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9일 토요일

요한계시록 14:1-5 시온 산에 올라가라.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시온 산에 올라가라
요한계시록 14:1-5

1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 시온 산에 올라가는 신앙을 가지라

시온 산에 올라가는 신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입니다. 시온 산에 올라가는 생활은 이후에 우리가 하늘나라의 신령한 세계에 가서 사는 것입니다. 또 지금은 영적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 시온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신령한 세계로 올라가야 됩니다. 올라가는 성도가 있고, 내려가는 성도가 있고, 중간이 있습니다. 신령한 시온 산을 향해서 날마다 올라가는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발견하고 날마다 예수님을 더 발견하고 더 얻어나갑니다. 또 진리의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진보가 있고 영이 자라나고 신앙이 향상되어 나아갑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시온 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신앙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찬송 부르며 올라가야 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우리가 영적인 높은 곳을 향해서 날마다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올라가는 성도는 산 성도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머물러 있는 성도가 있는데, 그런 성도는 잠자고 있는 성도요, 앉은뱅이 성도입니다. 또한 내려가는 성도도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서 한발자국씩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빠져가는 성도입니다. 데마와 같은 성도입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도리어 뒤를 돌아보는 성도, 그것은 롯의 처와 같은 성도입니다.

이 세 가지 성도 가운데 어떤 성도가 제일 많겠습니까? 두 번째가 제일 많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5:12절에도 때가 오래므로 마땅히 선생이 돼야 될 터인데 아직도 초보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가 오랜 사람은 많이 진보가 돼서 선생이 돼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초보적인 신앙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올라가는 신앙입니다. 시온 산 정복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야 하는데 곁 봉우리가 많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나 잘못된 교훈, 인본주의, 세상주의로 나가는 것이 곁 봉우리입니다. 그리로 가는 것은 올라간 것이 아니고, 시온 산에서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시온 산을 올라간다는 것은 영적 향상을 뜻함

시온 산을 향해서 올라간다는 것은 영적 향상을 뜻합니다. 영이 자라나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발견하고 날마다 영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깨닫지 못한 진리를 많이 깨닫는 것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도덕적인 면에서 진보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24:2절에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라고 하였고, 24:4절에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장성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동이 깨끗하다는 말씀이고, 마음이 청결 하다는 것은 언제나 중생한 영이 마음을 써서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한다는 것은 생각과 사상이 진실할 것을, 거짓 맹세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이 자라나고 영적 실력이 자라납니다. 도덕이 자라나고 진리에 대한 지식과 신령한 지식이 자라납니다. 인격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시온 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점점 나아져야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 점점 나아지고, 깨닫는 것이 점점 나아지고, 영적 실력이 점점 나아지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도 점점 더 많이 알아나가고, 그리스도 안에 점점 깊이 들어가고, 그 생명에 점점 깊이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점점 깊이 참여하는 이것이 자라나야 합니다.


2. 시온산에 올라갈 자격이 있는 자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는 자

히브리서 12:1-2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음박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힘써 믿는 것이고, 달음박질하며 믿는 것이고, 일심정력을 기울여서 믿는 일에 진보하는 것입니다.

달음박질 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는 것이 준비입니다. 무거운 것을 지고 달리면 얼마 가지 못해서 지칩니다. 또 죄에 얽매여 있어서 달려 나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얽매인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달음박질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배가 항해하려고 할 때에 닻을 올리지 않고 나가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에 얽매여 있으면 아무리 가려고 해도 계속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얽매이는 죄를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죄악에 얽매이고, 마귀에 얽매이고, 세상에 얽매였던 것을 벗어버려야만 달음박질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주일을 못 지킨 죄, 우상의 제물을 먹은 죄, 십일조를 못 드린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술 먹고 담배 피는 사람은 술 담배 먹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양심에 가책이 되는 죄, 마땅히 해야 될줄 알면서도 하지 못했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죄를 다 벗어버려야 됩니다. 회개하고 벗어버리십시오. 그래야 시온산을 향해 달음박질 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것도 벗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죄하고 무거운 것을 구분해 놓은 것을 보면 무거운 것은 죄가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것에 눌려도 달음박질 못합니다. 무거운 것이란 자기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붙잡겠다는 것, 제가 잘되게 하겠다는 것, 제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 자기를 위해서 하겠다는 것이 전부 무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지고 달음박질 하면 얼마 가겠습니까? 얼마 못가서 다리가 아파서 폭삭 주저앉고 맙니다.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겨버리십시오. 내가 붙잡았던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겨버리고, 내가 하려고 애쓰던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겨버려야 달음박질을 잘할 수 있습니다. 다 주께 다 맡겨버리고 자기는 빈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빈 마음을 가지고 그저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는 것입니다. 제가 하겠다는 것은 없고, 또 안하겠다는 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고자 해야 달음박질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붙잡으려고 하면 거기에 붙잡힙니다. 이것이 무거운 것입니다. 다 주께 맡겨버리고 주님의 인도만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 자

본문 4절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 자가 시온 산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여자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1절에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고, 디모데후서 3:6-7절에는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자’는 속화된 교회, 속화된 신자입니다. 거기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혹 받지 않아야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 자가 됩니다. 또 세상주의에 미혹을 안 받아야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양심을 써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따라가지 말아야 하며,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세에 이 세상으로 더불어 더럽히고 주일을 안 지킵니다. 믿음을 안 지킵니다. 그것이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 속화된 교회나 신자들이 자꾸 유혹합니다. “꼭 그렇게 믿어야 되느냐? 우리도 다 믿는데 너희만 유별나게 믿느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말씀을 못 따라가게 만듭니다. 거기에 유혹을 받고 양보하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는 자가 됩니다. 더럽히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는 자라야만 시온 산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정절이 있는 자

또한 본문 4절에 “정절이 있는 자”라고 했는데 신앙의 정조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비진리와 속화된 데에서 일시라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정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에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시라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옳은 진리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다가 풀무불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은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육신의 정조를 지키느라고 생명을 내놓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이 신앙의 정조, 즉 영적 정조를 생명 내놓고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본문 4절에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속주가 우리의 구원을 이뤄나가기 위해서 인도하실 때에 어디로 인도하든지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험한 곳이나 고난당하는 곳이나, 감옥이나 죽는 데나, 어디로 인도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 평안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안일주의, 향락주의, 육신의 평안함, 이런 것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주께서 인도하시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따라가고, 십자가의 길도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리 손해가 나도 따라가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따라가고, 어디든지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교회의 어떤 집사가 우유 도매상을 하는데 주일날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도매상이니 소매상에 나눠줘야 되니까 주일날 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잠깐 교회 나왔다가
우유 도매상 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목사에게 그 직장 그만 두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두면 직장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직장이 없어지면 다른 데가면 되지 않느냐? 이 세상에 우유 도매상 하는 사람만 사느냐? 왜 그것만 하려고 하느냐?”고 하니, 다른 데 가면 돈을 조금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돈 조금 받으면 조금 받는 대로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주었습니다. 주일날 잘 못 지키는 직장에서 나오라는 것이 주님의 인도입니다. 나오라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또 어디든지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생해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따라가야 됩니다. 지나간 주간에 우리 교역자들과 신학생들 한 200명이 개인 천막 가지고 용인 초부리 뒷산에 가서 천막을 치고 자취하면서 기도하고 왔습니다. 요새 밤에 추운데 산에 가서 있으려면 여간 춥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주께서 인도하시는 바니까 거기에 있는 것이 편안합니다. 집에 드러누워 있으면 편안하겠습니까? 육신은 편안할지 몰라도 심령은 평안합니까? 주께서 기도하는 곳으로 인도하시면 기도하러 가는 것이 가장 큰 은혜요, 복입니다.
육신은 고생이고 좀 춥지만 주께서 인도하시는 자리니까 주께서 같이 해 주시고 거기서 많은 은혜를 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나 니느웨나 갈멜 산이나 호렙산이나 어디든지 주께서 인도하시는 바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독자 바치는 것도 주께서 바치라고 인도하셨으니 바치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도 주께서 떠나라고 하셨으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자가 시온 산에 올라설 자격이 있습니다. “가려면 손해가 납니다. 고생이 많습니다. 생명이 위태합니다. 그래서 못 따라갑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따라가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겨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는 청기지가 되어야 됩니다. 주께 맡기고 나는 주님의 청지기로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내 것은 다 주의 것으로 삼아 놓은 청지기입니다. 이 몸도 주의 것, 생명도 주의 것, 자녀들도 주의 것이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신앙이 시온 산으로 올라가는 신앙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

본문 4절 마지막에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3:19절에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를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란 것은 가져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놓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마음도 처음 익은 열매니까 하나님께 드리고, 자녀들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의 목숨도 하나님께 드려 놓으면 모두 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손해가 나도 하나님께 손해가 나는 것입니다. 갖다 바쳐놓으면 보호할 책임도, 주장하실 책임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놓은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왜 책임 안지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바쳐놓고 우리는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야 됩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몸은 값으로 산 몸이 되었으니 이 몸과 생명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렇게 처음 익
은 열매로 하나님께 바치고 사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시온 산에 날마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안 바치고 자기가 붙잡고 있으면 못 올라갑니다. 물질을 붙잡으면 물질에 붙잡히고, 사람을 붙잡으면 사람에게 붙잡히고, 어떠한 직장을 붙잡으면 직장에 붙잡힙니다. 그러니까 붙잡은 것은 다 내놓고 하나님께 바쳐 드리고 내 것이 하나도 없게 빈 마음을 가지고 빈손을 가지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신앙을 가져야 시온 산에 올라가는 신앙이 됩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본문 5절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24:3-4절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산, 즉 시온 산에 올라갈 자는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이 깨끗해야 됩니다. 행동이 깨끗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청결해야 됩니다.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다 내버려야 청결해집니다. 뜻과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허탄한 데 두면 허탄한 사람이 되고, 마음을 음란한 데 두면 음란한 사람이 되고, 마음을 싸우는 데 두면 싸움꾼이 됩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고 마음을 언제나 진리에 두고 예수님께 두어야 됩니다. 시편 24:6절에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날마다 구하는 자라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말씀에 두어야 됩니다. 거짓 맹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말에 대해서 진실해야 됩니다. 언어에 대해서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시온 산에 올라갈 자격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달음박질 하는 자

달음박질하려면 뒤의 것은 잊어버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뒤에 있는 것 무엇입니까? 앞에 있는 것이 아니면 다 뒤에 있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은 푯대,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앞에 있고 다른 것은 다 뒤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앞에 있는 푯대 하나만,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달음박질 하여야만 됩니다. 그래야 달음박질이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또 쳐다보고 그러면 어떻게 달음박질 할수가 있겠습니까? 마라톤 선수가 달음박질 할 때에 뒤를 쳐다보고 생각하면서 가면 달음박질이 되겠습니까? 달려갈 때는 다 잊어버리고, 그 목표를 향해서 계속 달음박질해야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뒤에 있는 것은 다 주께 맡기고 또 잊어버리고 푯대만을 향해서 계속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리고, 늘 시온 산에 올라가는 생활, 전진하는 신앙, 진보하는 인격, 진보하는 진리와 지식, 깨달음, 이 모든 것이 다 자라나야 됩니다.

날마다 올라가기 위해서 기도 하고, 기도원에도 가고, 새벽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시온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안 하면 못 올라가고 밤낮 같은 자리입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선생이 되어야 될 터인데 아직도 초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또 뒤로 후퇴하여 세상에 점점 가까워지기까지 합니다. 히브리서 10: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침륜이란 멸망입니다. 또 내내 그 자리에 앉아있어도 안 됩니다. 오직 깨어서 시온 산 정복을 향해 날마다 올라가야 됩니다. 일심정력을 다해서 달음박질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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