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일 토요일

베드로후서 1:12-21 예언의 확실성과 위험성.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예언의 확실성과 위험성
베드로후서 1:12-21

12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1:12 그러므로 너희가 이런 것들을 알고 또 이미 받은 진리 안에서 있으나, 나는 너희들로 이것들을 항상 기억하게 하려한다. 

1:13 내가 이 장막에 사는 동안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1: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보여 주신 것같이 내가 내 장막을 떠날 때가 임박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1:15 내가 떠난 후에도 너희가 항상 이것들을 생각나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1:16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을 알게 한 것은, 우리가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크신 위엄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다. 

1: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그분에게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기뻐한다."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 

1:18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있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 음성을 들었다.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너희는 날이 새어 너희 마음 속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이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좋다. 

1:20 너희는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곧 성경의 모든 예언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21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을 따라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1. 진리로 경성케 함

본문 12-13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라는 뜻은 이미 진리에 서있지만 또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장막에 있을 동안에”에서 장막은 육체를 가리킵니다(고후 5:1). “너희를 일깨워”라고한 것은 베드로가 장막에 있을 동안에, 즉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일깨워야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는 요한복음 21:18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가 순교당할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세상을 떠날 날이 임박 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들에게 필요한 진리를 일깨워 주려고 힘을 썼던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일깨워 줄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이들, 남편, 부모, 시부모, 며느리, 딸 등을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또 말씀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일깨워 줄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날까지 살게 해주실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사는 날까지 일깨워 주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야 합니다.

가족들 중에 뱀 노릇 하는 가족이 있으면, 꼬리를 잡고 놓지 말며,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꼬리를 잡는 것이란 마귀 노릇 하는 아이들을 포기하지 말고, 늘 영향력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르쳐 주고, 잘 지도해 주는 것이 꼬리를 잡는 것입니다. 안 들어도 자꾸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이사야 28:13에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것이 꼬리를 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세상 떠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을 경성시킬 책임이 다 있습니다. “믿음을 잘 지키라”고 한 마디만 해주어도 됩니다. 즉 아이들에게 “너 믿음을 지키라. 믿음을 안 지키고 가다가 마귀의 시험에 든다. 교회에 잘 나와야 된다. 예배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고 하며 경성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며 너를 늘 떠나지 않으신다”라고 하는 것도 경성시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을 늘 말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 시편 1:1-6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말씀을 한 마디 해주면 그 사람을 경성시켜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첫째라면, 둘째는 다른 사람을 경성시켜주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경성시켜주는 것을 하다가 하나님께 가면 복이 있습니다. 노인들도 집의 식구들에게 성경 한마디씩이라도 전해서 그들을 경성시켜 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에게는 언제나 자녀의 꼬리를 놓지 말고 경성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고, 이방 나라에 선교사도 보내어 사람들을 경성시키는 일을 많이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진리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서 늘 생각나서 믿음을 잘 지키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는 것은 경성시켜서 떠난 후에라도 계속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이 들었으면 말한 사람이 떠난 다음에라도 생각이 납니다. 김현봉 목사님께 많이 들은 것이 있습니다. “양심을 똑바로
써라, 일심정력을 다해라, 삼가 조심하라”는 말씀이 늘 생각이 납니다.
그러므로 같은 말이라도 자꾸 해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이 생각나게 됩니다.  

2. 재림에 대한 증거

본문 16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큰 능력으로 재림하신다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예수님의 재림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것을 말합니다(마 17:1-8).

본문 17-18절에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즉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지극히 큰 영광 중에 변화된 모습을 직접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재림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는 것을 친히 보고 증거 한 것입니다.

변화산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받은 은혜가 일평생 베드로를 인도하였고, 야고보에게도 변화산에서 받은 은혜가 일평생 그를 인도하였으며, 요한의 경우도 변화산에서 받은 은혜가 일평생 요한을 인도했습니다. 요한이 큰 은혜를 받아서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받은 은혜가 요한에게 큰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변화산에서 받은 은혜와 역사를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에 기록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을 말한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좋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교회를 인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교역자들이 듣기만 하지 말고, 친히 자기가 가서 보고 와야 힘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한테 듣고 와서 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과 호랑이 가 나온 것을 직접 보고 온 사람의 말은 다릅니다.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와서 “뒷동산에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호랑이가 나온 것을 보고 와서 “뒷동산에 호랑이가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눈을 보아도 다르고, 얼굴을 보아도 다르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아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도 실제로 진리의 세계 들어가서 보고 그것을 전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신령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보고 전도하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전도하여도 확신과 힘이 부족합니다. 그저 나가서 “예수나 믿으세요. 그러면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정도입니다. “예수, 천당” 한마디만 해도 능력이 나와야지, “예수나 믿어 보세요”해서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직접 그 세계가 들어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친히 변화산에 올라가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요새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즉 신령한 세미한 음성을 듣고 확실히 깨달고 나가서 전해야 힘이 있습니다.


3. 예언의 확실성과 위험성

순종하면 진리를 확실히 깨닫는다

본문 19절에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하였는데,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본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더 확실한 예언입니다. 확실하기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을 우리가 따라갑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고 하였는데, 신령한 면에 대해서 어둡던 것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샛별이 떠올라야 날이 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날이 새어야만 샛별이 떠오릅니다. 날이 훤하게 새오면 그 다음에는 얼마 안 있다가 샛별이 떠올라 옵니다. 이것이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즉 “샛별이 마음에 떠오른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날이 새어야 샛별이 떠올라 온다는 것은 신령한 면이 밝아져야 진리를 정확히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날이 샌다는 것은 심령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가리키고, 영의 눈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눈이 어떻게 할 때에 점점 밝아집니까? 예수님께서 침을 진흙에 이겨서 눈에 발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할 때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 졌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약입니까? 예수님의 침이 약입니까? 진흙이 약입니까? 실로암 못의 물이 약입니까? 예수님의 침이나 진흙, 실로암 물이 약이 아닙니다. 순종이 약입니다. 가서 씻으라고 할 때에 “예”하고 씻으니까 눈이 번
쩍 떠졌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면 눈이 떠집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소경의 눈을 더 어둡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눈을 뜨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당하는 모든 현실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눈을 떠야 샛별이 떠오릅니다. 순종만 하면 눈이 떠집니다. 즉 날이 점점 새어 갑니다. 날이 샌다는 것은 점진적으로 영안의 눈이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가 점점 열리는 것이 날이 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샛별이 떠오릅니다. 즉 계속해서 순종을 해나가면 샛별이 떠올라 옵니다. 환하게 떠올라 옵니다. 샛별이 떠오른다는 것은 영이 자라나서 정확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진리를 깨닫는 것이 샛별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확실하니까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날이 새지 않습니까? 날이 새지 않는 것은 순종을 하지 않아서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어두운 가운데서 헤매는 것이며, 흑암 속에서 헤매면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1계단에서 2계단으로, 2계단에서 3계단으로 점점 올라가면 “아, 이것이구나!”하고 번쩍 뜨여질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샛별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왕도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찾았고, 제사장, 서기관, 백성들도 다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찾느라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서기관이 미가 5:2의 말씀을 들어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흑암 속에서 어떻게 할지 모르고 있다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길을 찾았고, 그 말씀을 순종해서 베들레헴으로 향하여 갈 때에, 잃어버렸던 별이 문득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샛별이 떠올라 온 것입니다.

순종을 해야 샛별이 떠올라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나가면 영의 세계가 열리고 확실한 것이 깨달아지고, 보여집니다.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더 확실하기 때문에 생명을 내어놓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라납니다. 자라나면 샛별이 떠오릅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어도 날이 새지 못한 사람이 많고, 또 어느 정도 많이 밝아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샛별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샛별이 떠올라야 합니다. 샛별이 떠오르면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샛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샛별이 떠오르기 전에는 모르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가 보다 하고, 옳다고 하니까 옳은 줄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샛별이 떠올라 오면 “이것이 틀림없다, 이것이다”하고 확실히 붙잡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샛별이 떠올라 온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도록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하였는데, 신령한 계단에 올라가야만 영이 열립니다. 영이 열려야만 영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 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영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소경이 눈을 떠야만 색깔을 분별 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떠야 “흰 것이다, 검정이다, 노랑이다”하며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지 않고는 검정이고, 빨강이고, 청색이고 아무리 보아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도 신령한 영안의 눈이 떠져야 샛별이 떠올라 확실해 알 수 있습니다. 샛별이 떠오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샛별이 떠올라 진리의 확신을 가지면 진리를 위해서 죽는 결심을 가지고 나가므로 환난과 핍박이 올지라도 다 이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면 멸망함

본문 20-21절에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면 안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뜻으로는 모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올라 와야 말씀을 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 사람의 생각과 지식으로 성경을 억지로 풀면 멸망합니다.

베드로후서 3:15-16에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자기의 사사로운 지혜를 가지고 억지로 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과 철학과 세상주의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죄만 짓는 것입니다. 또 신비주의자들은 사람의 감정에 느껴지는 대로, 꿈과 환상에 적용시켜 억지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성경을 알려고 하고, 많은 학식과 지식으로 성경을 알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샛별이 떠오르지 않은 어린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해석하여 따라가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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