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일 금요일

베드로전서 1:1-4 구원찬송.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구원찬송
베드로전서 1:1-4

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1. 구원예정(예정예지:豫定豫知)

본문 1-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이라고 했는데, 예수라는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이고(마 1:21),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예수님은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선지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의 죄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 나타내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우리를 죄에서 점점 정결케 하시는 도덕적 완성을 책임지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며, 예수님의 선지자의 직분은 우리에게 신령한 지식 면을 책임지시고,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 만들어 나가시며, 예수님의 왕직은 우리에게 능력을 입혀주시는 책임을 지시고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하면, 우리를 죄 가운데서 불러내시어 우리의 도덕 면과, 지식 면과, 능력 면을 책임지고 완전케 역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가리켜 사도라고 했는데,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보내주셔야만 사도입니다. 열 두 제자를 예수님이 직접 불러서 보내셨습니다. 가룟유다 대신에는 사도바울을 ‘직접’ 불러서 보내셨습니다. 베드로서는 베드로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특별히 ‘나그네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란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고, 또 오래 전부터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본국인 유대를 떠나 있기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7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얼마 있다가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성도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창세전에 택자를 예정하심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예지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정예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택자로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미리 알았다”는 것은 알아주었다는 것이고, 알아주었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택하실 때에, 미리 사랑해서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로마서 8:29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정하셨다는 뜻은, 미리 알아준 사람을 정했다는 뜻입니다. 알았다는 말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3:2에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고 했는데, 다른 백성은 하나님이 몰랐다는 뜻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이 알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알아 주셨다는 것은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택한 백성을 하나님이 창세전에 ‘사랑하셔서’ 택한 이유는 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줄 대상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줄 대상자를 내기로 작정하시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부터 사랑하셨는가? 하면,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내기로 작정하기 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주시려고 우리를 내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내기로 작정하신 것이 먼저가 아니고, ‘사랑이 먼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택자임

우리가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는 무엇을 보고 압니까?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택한 백성이고, 예수를 구주로 안 믿으면 택한 백성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를 안 믿으면 그 사람은 불택자입니다. ‘내가 택한 백성인가? 택한 백성이 아닌가?’를 알려면,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지면 택한 백성이고, 예수님이 구주로 안 믿어지면 택한 백성이 아닌 줄로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5:1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입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까? 창세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즉 사람을 내기로 예정하기 전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기로 예정하기 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우리를 내셨고, 우리를 내신 다음에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게 해서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8-9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물
로 예수를 믿게 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증거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말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무슨 하나님이냐?, 예수가 무슨 만물 창조자인가?,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나?”하며 터무니 없는 말로 듣습니다. 그러나 택한 자들은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그러나 믿어집니다. 그것이 참 신기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 믿어지고, 장사 지낸지 사흘만에 살아나셨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신 것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믿는 사람들을 기이한 사람들로 보며 이해를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터무니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사람들 생각으로 터무니없는 그것이, 택한 자들에게는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어지는 것은 사람이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믿으려고 애써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택자를 내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행동으로 볼 때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생긴 것은 게달의 장막과 같습니다. 우리의 속은 시꺼멓게 다악독이 가득 찼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시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생각해보면 참 신기합니다. 생기기를 사랑 받을 만하게 생겼나?, 또 속은 사랑 받을 만한 속인가?, 속은 다 시커먼 악돌이고, 사랑 받을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고, 속에는 욕심이 가득한 자들인데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변함 없이 사랑하십니다. 창세전부터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죽는 날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지를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가 하면, 성경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 믿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사랑하시는 줄로 압니다. 또 창세전부터 사랑한다고 하셨으니까 창세 전부터 사랑하시는 줄로 압니다.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것을 압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성경에 아버지라고 했으니까 알고, 또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압니다. 이것은 외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내증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입니다. 또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성도의 아버지가 분명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분명합니다. “아바 아버지”란 하나님을 향해서 본능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게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창세전부터 사랑하십니다. 잘못해도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잘못하면 하나님이 막대기로 때려서라도 바로 세워 나가면서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한다고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자녀가 잘못하면 그 자녀를 사랑하므로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로 세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 여러 가지 징계를 해서라도 바로 세우시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큽니다. 성도는 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습니다. 또 택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절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라고 했는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피로 죄 사함을 얻어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레 3:2, 14:7). 그러므로 피를 뿌린다는 것은 정결케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전신을 목욕한 것과 같이 깨끗하여졌습니다(요 13:10).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예정함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하신 것입니다. 즉 성부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택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로 예정하셨고, 성령은 택한 백성에게 예수님의 피를 믿게하고, 순종케 하여 거룩하게 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으로는 정결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정결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라고 했는데,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되었고(고전12:3),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히 3:1, 유 1:20). 순종함이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롬 1:5).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셨고, 우리의 속에 내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말씀을 순종함으로 점점 더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잠시라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늘 감동을 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대로 순종하면 점점 거룩해집니다. 예수 믿는 것은 순종이고, 순종은 믿음입니다. 또 순종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희생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 구속의 은혜와 평강이 있음

본문 2절 하반절에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했는데, 은혜와 평강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부터 오는 구속의 은혜와 영적 평강을 말합니다.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믿는 사람에게 있어야 되고, 그 구속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됩니다. 그 결과로 영적 평강이 오고, 그 가운데서 살아야 믿는 일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구속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2. 구원 찬송

본문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후서에는 보석이 쫙 깔려있습니다. 하나 제치면 보석이 나오고, 또 제치면 보석이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우리의 구원을 말함에 있어서 첫 마디가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말할 때에, 이 구원이 너무 크고 감사해서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중생시키심을 찬송함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에 기초한 것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서 “거듭나게 했다”는 보배 하나가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예수 믿기 전에는 죽었던 영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 중생이며, 그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모태에서 날 때부터 죽은 영혼으로 나옵니다. 안 믿는 사람의 영혼은 전부 죽은 영혼입니다. 죽었으므로 하나님도 모르고, 천당과 지옥도 모르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죄 값을 물어 주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의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인해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와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영혼은 산 영혼입니다. 즉 예수 믿은 사람의 영은 살았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영혼은 죽었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죽은 자는 자기 아버지를 모릅니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살았기 때문에 압니다. 또 죽은 자가 숨을 쉽니까? 산 자가 숨을 쉽니다. 우리가 숨을 쉽니까? 호흡을 합니다. 영적 호흡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영적 호흡입니다. 또 천당과 지옥도 압니다. 살았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죽었으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죽은 것은 캄캄합니다. 아버지도 모르고, 자기를 건져 준 분도 모릅니다. 숨도 못 쉬고, 먹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령한 양식을 먹습니다. 산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살지 못했다면 신령한 것을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산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살아났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살아났습니다.

신앙과 중생에 있어서 논리적으로는 중생이 먼저입니다. 살았어야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앙과 중생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됩니다. 우리는 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살려 놓으셨기 때문에 중생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중생을 시키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다음에 성령의 감동입니다. 즉 대속의 죽음과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를 살려 놓으셨습니다. 이제는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산 사람이 죽은 사람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잠든 사람은 산 사
람이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망할 줄도 모르고 망할 자리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잠을 자는 사람이 많은데, 신앙에 잠이 들면 안 믿는 사람과 같게 됩니다.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내내 마귀 노릇만 합니다. 마귀가 끌고 가는대로 끌려갑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들인데 마귀의 일만 해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잠을 깨야 됩니다. 깨어나서 제대로 산 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제대로 볼 것을 바로 보고, 자기가 할 일을 바로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나가야 합니다. 또 신령한 양식을 먹고, 새 힘을 얻어서 달음박질하며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산 사람입니다. 산 사람은 산 일을 합니다. 즉 눈을 떠서 모든 것을 밝히 보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밝히 찾아가고,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제대로 하고 자라나야 합니다. 또 한 번 산 영혼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언제나 살아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산 영혼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믿음으로 나가야 됩니다.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을 찬송함

그 다음에 본문 3절 하반절에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는데, 이것도 보배입니다. 이 세상의 소망은 죽은 소망으로 생명이 없고 없어질 소망이나, 성도의 소망은 산 소망이며,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소망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죽은 소망입니다. “무슨 사업을 하겠다, 무슨 큰 집을 짓겠다”고 하지만 마지막에는 다 죽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산 소망이기 때문에 절대 죽지 않습니다.
즉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소망으로 없어질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의 소망을 왜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까? 그것은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영이 자라나서 예수님과 같이 되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5에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소망은 다 잠시 잠깐 있으면 없어지고, 썩어지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됩니다. 그러므로 부귀, 영화 등 세상의 소망은 다 썩어질 소망입니다. 산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소망,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면서 거기 도달할 소망이 있습니다. 로마서 5:2-4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환난도 즐거워합니다. 
왜 환난을 즐거워합니까?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는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산 소망입니다. 요한일서 3:2-3에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산 소망입니다.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 소망이 산 소망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자라나는 소망입니다. 우리의 영이 자라나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런 산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고 찬송함

본문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기업이 있습니다. 어떤 기업입니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했는데, 하늘에 쌓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5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기업을 하늘에 쌓아 놓았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하늘에 간직해 놓았습니다. 우리 기업을 하늘에 간직해놓았으니까, 세상 기업은 부도날지언정 하늘에 있는 기업은 부도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업은 하늘에 있는 기업입니다. 하늘에 있는 기업은 썩지 않습니다. 또한 더럽지도 않습니다. 부도도 안 납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누가 도적질 못해갑니다. 그 기업을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간직했으니까 누가 손도 못 댑니다. 하나님이 간직해 놨는데 누가 와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기업을 쌓아놓는다는 것을 보면, 하나씩 하나씩 갖다가 쌓아놓는 것 같습니다. 기업을 쌓아 놓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일을 잘해서 쌓이는 것입니다. 달란트 장사, 므나 장사를 잘 함으로 인해서 하늘에 있는 기업이 점점 많이 쌓입니다. 세상에서 믿는 일한 것이 하늘에 쌓입니다. 세상에서 전도한 것이 하늘나라의 기업으로 쌓입니다. 세상에서 주를 위해 봉사한 것이 하늘나라의 기업으로 쌓입니다. 세상에서 주를 위해서 희생한 것이 하늘나라 기업으로 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 소망과 하늘에 쌓아둔 기업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즐거워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점점 쌓아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사랑으로 택정하시고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시고 성령께서 순종을 시켜서 점점 거룩하게 만들어 나가며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 하늘의 기업을 쌓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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