 내놓고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임
생명을 내어 놓아야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즉 생명을 내어 놓아야만 말씀을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을 내어 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켜 나가셨으며, 바울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알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올라갔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을 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고, 또 왕의 진미를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떠났습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서 가는 것은 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가면 요나와 같이 풍랑을 만나고, 모든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환난의 바다에 던지움을 당하고, 고기 뱃속에서 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떠나면 사망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고,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는가? 내가 언제까지 말씀을 떠나지 않겠는가? 내가 생명을 내어 놓고 말씀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의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말씀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그것을 시험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 어려운 환경 가운데 빠뜨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자기 생명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그 말씀을 떠나지 않고 따라가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지키나, 안지키나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 가운데 빠뜨리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에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하였는데, 왜 임하는가? 그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단이 임합니다.

신명기 13:1-3에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말씀을 순종하는지? 알려고 너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명기 8:2-3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고 여러 가지 시험들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그것을 시험하려고 여러가지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쳐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에는 잘 믿는 것 같고, 성경 말씀대로 잘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을 통에 빠지면 성경 말씀을 헌 신짝 내어 버리듯이 내어 버리고 세상 따라가고, 돈 따라가고, 사람 따라가고, 사업 따라갑니다. 믿는 것을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떤 성도가 주일도 잘 지키고 믿음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집짓기를 시작을 하더니 일군들에게 조반 해주고, 점심 해주느라고 주일예배도 나오지 못합니다. 목수들에게 주일은 교회에 가야 된다고 하였더니 목수들이 우리는 주일 같은 모른다고 하며 주일에도 우리는 와야 되겠는데 밥을 해 내라는 것입니다. 밥을 안 해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일에 목수들 밥 해주느라고 예배당에 못 나옵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고 했는데 목수들에게 졌고, 마귀에게 진 것입니다. 주일에 일하자고 하면 처음부터 주일에는 일 못한다고 말했으면 넘어가지 않았을텐데 그만 한마디도 못하고 넘어가서 예배당에 못 나오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믿음 다 팔아먹고, 말씀 다 어겼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원칙대로 하는 것입니다.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칙이 무엇이냐? 일감을 맡았으면 조반 먹는 것은 자기네가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참이나 해 주는 것입니다. 또 술을 사다 달라고도 하는데 그것도 원리원칙대로 중참만 해주기로 했으니 “못합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중참도 못한다는 원칙을 세우면 믿음에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다른 데로 가겠다고 하면 다른 사람 데려다가 집을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집을 못 짓는다고 해도 믿음을 지켜야지 집 짓겠다고 믿음을 다 팔아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썩어질 육신의 집 짓느라고 영적 집을 다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네가 순종을 하는지? 아니하는지? 또 생명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기는지? 안 여기는지?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쳐서 생명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말씀을 안 떠나면 그것은 제자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자격을 만들려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자격을 만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생명보다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증인의 자격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자격을 만들려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능력을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임

영감의 능력을 자기 생명보다 귀히 여겨야 됩니다. “은혜 받지 못해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안됩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할 수 없다, 말씀과 능력이 생명이므로 나는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는 결심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면서, 그 능력을 갈망하고 사모하는 그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능력을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말로만 전해서는 안됩니다. 또 말로만 믿어서도 안됩니다. 능력으로 전해야 되고, 성령으로 이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능력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얼마나 능력을 사모하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사모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힘입으려고 애를 쓰냐?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은혜 받으려고 애를 써야 되고, 은혜 받지 못하면 안될 줄 알아야 됩니다.
교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말로만 하면 되는 줄로 아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책이나 사다 보고, 요새 설교집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설교집 책 사다가 한번 읽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면 교인들의 영이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성령과 능력으로 이 복음을 전하여야 생명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능력으로 이 복음을 전하려고 힘을 써야 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기도가 많아야 됩니다. 즉 많은 기도를 해야 됩니다. 교역자들이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여기 우리 기도원 산에서 집회할 때에는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사경회 시작하는 날은 아침 일찍부터 와서 기도도 좀 하고, 집회장소 청소도 좀 하라고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데, 저녁 때에야 슬슬 올라온단 말입니다. 왜 늦었냐?고 하면 심방하다가 늦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심방, 다른 때에는 안하다가 왜 사경회 하는 날에 하는가? 말입니다. 또 자기만 혼자 심방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부인과 또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니면서 심방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교인들을 살릴 수 없습니다.

능력과 성령이 아니면, 즉 영권이 아니면 생명들을 살릴 수 없습니다. 자기 영력을 길러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과 능력으로, 즉 말씀을 영권으로 교인들에게 먹일 때에 그 시간에 영혼이 벌떡 일어섭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해야 되고, 능력을 사모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탑을 쌓으려고 해도 공력이 많이 들어가야 됩니다. 많은 공력, 많은 기도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권이 조금씩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할 생각을 안합니까? 그저 기도 안하고 이 사람 설교집, 저 사람 설교집 다 모아다 비빔밥을 해서 교인들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처음 듣는 소리이다, 잘한다” 하지만 영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영이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자기의 영이 먼저 자라나야 다른 사람의 영을 살려 냅니다. 자기 영이 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영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하여간 능력을 사모하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귀히 여겨서, 능력에 참여하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생명을 내놓고 자기 사명을 수행케 하는 자가 되게 하게 위해서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있어야만 생명을 내놓고 자기 사명을 수행 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환난이 없는 곳에서 기도하면 자기 사명을 생명 내놓고 말씀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고는 안될 만한 환경가운데 빠뜨려야 자기 생명보다 사명을 더 귀히 여깁니다. 그래서 “나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사명이 중요하다”면 예루살렘을 안 떠날 것이고, “사명보다 생명이 귀하다”고 하면 예루살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보다 사명을 더 중히 여기고, 그 사명을 수행케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고 자기 위치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임

하나님이 각자에게 각각 다 세워놓은 자기의 위치가 있습니다. 즉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리를 생명 내어 놓고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예루살렘에 있거라”하면 생명 내어 놓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가 자기의 위치를 떠났습니다. “넌 천사로서 이런 위치에 있으라”고 하나님이 정해 주셨는데 그만 천사가 교만해서 그 위치보다 더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위치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서 마귀가 된 것입니다. 유다서 6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자리가 다 있습니다. 거기서 탈선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의 자리, 집사의 자리, 장로의 자리, 또 주일학교 반장의 자리, 목사의 자리 등 다 자기 위치가 있습니다. 며느리는 며느리의 위치, 딸은 딸의 위치, 선생은 선생의 위치,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위치 등 다 자기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떠나지 말란 말입니다. “이제 이 자리가 너무 힘드니까 떠나자, 이것은 못 해먹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집 안 왔어야 될 것인데 그만 좋을 줄 알고 왔더니 와보니 이것은 파이다, 보따리 싸자”하는 것은 자기 위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 위치를 떠나면 안 됩니다. 자기 위치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에 어떠한 어려움이 오고, 십자가가 오고, 고난이 와도, 그 위치에 똑바로 서야 합니다. 탈선하면 안됩니다. 넘어가지도 말고, 또 뒤로 물러서지도 말고, 앞으로 나가지도 말고, 높아지지도 말고, 스스로 포기하지도 말고, 자기 위치에 서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나가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온다고 해서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고, 배은망덕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에게 잘 해줄 때에는 좋다고 하고,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또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자기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허락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리 환난이 오고, 기독교 박멸정책이 오고, 또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인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사단의 위가 지금 득세해 나가는 그런 장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그대로 붙들고, 그 말씀에 언제나 확실히 서 있으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환난을 당해야 됩니다. 거기서 참아야 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참으면서 능력이 입히워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와서 입히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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