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잘되는 것 하나만 하라
요한삼서 1:1-4
요한삼서 1:1-4
1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1. 오직 영혼이 잘 되는 것을 바람
본문 1절에,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장로는 사도 요한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교회 지도급에 있는 원로들을 장로라고 했는데, 특별히 사도들을 장로라고 칭했습니다. 또 교역자를 장로라고 했는데 치리 장로도 그 때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한다고 했는데 가이오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1:14절에,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라는 구절에서 가이오에게 바울이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이오인지 다른 가이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로마서 16:23절에,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했습니다. 식주인 가이오, 믿음이 좋고 여러 사람들을 대접한 이 가이오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장로는 사도 요한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교회 지도급에 있는 원로들을 장로라고 했는데, 특별히 사도들을 장로라고 칭했습니다. 또 교역자를 장로라고 했는데 치리 장로도 그 때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한다고 했는데 가이오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1:14절에,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라는 구절에서 가이오에게 바울이 세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이오인지 다른 가이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로마서 16:23절에,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했습니다. 식주인 가이오, 믿음이 좋고 여러 사람들을 대접한 이 가이오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본문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과, 범사에 잘 되는 것과, 강건한 것, 그 세 가지가 다 잘 되기를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삼박자 구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 가지가 다 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도 잘 되고, 또 범사에 잘 되어 사업도 잘 되고, 몸도 건강하게 되는 이 세 가지가 다 잘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업이 잘 안 되면 그 영혼이 잘 안 되서 사업이 잘 안 되는 것이며 사업이 잘 되는 것은 영혼이 잘 된 까닭이다, 또한 건강하지 못한 것은 그 영
혼이 잘 못 되서 건강하지 못한 것이고, 건강하면 영혼이 잘 된 것이다, 영혼이 잘 되기만 하면 범사도, 사업도, 몸의 건강도 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까?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빠져서 실패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 가지가 다 잘 되는 것, 꿩 먹고 알 먹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도 잘 되고, 세상 것도 잘 되는 것은 사실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인데, 영혼, 범사의 모든 것, 또한 건강함 이 셋이 다 잘되는 것에 목표를 걸어놓고 힘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성경은 하나만 하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 다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 하나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하나만 붙들고 나가라는 것이지, 세상 것도 붙들고 육체도 붙들면서 나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하나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0: 41~42절에,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한 가지란, 말씀 한 가지입니다. 말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 말씀으로 영혼이 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영의 일 한 가지만이 족하다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6: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둘 다 붙잡으려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붙잡으려는 것이므로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영혼 잘 되는 것을 한 손에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세상 잘 되겠다는 것 붙들면서 둘 다 잘 되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래도 보통은 이것 둘 다 잘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욕심들이 다 있기 때문에, 세 가지 다 잘 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성경은 하나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만 해라.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음박질만 하라고 하였고,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가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됩니다. 또 세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할 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는데 이처럼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세상 잘 되려고 따라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육신 잘 되려고 따라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부친을 장사하고 와서 좇아오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너는 살아있는 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생명 있는 일, 이것 하나만 하라는 것이지, 영혼이 죽은 안 믿는 사람에 대한 것을 다 하고 와서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가족을 작별하고 오겠다고 하자 작별하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가서 작별하고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다 잘 되가는 것은 가서 작별도 하고, 부모의 무덤을 만들어 장사도 지내고, 또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 둘 곳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닙니까? 범사에 잘 되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머리 둘 곳을 만들어 준다, 따라오면 네가 복 받는다, 사
업도 잘 되고 복 받는다고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까? 가족도 가서 작별하고 부친을 장사지내 잘 묻고 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만 해라, 하나만. 예수님 따라가는 것 하나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교훈입니다. 둘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 조카 롯이 한 손에는 하나님을 붙들고 한 손에는 소돔 고모라를 붙들고 소돔 고모라로 갔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모으려고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만 붙들고 가나안 헤브론 산골짜기로 갔습니다. 세상 것 붙들고 간 것이 아닙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후서 2장에는 롯도 하나님 잘 섬긴 사람으로 경건한 롯, 의로운 롯이라 했지만 소돔 고모라 사람이 죄 짓는 것을 보고 심령이 상했다, 탄식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잘 섬겼습니다. 삼촌 아브라함에게 배워서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소돔, 고모라로 세상 재물 붙들고 가고 한 손에는 하나님 붙들고 간 것입니다. 한 손에 무엇을 붙잡은 게 잘못되었습니까? 소돔 고모라, 그 풍성한 재물을 붙든 것이 욕심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롯은 실패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재물을 좀 벌었지만, 결국 다 불타 없어지고, 아내는 죽고, 두 딸 은 다 음란한 여자들이 되어서 아버지인 자기 몸도 버리게 되어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 두 가지 가지려 하면 안 됩니다. 하나만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만, 영혼이 잘 되는 것 그 하나만 하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영혼이 잘 되는 데로만 인도하십니다. 구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대로 구하면 안 주십니다. 영혼이 잘 되는 길로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주셔서라도 우리를 연단시키셔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고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2. 영혼이 잘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심
야고보서 1:2~4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고, 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잘 참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범사에 잘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고난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이 그저 세상에서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 삼박자 구원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여러 가지 징계를 주시고 여러 가지 시험을 주셔서 마침내 면류관 주시기 위해서 주신다고 말씀을 간과하는 모양입니다.
욥에게도, 욥의 믿음과 영혼이 잘 안 되어 있어서 환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영혼이 잘 되어있지만 욥에게 환난을 주신 목적은, 욥에게 있는 믿음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본래 믿음이 좋지만 좀 더 연단을 시키셔서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려고 욥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욥기 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했습니다. 욥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신 것은 연단 시켜서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려고 여러 가지 고난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난이 많았습니까? 동양의 제일 부자가 다 하루아침에 재산 다 없어지고, 아들 일곱, 딸 셋이 하루아침에 다 죽고, 또 자기 몸에는 몹쓸 병이 나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재 가운데 앉아있는데, 범사의 모든 일이 잘 안 된 것입니다. 그 부자
가 재산, 사업이 다 실패했고 아름다웠던 가정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정금과 같이 만드셔서 하늘나라 가서 상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히시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가 재산, 사업이 다 실패했고 아름다웠던 가정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정금과 같이 만드셔서 하늘나라 가서 상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히시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8:16절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먹을 것 없게 만들어 놓으시고 마실 물 없이 만들어 놓으시고 불뱀이 나오게 만들어 놓으신 것, 또 블레셋이 계속 대적하는 것 모두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영적 복을 주시려고 그런 시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이 잘 안 되는 것은 믿음과 영혼이 잘 안 된 결과가 아닙니다. 영혼이 잘 되는 사람에게도 더욱 복 주시려고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업 잘 되는 사람은 영혼이 잘 되서 사업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 못 되었어도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주시는 수가 있습니다. 또 안 믿는 사람도 잘 됩니다. 안 믿는 사람도 오래 살고 장수하고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됩니다.
시편 73편 3~14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고 했습니다.
악인도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무시하는데도 형통하여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며 재앙도 없고, 건강합니다. 반면 성도는 또 어떻습니까? 14절에,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셔서 영혼이 잘 되게 하시고 연단 시키셔서 정금과 같이 만드시고 하늘나라에 귀히 쓰시는 그릇으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3. 삼박자 구원의 오류
그러므로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된다, 세상 모든 것이 잘 된다는 말은 성경에 맞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무슨 영혼이 잘 됩니까. 도리어 믿는 사람은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도가 안 믿는 사람만 못한 것입니까? 이 시편을 기록한 성도는 누구입니까? 아삽의 시라고 했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시편을 기록 할 만큼 상당히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 이 시편 기록한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잘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재물이 많고 더 건강해야 되겠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는 것은 물론 영혼이 잘 못됨 때문에 당하는 것도 있지만 더 연단시키셔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같이 하늘나라에서 면류관 얻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고난도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도 은혜로 주셨습니다. 고난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1: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고난도 받게 하셨습니다. 높여주시는 것만 은혜가 아니고,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복 주시려는 것입니다. 낮춰주시는 것도 복입니다. 사람이란 대개 높여지면 좋아하고 낮추어지면 아주 섭섭해 합니다. 시험에 듭니다. 낮추시는 게 얼마나 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낮추실 때 낮아지면 하나님의 긍휼이 오고 연단이 잘 됩니다. 칭찬해주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책망해주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내 잘한 것을 칭찬해주는 사람은 내 적이다, 내 못한 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내 선생이다 는 말처럼 낮추는 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책망하고 지적하면 이 다음에 바로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못 됐는데 잘 한다 잘 한다 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점점 더 교만해서 망하고 맙니다. 책망 받고 낮아지게 되는 것이 큰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다고 했는데 건강했겠습니까? 또 욥이 건강했습니까? 욥의 믿음이 정말 좋았는데 이제는 병이 나서 집안에도 있지 못하고 밖에 나가서 재에 앉아 기왓장으로 긁고 앉아있는데 뭐가 좋습니까? 병에 관해서도, 병 들면 잘못 믿는 증거다, 건강해야만 잘 믿는 증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병이 없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눈병이 있었습니다. 가시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잘못 믿은것입니까? 디모
데에도 위병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절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고 했습니다. 자주 위병이 있었으므로 포도주를 약으로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병이 있었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도 병이 있었는데, 바울과 디모데의 영혼이 잘못돼서 병이 있었던 것입니까? 왜 병을 주셨다고 했습니까? 교만하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권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병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병 주시는 수가 있고, 또 육신에는 병이 있지만, 영적면을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병을 주시는 수도 있고, 회개시키고 유익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고 바로 서야겠는데 건강하기만 하면 바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병을 주셔서 회개하게 만드시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시고 부르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사업도 잘 되게 해주시는 수가 있고, 또 건강하게 해주시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 돼도 사업 안 되는 사람도 있고, 욥처럼 건강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고난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표준을 삼을 수 없습니다. 건강해야 잘 믿는다, 사업이 잘 돼야 잘 믿는다, 이렇게 하면 오산입니다. 그것은 잘못 나가는 것입니다. 비뚤게 나가는 것입니다.
또 병이 나면 네 믿음이 없어서 병든 것이니 회개하라고만 하면 안됩니다. 병이 들어서 유익될 것 같으면 바울처럼 병이 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낫지 않아야 유익될 것 같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낫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위해서 그 병이 떠나기를 세 번 특별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것은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스데반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얼마나 믿음이 좋습니까. 그렇지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건강도, 몸도 다 없어지고 또 가족도 다 없어지고 세상 모든 게 다 없어졌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니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 스데반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더 좋은 것 주시려고 순교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지만 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 가지 하려면 못 합니다. 여러 가지 하려면 다 못합니다. 하나만 해야 됩니다. 무엇 하나만 해야 됩니까? 영혼이 잘 되는 것만, 말씀 따라가는 것만, 그 하나만 해야 됩니다. 예수님 따라가는 것 하나만 하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를 찾는 것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진리도 찾고, 돈도 벌고, 또 몸도 건강하고 이 세 가지 다 하려면 안 됩니다. 영혼이 잘 되면 세 가지 다 잘 되는 수가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되면 사업도 잘 되는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 또 건강하게 해주시는 수도 있습니다. 건강해야 하나님 일도 잘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병들게 해주시는 수도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된다고 해서 다 건강하고 다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만 잘 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야 잘 되었든 잘못되었든, 병들든지 죽든지 영혼만 잘 되면 만족이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영혼 잘 되게 만드셔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업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결국 다 없어집니다. 부귀영화 아무리 있으면 뭐합니까? 그것도 다 없어집니다. 또 건강도 데려가실 때는 다 없어집니다. 가서 남을 것은 영혼 잘 되어있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된 것은 세세토록 남는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세상 물질, 부귀영화 모두 헛된 것입니다. 이제 남을 것은 말씀 하나만 남고 자기 영이 자라난 것만 남는데, 그것 하나 잘 만들어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이 잘되면 사업 잘되게 해주셔도 좋고 또 잘못되게 해주셔도 좋다라고 생각하고, 또 영혼이 잘 되면 건강하게 해주셔도 좋고 병들어도 좋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주시는 법이 없고 복이 아니면 주시는 법이 없는데, 병드는 것도 은혜가 되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고 고난과 환난도 은혜가 되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또 낮추시는 것도, 시험하사 마침내 복 주시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믿는다고 쫓겨난 사람이 많았습니다. 산 속으로 도망해서 수난당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았고, 산중과 암혈과 토굴로 쫓겨다니면서 모든 산업을 다 빼앗기는 그런 성도가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잘 믿으려다가 비록 세상에서 사업은 잘 안 되고 몸은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만 잘 되는 것 하나만 하고, 세상 것은 잘 돼도 좋고 또 잘못 돼도 좋습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영혼만 잘 되면 세상 것은 잘 되면 좋지만, 잘못 돼도 좋습니까? 또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아도 좋습니까? 죽어도 좋습니까? 그렇다면 합격입니다. 삼박자 구원은 여기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타락시키고 사람을 미혹하는 역사입니다. 사람 미혹하는 역사에 빠지면 안됩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렇게 사도 요한이 간구한 것은 그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잘 지켜서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잘 지키는 사람인데도 잘 안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도리어 안 믿는 사람의 형통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오래 살았습니다. 등소평도 장수했습니다. 또 김일성도 꽤 오래 살았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오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근처의 어떤 안 믿는 사람이 금년에 83세인데 무척 건강합니다. 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죽은 사람, 병든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표준 삼으면 안 됩니다. 건강함, 사업 잘 되는 것으로 표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영혼 하나만 잘 되는 데로 나가야 됩니다. 영혼 하나 잘 되는 데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주실 수가 있습니다. 영혼만 잘 되면 벌써 성공입니다. 대성공입니다. 영원한 성공입니다. 그렇게 나가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다 잘 되겠다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은 일반적인 간구라는 것입니다.
4. 진리 안에서 행함을 기뻐함
본문 3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고 사도 요한이 심히 기뻐했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없지만 이 사람들이 믿음의 자녀들입니다. 신앙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 자기가 성경 가르친 사람, 이런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심히 기쁘다는 말입니다. 그 이상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것이 잘 되어 나가는 것을 심히 기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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