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4일 월요일

요한일서 4:17-21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음. 이병규목사강해설교 계약신학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음
요한일서 4:17-21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1. 사랑의 효과

그리스도의 구속완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졌음

본문 17절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지극히 큰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므로써”라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완성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완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룸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는데, 그리스도께서 사랑을 온전히 이룬 것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랑 안에 거하려고 힘을 쓰기만 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 안에 거하게 해주십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음

본문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거하며, 그 사랑을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랑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면, 아무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에 아무 가책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을 다 내어 쫓습니다. 두려워 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형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두려움을 다 내어 쫓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는데(10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희생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모든 것을 은사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오려고 하다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이처럼 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그 어떤 것이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폭포수와 같이 계속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시고,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이 큰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없습니다. 근심걱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걱정될 만한 것이 온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바로 일으켜 세워 주시려고,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서 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사랑, 독생자까지 주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손해 보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또 손해 볼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는 것만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품속을 떠났다가 왔다고 해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며 송아지를 잡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잔치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돼지와 같이 되었을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지 않습니다.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죽게 하시는 것입니까? 천당으로 데려가려고,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려고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한 것도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데려가시려고 순교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순교도 사랑으로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우리에게 올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허락하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믿음을 지키며 이겨야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나? 무슨 팔자인가?” 하며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래도 나를 사랑하셔서 연단시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이 모든 것을 주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회개시키시고, 낮추게 하시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려고, 또 나를 만드시려고,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고, 그 큰 사랑을 계속 쏟아 부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손해를 주겠습니까? 손해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죽는데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어주어 죽는다고 하면 하늘나라에 가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습니까? 곤고에 처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즉 불평과 원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사로가 불쌍합니까?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거했는데(눅 16:23), 왜 불쌍합니까? 불쌍한 자는, 안 믿고 물 한 방울 없는 지옥에 간 부자입니다. 요새 정치가들이 서로 물고, 뜯고, 도적질해 먹는데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 있다가 다 탄로가 나고 끝장이 날 때는 두려울 것입니다. 두렵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났는지 안 떠났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두려움이 있나 없나, 불평이 있나 없나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또 팔자타령 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데 무슨 팔자타령입니까? 나에게 오는 모든 환경은 제일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슨 팔자가 이런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증거인 줄 알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서, 또 가장 필요한 것으로 골라서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면 원망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 매를 맞아도 즐겁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위해서 돌에 맞을 때에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에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된 것은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처럼 되는구나”하며 너무 기뻐서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를 위해서 핍박을 받으시고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나도 되는구나’ 하며 얼굴이 천사처럼 된 것이라고 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함

본문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성도가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같은 사랑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의 원동력에 의하여 하나님과 믿는 형제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은 신본주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그 사랑이 넘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참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이목구비(耳目口鼻), 사지백체(四肢百體) 등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손을 미워하고 또 그 사람 발을 미워하고 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붙은 것을 다 사랑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 붙은 것, 하나님께 소속된 것들, 하나님의 지체를 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것을 다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붙은 사람들, 그 지체들, 소속들을 다 사랑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또한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붙은 것을 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께 붙은 자들, 하나님의 지체들을 다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지체이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도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지체를 사랑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몸도 사랑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몸을 사랑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에게 소속한 지체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지체입니다. 예수님은 머리이시고 성도는 몸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은 다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교회도 사랑하고 성도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모든 것을 다 사랑하게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말 하는 자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미워하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치 못하는 줄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다시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 자녀의 모든 것, 즉 자녀의 지체 몸, 머리 발을 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 자녀의 지체 하나가 병신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자녀의 손이 병신이라고 하면 그 손을 미워할까요? ‘어떻게든 고쳐서 잘 사용하는 손이 되게 하겠다’ 하지 않겠습니까? 또 고쳐 주려고 애를 쓰고 사용하지 못함에 더욱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까? 미워하여 잘라 버리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고쳐주어서 바로 세워서 깨끗하게 만들고 온전하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치 못하는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 21절에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라고 하였는데, 요한복음 15:12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께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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